• 1948년 남북의 4김씨.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왼쪽부터).
    ▲ 1948년 남북의 4김씨.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왼쪽부터).
    ★슈티코프, “대한민국 건국 저지” 2차남북협상 공작 지휘

    역사적인 5.10총선에서 역사적인 헌법 제정 공포까지 약 2개월동안, 남북한의 4김(金: 김구+ 김규식, 김일성+김두봉)은 총선거 저지작전에 이어 대한민국 건국을 가로막을 새로운 전략에 부심한다. 물론, 여기에 앞장서서 전략전술을 짜주고 총지휘하는 사람은 슈티코프였다. 이 공작 역시 실무 행동 전위대는 평양의 김일성과 그의 심복 서울의 성시백이오, 박헌영은 조연(助演)이다.

    슈티코프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쪽의 두 김씨는 제2의 남북협상 준비에 분주하다. 총선거를 보이콧한 김구는 선거결과와 변화를 지켜보다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6월1일 경교장에서 김구의 한독당 측근 5명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5명이 합동회의를 연다. 
    이 자리에도 평양의 1차남북협상 성사에 성시백과 함께 앞장섰던 권태양((權泰陽)1913~1966)이 합류했다. 북조선로동당 김일성은 성시백의 서울공작위원회를 통하여 김구 비서 안우생, 김규식 비서 권태양, 조소앙에게 김흥곤을 공작원으로 밀착시켜 2차남북협상도 전처럼 치밀하게 진행시켰음이 뒷날 드러난다. (송남헌, 앞의 책. 박병엽, 앞의 책. 서동만 [북한사회주의체제 성립사-1945~1961] 선인, 2005, 외 다수).
    안동출신 권태양은 일본 중앙대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 서무부장, 민족자주연맹 비서부 총무,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남측 대변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6.25때 서울서 김규식을 북한인민군에게 넘겨주었고, 1966년 숨지자 북한은 권태양을 인민위원(국회의원)으로 승진시켜 ‘조국통일상’을 준다. 
  • 1948년 6월25일 여주 남한강 신륵사를 둘러보며 기념촬영한 김구와 김규식(오른쪽).
    ▲ 1948년 6월25일 여주 남한강 신륵사를 둘러보며 기념촬영한 김구와 김규식(오른쪽).
    ★김구 “남한정부는 무용지물 될 것”...유림 “협상파는 공산당 제5열”

    「약 1개월간 침묵리에 통일공작을 추진하던 김구, 김규식 양씨의 행동통일은 대한민국의 국회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실현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직적 규합과 남북정치회의를 소집할 것으로 관측되어 국회가 발족한 작금의 정국에 비추어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김구와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던 조선일보(1948.6.2.)의 보도 내용이다.
    경교장에서 연석회의롤 거듭한 김씨들은 평양의 ‘결정서’에서 동의했던 남북 정치회의를 개최하려는 작업을 이어가며 “우리의 무기는 민족단결뿐”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물밑작업을 계속하면서 5.10선거에 참여한 당원들을 모두 제명해버린다.

    6월24일 김구는 기자들의 질문에 “남한 반쪽 정부는 무용하게 될 것이다. 이때야 말로 이승만박사는 물론이요, 남북 전민족이 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총선거로 구성되는 대한민국 정부가 ‘일시적 정부’로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송남헌 증언, 앞의 책).

    두 김씨는 여주(驪州) 신륵사 등을 관광하고, 한강 상류에서 뱃놀이도 하고 개를 잡아 개장국을 즐기며 ‘통일독립 촉진회(약칭 통촉)를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북한에서 6월29일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열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분신 같은 공작원 성시백은 두 김씨와 조소앙, 김창숙, 유림, 장건상 등에게 “해주에서 긴급회담을 할 테니 해주로 오라”는 북한 두 김씨(김일성-김두봉)의 편지를 전하며 공작을 벌이느라 바쁘다.
    이때, 김구의 안우생과 김규식의 권태양 등 ’공작 실세‘들은 해주로 갔다. 두 김씨는 해주행을 머뭇거렸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충칭(重慶) 임정에 참여했던 유림(柳林,1898~1961)의 이탈과 비판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유림은 1929년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고 임시정부의 ’아나키즘진영 대표‘ 국무위원, 이때 그는 남북통일협의회 결성에 앞장섰는데, 김구-김규식 등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세력에 대하여 “공산당 제5열”과 다름없다는 비판 성명을 냈다. 
    “국회에서는 조속히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가을 파리 유엔총회에서 우리 정부의 승인을 획득하려고 만반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이때에 좌익계열은 물론 김구씨와 김규식씨를 비롯한 반정부파에서도 유엔총회에 그들의 대표를 파견하려는 운동이 최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김구-김규식씨등 중간파 인사들이 평양에서 귀경한 이래 ’최후의 투쟁 목적‘이라 한다. 그런데 이 공작은 중간파 단독행동이 아니라 남북공산당과의 연락하에 진행되고 있다.” 
    이에 유림의 독립노동당에서는 “남북협상파들은 공산당 제5열에 동록되었다”고 비난하고 일체의 관계를 끊어 통일지도자협의회에서 탈퇴하였다. ([동아일보] 1948.6.19.)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평양에 가서 신탁통치에 서명하고 한패가 되었으니 지조 없는 독립운동가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유림의 성명으로 파란이 일어나 두 김씨는 자파세력 안에서도 곤경에 몰리게 되었다. 

    ★김일성, 단독정부 공식 출범 준비...“북한 헌법 실현하겠다”

    슈티코프의 지령에 따라 7월5일까지 닷새동안 열린 평양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김일성은 “결정적 구국대책을 취하겠다”고 연설하였다. 지난 4월 김구가 방북했을 때 통과시킨 북한헌법이 “우리 손으로 통일하는 유일의 길”이라 말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현시킴으로써, 북한 단독정부가 아니라 남조선인민들이 참여하는 전 조선정부를 수립해야겠다”고 장담한다. 즉, 2년전 1946년 2월 출범한 단독정권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남북통일 정부로 공식 출범시키겠다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김구와 함께 월북하여 북한에 잔류했던 홍명희, 백남운 등 남한 좌익인사들이 김구와 김규식을 대리한 안우생과 권태양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쳤음은 물론이다. 
    이 회의도 [레베데프 일기]는 김일성의 연설문을 비롯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코프의 감독하에 진행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전현수 옮김 [레베데프 일기, 1945~1948] 2006)

    또 하나 밝혀준 놀라운 사실은 김규식이 6월23일에 북한에 보낸 편지 내용이다. 김구와 자신은 월북이 힘들다고 말하고 북한에서 100명의 대표를 남한으로 보내주면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북한이 공개하지 않았다.
  • ▲ "남한정부는 임정계승 자격없다"고 부정한 김구의 인터뷰 기사.(조선일보 1948년7월2일자 1면)
    ★김구 “반쪽 정부 열 개를 만들어도 임정 계승 자격 없다”

    이 무렵 기자회견에서 김구가 밝힌 답변들이 또 파문을 일으킨다.
    기자: 북한의 송전(送電) 중단 문제에 대하여 질문.
    김구: 전기 문제는 민족적으로 해결할 문제인데, 조선인대표를 보내지 않아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국제화하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문제로 되었으니 해결 불능이다. 
    기자: 국회서 정한 ’대한민국‘ 국호는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는 것인가.
    김구: 남북을 통합한 선거를 통하여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해야만 되며, 현재의 반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 정부를 하나 아니라 열 개를 만들어도 법적으로 조직이 안된 정부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할 수 없다. ([조선일보] 1948.7.2)
    이처럼 김구는 자신이 ’주석‘인 임정이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통하여 남북선거를 치러 세우는 통일정부, 즉 자신이 권력을 잡는 정부만이 ’임정 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거기엔 ’공산주의‘ 여부는 따질 틈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북한의 송전중단문제가 단지 ’조선인까리의 해결‘로 보는 관점이 진심이라면 이것은 김구 자신이 미-소의 분단점령상황과 국제정치적 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이 결여된 ‘우물안 개구리’ 시각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김구에 긍정적인 연구자 손세일조차 “그것은 너무나 안이한 판단”이라 비판한다. (손세일, 앞의 책).
  • 경교장을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 일행.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유어만 중국대표와 김구가 나란히 앉아있다.(1947.12.18)
    ▲ 경교장을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 일행.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유어만 중국대표와 김구가 나란히 앉아있다.(1947.12.18)
    ◆김구 “소련은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시켜 남한에 인민공화국 세울 것”

    7월11일 오전 11시 경교장에 유엔위원단의 중국대표 유어만(劉馭萬,1897~1966) 공사가 나타났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화중대(華中大) 교수를 역임한 유어만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친분이 깊었으며 장개석 정부에 임정지원을 적극 권장한 인물로서 김구 가족과도 친밀한 인물이다. 미군정에도 임정지원을 권장했던 그는 뒷날 백범 아들 김신이 대한민국의 주대만대사가 되자 자주 어울리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김신 자서전 [조국의 하늘을 날다] 돌베개, 2013).
    그런 유어만 공사는 김구의 총선거부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반대가 내심 심히 안타까웠고, 장개석까지 김구를 설득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경교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유어만은 김구와 대담 기록을 영문으로 작성하여 대만 정부에게 보고하고, 이승만에게도 보냈다. 지금도 이화장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 사본들이 보존되어 있다. 통역으로 한 시간 넘게 진행된 대화의 놀랄만한 내용은 당시 김구의 돌발적인 변신과 ’김일성 연대론‘의 의혹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 자료이므로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김구-유어만 대화록▶

       ◉유어만: 나는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도 외교관이지만 솔직한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한 것이 첫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문한 입니다.
       ▶김구: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떡이다)  
       ◉유어만: 유엔위원단의 한 사람으로서 만나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만, 며느님과 아드님이 중국에 체류중이라 하고 엄(항섭)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으니 통역이 없는 것 같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김구: 그 사람들이 없어도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유어만: 나는 오철성(吳鐵城, 중국 2대 외무장관, 김구와 친분)이 보낸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장개석 총통께서도 선생께 편지를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나의 보고를 받고 나서 쓰도록 건의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 통의 편지가 선생께 전하는 같은 메시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승만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박사와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립하는 데 함께 협조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니까요.
    중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집안 형제들이 다툴 수는 있지만 타인들의 비방을 자초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선생의 아드님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저의 말이 거슬리더라도 아들이 아버지께 진심으로 올리는 말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지만, 그러면 부디 그렇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는 정치적 적수로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김구: (심각한 표정으로 웃음 지으며)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말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기는 부적절 하지요. 이 정도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아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겠지요.
       ◉유어만: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제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는 최종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김구: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
       ◉유어만: 내가 이승만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곤 했지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저의 말에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관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이박사와 협력하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우익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찬란한 애국활동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 지도자협의회에 참여하심으로써 그런 기록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벌써 북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이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김구: 나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기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했듯이, 사람들은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이승만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가 될 것이오. 내가 밖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소.
      
       ◉유어만: 선생의 말씀은 오히려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하는군요. 이승만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의 동지였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참여하여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될지 모릅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국익을 위하여 일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그들을 견제하면 이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포기한다면 이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한민당이 견제 없이 국정을 농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김구: (정치싸움 등을 되풀이 말한 다음) 더구나 나는 특정 정당의 비방질 때문에 반미주의자로 색칠 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들의 협력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유어만: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이승만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악평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갈 사람들입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게 소환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 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김구: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승인하는 첫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유어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러리라 확신합니다.
       ▶김구: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유어만: 불가능합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지지하니까요.

       ▶김구: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회의에 참석한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직접 알아보려는 것이었소. 
    북한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하고, 그 사이 남한이 무슨 노력을 해본다 하더라도 북한군의 현재 수준에 필적할 군대를 육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필자주:북한군)을 남진(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유어만: 소련이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요,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지요.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에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소련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주권국가가 될 것이고, 남북통일을 성취할 기지(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을 약하게 보실수록 조건 없이 여기에 투신하셔야 합니다. (이상 대화 끝)
  • 김구와 유어만 중국대표의 대화록. 유어만이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하고 이승만에게도 보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김구와 유어만 중국대표의 대화록. 유어만이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하고 이승만에게도 보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김구는 소련과 북한의 남침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나?...모순점과 의구심

    유어만과 김구의 대화기록을 읽어보면 김구의 발언에 문득문득 놀라게 되고, 김구의 행동에 대한 모순점과 의구심이 더욱 깊어진다.
    첫째,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는데, 최측근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일‘이란 무엇인가.
    둘째, 미국이 정책을 바꿔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던가.
    셋째, 결정적 대목은 이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시키는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정부를 수립하여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언, 김구가 임정을 의탁했던 장개석정부의 외교관 앞에서 토해낸 공언이다. 
    단시간에 인민공화국정부 수립이라니? 과연 김구는 ‘소련+북한 남침’에 대한 무슨 확증을 갖고 있기에 이런 단정적 말을 하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그렇다면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함께 서명 발표하고 서울에 와서도 큰 성과처럼 과시한  ‘4·30 남북공동성명서’ 가운데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없다'는 대목을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착각인가? 아니면 말 못할 속임수라도 있단 말인가? 
    즉, 김구는 머지않아 소련과 북한이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미군 철수에 동조하고 스스로 철군을 거듭 요구하였다는 의구심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공산군 남침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 미군의 장기 주둔임을 여러번 공개 주장, 철수 반대를 천명해 왔다.
    그런데 김구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김일성과 함께 요구한 것이 될 뿐더러. 소련의 남북한 적화통일 전략에 결과적으로 협력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협력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말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어만이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들이대는 데도 이를 곧장 부정하지 않고 “모든 걸 머지않아 밝히겠다”며 즉답을 피해간다. 
    이해부득 말 돌리기에 의심은 꼬리를 물지만 김구 자신의 정직한 해명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바로 1년 뒤 여름, 김구의 ‘좌우합작 친북활동’과 ‘모종의 음모’에 대하여 격분한 청년장교 안두희가 번민을 거듭하던 끝에 김구를 경교장 집무실에서 대낮에 ‘총살’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김구가 그렇게 단둘이 만날 정도로 가까이 하던 한독당 비밀당원이었다. (안두희의 옥중고백록 [시역의 고민: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타임라인, 2021)

  • ◆ 김구, 유엔에 ‘정부승인 반대’ 사절단 파견 준비...이승만 “망녕이다”

    두 김씨가 파리 유엔총회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를 공식화한 것은 6월15일 경교장에서였다.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의 제5차 연석회의는 통일독립운동의 강화, 남북정치회의 소집, 그리고 유엔총회에 대표단 파견 등을 내걸고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보름전에 개원하 국회의 사상최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로 수립될 정부가 ‘부당한 정부’이므로 이를 유엔이 승인하는 절차를 사전에 저지하자는 것이다. 두 김씨의 ‘건국 반대’ 투쟁은 이제 총선거 보이콧에서 ‘신생 정부 전복운동’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었다.
    이것이 두 김씨의 주장대로 순수한 통일열망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북한 총독’ 슈티코프의 지시에 의한 김일성-성시백의 공작 결과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놀랍게도 헌법이 공포(7.17)되기 한달 전, 정부가 수립되기 2개월 전에 벌인 일이다.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반대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한 그들이 유엔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것은 망녕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부터의 유엔 대표는 우리 정부에서 선출한 대표만이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어떠한 위대한 인물이나 어떠한 큰 단체라도 우리 대한민국의 대표는 될 수 없는 것이다.”([동아일보] 1948.7.13)
    그리하여 이승만은 건국헌법을 공포하자마자 서둘러 사흘뒤 7월20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24일 취임식과 동시에 건국내각 구성을 위해 밤잠을 설친다. 9월 유엔총회에서 세상없어도 ‘국가승인’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