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앙청 의사당에서 개원한 제헌의회, 이승만은 맨처음 순서로 북한출신 목사 이윤영 의원을 불러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 중앙청 의사당에서 개원한 제헌의회, 이승만은 맨처음 순서로 북한출신 목사 이윤영 의원을 불러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하나님께 감사” 이승만, 개원식에 식순 없는 기도부터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8년 5월31일 오전 10시, 중앙청에 마련된 국회의사당에 국회의원 198명이 모여 제헌국회를 개원하는 시간, 시내 거리에선 ‘건국국회 개원 축하’ 행진이 벌어지고 있었다. 
    회색두루마기를 입은 이승만은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이 되어 단상에 오르자마자 뜻밖에 ‘하나님 감사’로 입을 여니 국회의원들도 방청객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李允榮)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식순에도 없는 행사 첫 순서 기도, 참석자들은 좌파까지도 홀린 듯 모두 일어서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제헌국회 속기록](1) 제1회 제1호, 1948.5.31)

    단상에서 기도하는 평양 목사 이윤영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렸다. 간단하게 해달라는 이승만의 부탁도 잊은 듯 눈물 섞인 기도는 길어졌다. 북한에서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만들어 독립을 준비하다가 소련의 만행에 쫓겨 월남한 그는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종로 터줏대감 김성수를 설득 양보를 받아 ‘정치1번지 종로’에 이윤영을 출마시켜 국회의 상징적 ‘북한대표’격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이윤영을 특별히 지목하여 ‘개원 감사기도’를 시킨 까닭이다.
    25세때 한성감옥에서 ‘성령’을 받아 거듭난 이승만은 73세 이날까지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수행하며 기도로 끝내는 신앙 깊은 현대적 선지자, 반세기의 독립운동 끝에 세워지는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어찌 기도로 시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워주는 나라가 아니랴.

  • ▲ 건국헌법 공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 7월18일자.ⓒ조선DB
    ▲ 건국헌법 공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 7월18일자.ⓒ조선DB
    ★이승만, 대한민국 탄생 선언...1919년 서울서 수립된 임시정부 ‘한성정부’ 법통을 중시

    의장단 선거에서 198명중 188표를 얻어 의장이 된 이승만은 부의장 신익회-김동원과 함께 오후 2시반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 참석한다. 하지 등 미군정 수뇌들과 장성들, 각국 외교관과 유엔 위원단, 국회의원 전원과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가득 모인 식장에 궁중 아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승만은 단상에 올랐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 대한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인연하여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 못되었으나, 우리 애국남녀가 해내 해외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의 민국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입니다” ([조선일보]1948.6.1)

    여기 말하는 ‘기미년 민국정부’가 바로 ‘한성정부’로 별칭 되는 임시정부이다. 한성YMCA 총무였던 이상재를 비롯, 미국 박사로 돌아온 이승만이 전국에 조직했던 기독교 청년세력(YMCA)이 주동한 한성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로 세웠고, 그 절차도 이승만에게서 배운 대로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에 따라 전국13개 도대표들이 ‘국민대회’ 형식까지 갖췄던 것이다. 
    이 통지를 받은 이승만은 즉시 미국 정부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통고하고 일본 천황에겐 “새 정부가 생겼으니 일본은 즉시 철수하라”는 영문편지도 보냈다. 이때 이승만이 ‘집정관총재’를 ‘President of Korea’란 영어명칭으로 처음 사용한다. 

    이어서 그해 1919년 9월 3개지역 임시정부를 통합할 때,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헌법과 조직등 법통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안창호등 상하이 ‘4월임정파’는 이를 수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한성정부의 부활”이며 “법통계승‘이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며, 이는 임정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으로서 남북한 전체의 민족적 대표성과 국가적 정통성-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목적이었다. 그것은 북한 공산정권이나 이에 협력하려는 김구-김규식에 대한 견제구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일부에서 ’임정 건국설‘의 근거로 삼는 이승만의 ’기미 연호‘ 기산도 초대대통령 취임사 말미에 한번 쓴 뒤로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임정 법통문제는 어디까지나 독립정신-국가정신의 정신적 계승일 뿐, 국제적 실정법상 국가적 제도적 계승이 아님을 국제법 박사 이승만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이승만의 개원식 식사는 마치 대통령의 취임사 같았다.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해 한 맺힌 듯, ”이북 5도 동포가 참석치 못한 것을 극히 통분히 여긴다“면서 ”또 다시 맹세하는 바는 우리 민족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이요, 우리 강토는 일척일촌(一尺一寸)이라도 남에게 양여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다짐했다.
    이어서 민생을 살리는 경제정책, 토지개혁 실시, 개인의 평등자유를 위한 입법, 교육향상과 공업 발전, 국제외교관계 등 새정부 국가시책을 제시하고, 주요관심사 미군철수 문제에 대하여 국제외교가답게 명쾌한 설명을 해준다.
    ”미주둔군은 우리 국방군이 준비될 때까지 머물러 있기를 우리가 바라는 터이나, 미국과 유엔과 우리 정부 사이에 상당한 협의로 조건을 정해서 진행 될 것이다....미국은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지 영토나 정치상 야심이 없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이요, 오직 민주정부를 세워서 세계 평화와 국제통상과 우호로써 공동 이익이 될 것을 주장할 뿐이다“

    공산당에 대하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이니 개과회심(改過回心)해서 동주병제(同舟並濟:같은 배로 함께 건넘)하게 되면 다 같이 선량한 동포로 대우할 것이요, 우리나라를 남의 나라에 복속시키자는 주의로 살인 방화 파괴를 자행할진대 국법으로 준엄히 처단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을 향해 ”민주정치에서는 민중이 주권자이므로, 주권자가 가만히 있으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면서 ”이제는 노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왕조의 계급독재-백성노예 착취로 놀고 먹는 양반층에 넌더리가 난 이승만의 뼈에 사무친 당부였다.


  • ▲ 건국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국회의장.
    ▲ 건국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국회의장.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계동궁서 탄생한 ’비빔밥 정부‘

    건국작업에 돌입한 제헌국회가 드디어 입법 활동에 들어간다. 헌법, 국회법, 정부조직법 등을 담당할 기초위원 30명을 정당안배로 선정하였다. 
    6월4일부터 시작된 헌법 제정은 한국 민주당(한민당)이 이미 지난 한 달 동안 만들어 놓은 ’유진오안‘을 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이었다. 
    건국 헌법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역시 권력구조 아닌가.  
    대통령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 한민당은 진작부터 ’내각책임제‘로 당론을 정해 두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을 제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구한말부터 미국 일류대학 박사로 국민을 휘어잡고 오랜 망명기간 독립운동을 통하여 임정대통령을 역임, 해방후 미-소의 압력을 물리치며 유엔을 끌어들여 자유총선거를 실시, 대승을 올린 73세 노련한 글로벌 리더 이승만의 마법적 카리스마를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한민당은 당시 거의 유일한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1906~1987)에게 내각제 헌법을 만들도록 서둘렀던 것이다. 요컨대, ’국민적 영웅 이승만‘은 영국이나 일본의 왕처럼 상징적 존재 또는 방패로 모셔두고 실질적 정치권력은 한민당이 장악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승만과는 사전에 한마디 협의도 하지 않았다. 협의 자체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 지지‘를 밝혔는데도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는 것은 결정적 실수였다.
  • ▲ 헌법에 서명후 세계에 대한민국 건국헌법을 선포하는 공포사를 살피는 이승만 국회의장.
    ▲ 헌법에 서명후 세계에 대한민국 건국헌법을 선포하는 공포사를 살피는 이승만 국회의장.
    ★한민당, 내각제 헌법초안 제시...이승만 ”이름만의 대통령 않겠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때부터 미국과 같은 대통령중심제 민주공화국을 당연한 것으로 굳히고 있었다. 그는 1944년 전쟁 말기에 프린스턴 대학교 슬라이(John F, Sly) 박사에게 연락하여,  곧 전쟁이 끝나면 한국에 자신이 건국하게 될 터인데 그때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놓기도 하였던 것이다. (유영익 논문 ’이승만국회의장과 대한민국헌법제정‘ [역사학보]189집, 2006)
    6월7일 국회의장으로서 처음 기자회견을 열었을때 기자들의 질문 역시 권력구조 문제다. 이승만은 그동안 간간이 거론했던 대통령중심제 주장을 제헌에 앞서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영국이나 일본의 제도가 내각책임제라 할 것인데, 영국이나 일본은 군주정체로 뿌리가 깊이 박힌 나라일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 제도를 없앨 수 없는 관계로 군주제도를 유지한다. 우리나라는 군주제 관념도 사라졌고 30여년 전(3.1독립선언)에 민주제도 수립을 공포한 이상, 민주정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그렇게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독재정치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선출한 이상 모든 일은 잘하든지 못하든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지, 안그러면 사리에 맞이 않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두는 내각제 헌법이 통과된다면 나도 이에 추종하게 될 것이다“
    기자들이 대통령 선거를 국회에서 할지 인민들이 할지를 물었다.
    ”지금 또 다시 전국민이 선거하기가 곤란하므로 국회에서 선출하자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일보] 1948.6.8.). 언론들은 ’책임 내각제 불가‘를 크게 보도하였다. 
    ’대통령중심제‘만이 사리에 맞는다며 적극 주장하는 이승만이 ’국회가 내각제 헌법을 만들면 따르겠다‘고 한마디 덧붙인 것이 눈길을 끈다. 헌법기초위원들이 들으라고 구슬리는 화법이다.

    6월15일 이승만 국회의장은 부의장 신익희를 데리고 헌법제정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마침 유진오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해야한다‘고 열심히 발언하고 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승만이 발언을 요청한다. 독립운동가 출신 서상일(徐相日, 1886~1962) 위원장이 발언권을 주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하게 된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책임제로 의결한 모양이나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대통령은 간접선거든 직접선거든 인민이 선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하더라도 인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므로 인민이 직접선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직접 지우는 것이 옳은 일이지, 대통령을 왕처럼 불가침적 존재로 한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은 의장실로 유진오를 불렀다. 작달막한 유진오가 들어서자 반갑게 손을 잡아끌어다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히고 자기는 카펫바닥에 앉았다. 손을 어루만지며 미소로 입을 열었다.
    ”훌륭하오. 우리 한국인 중에 헌법을 기초할 젊은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소“
    이승만은 유진오를 칭찬하면서 덧붙였다. ”이런 유능한 학자가 있을 줄 모르고 나는 프린스턴대학의 슬라이(John F. Sly) 박사에게 헌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두었지요“
    유진오는 73세 거물 독립운동가의 황송한 응대에 황홀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중심제로 헌법 수벙을 요구하기 위한 정치가의 노련한 제스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유진오 [헌법기초 회고록] 일조각, 2008). 
    이어서 이승만은 6월17일 독촉국민회에게 ”국호는 대한민국, 국회는 양원제, 정부구조는 대통령중심제로 된 헌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 작업은 19일쯤 사실상 끝났다. 내각책임제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승만은 회의장에 들어갔다.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이유를 30분이나 설명하고 나서, ”만일 이 초안이 이대로 국회에서 채택된다면 나는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으로 남아서 국민운동이나 하겠소“ 단호한 어조로 선언하고 나와버렸다.
    기초위원들은 이승만을 설득하기로 했다. 허정, 유진오, 윤길중 등을 이화장으로 보냈다. 이승만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자 즉시 이승만은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불렀다.
    ”나는 이름만의 대통령을 할 생각은 없소“ 폭탄선언이다. 
    김성수는 이승만의 강경한 태도에 놀라 이런저런 말을 이어갔다.
    ”한민당이 꼭 그렇게 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시오“
    이승만은 노기 띤 얼굴로 벌떡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1976)
  • ▲ 내각책임제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왼쪽부터)와 그의 회고록 [헌법기초회고록) 표지. 내각제 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수정한 김준연.
    ▲ 내각책임제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왼쪽부터)와 그의 회고록 [헌법기초회고록) 표지. 내각제 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수정한 김준연.
    ★놀란 한민당, 깊은 밤 계동궁서 ’헌법 수정‘ 30분

    숨 가쁜 21일 그날 밤, ’계동궁‘(桂洞宮)으로 불리는 김성수의 계동 저택에 한민당 간부들과 한민당 소속 헌법기초위원들이 다 모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만을 더 설득해 보자는 말은 설득력을 잃었다. 
    해방후 김구를 지지하다가 실망하여 이승만을 적극 협력했던 한민당, 이제 와서 이승만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집권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상황이다. 어떻게 하든지 국민의 영웅 이승만을 앞세워 권력을 잡아놓고 나서 실권을 강구해야할 궁지에 몰렸다. 그렇다고 100조가 넘는 방대한 헌법을 처음부터 뜯어고칠 수도 힘들거니와 그럴 시간도 없다. 난감한 마당에 한숨과 침묵만 흐른다. 
    ”이거 보시오. 그리 어렵지 않으니 내가 30분 내로 고쳐놓겠소“ 
    침묵을 깬 사람은 김준연(金俊淵,1895~1971)이었다. (김준연 [나의 길] 홍우출판사, 1966)
    머리 좋기로 소문난 그는 동경제대와 베를린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고, 한때 조선공산당(ML당)사건으로 옥고도 치루고,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당대의 지식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말 그대로 30여분쯤 헌법을 뒤지며 연필로 지우고 덧붙이더니 김성수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손질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김성수는 유진오를 불러오라 재촉한다. 
    밤중에 달려온 유진오는 김준연이 급히 수정한 조항들을 살핀다.
    ”어때요? 앞뒤 연락은 되지요?“ 김준연이 물었다.
    “네, 연락은 됩니다만...” 유진오는 뭔가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셨다.
    “이대로 가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빔밥 정부‘ 꼴이 될 것입니다” 
    유진오는 대꾸도 없는 좌중을 훑어보며 자리를 떴다. (유진오, 앞의 책)
  • ▲ 헌법 공포식을 마친 제헌의원 전원이 중앙청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
    ▲ 헌법 공포식을 마친 제헌의원 전원이 중앙청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
    ◆이승만, 제헌작업 재촉...9월 유엔총회서 ’국가승인‘ 받아야

    이승만은 서둘렀다.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반드시 ’국가 승인‘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헌법 제정은 7월에 마쳐야 하고, 정부구성도 8월이 되기 전에 끝내야한다. 건국선포식을 8월15로 예정했기에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

    6월 22일 이승만의 결단으로 대통령중심제 헌법 초안이 나왔다. 유진오가 지적한 ’비빔밥‘ 헌법이다.
    내각책임제 조항에서 국회의 내각 불신임권을 삭제하였고, 대통령 권한 중에 ’국회해산권‘을 지웠다. 대통령의 전횡을 막기 위한 것이다. 임기도 원안의 5년에서 4년으로 단축시켰다. 
    이 초안은 다음날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제1독회부터 시작되었다. 헌법기초위원장이 서상일이 나서서 헌법을 설명하며 이런 발언을 했다.
    “헌법의 정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들이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구성해서 우리 3천만은 물론이요, 자손만대로 민족사회주의 국가를 이루자는 그 정신의 골자가 이 헌법에 총집(總集)되어 있습니다” 
    민족사회주의?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민족사회주의 헌법‘이라고 설명하는 중진 의원, 이것이 당시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식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건국 헌법의 ’비빔밥‘은 대통령제+내각제의 권력구조 만이 아니라 곳곳에 섞여있었다. 특히 경제조항들은 국민의 ’경제적 자유를 허용’한다면서도 사회주의-공산주의식 규제들로 줄줄이 묶어놓은 것들이었다.

    ★ ‘비빔밥’ 경제 조항들---사회주의-공산주의식 국가 통제경제

    건국 헌법의 경제질서 부문을 조금만 살펴보자.
    제5조에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 하였고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제15조)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등은 국유‘로 경영해야 하며, 통신, 금융,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며 대외무역은 국가통제하에 둔다’고 규정했다. (제85조, 87조).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제88조).
     
    이처럼 당시 헌법 입안자들은 자본주의적 자유경제를 지향한다면서도 그들의 의식세계는 그야말로 ‘비빔밥’식 혼돈을 맴돌았다. 조선왕조시대 ‘돈을 천시’하던 선비사상의 잔재, 일본식 군국주의 통제 경제, 공산주의식 반자본주의 계급독재 및 사회주의 계획경제 등등 제헌의원들의 사고체계 자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대공황이후 대세였던 케인즈의 혼합경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등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시대, 일본교육을 받은 젊은 법률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 작업’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요컨대, 정치분야는 미국 헌법을, 경제 분야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따른 작품이 나왔던 것이다. (이영훈 [한국경제사-Ⅱ] 일조각, 2016)

    대표적인 사회주의적 사례가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이익균점권’ 보장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서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분배에 규점할 권리가 있다」(제18조)는 것인데, 이는 헌법 초안에도 없던 것을 심의 과정에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한 긴급제안”이란 즉흥적 발의가 나오자 찬성이 쏟아져  전문적 검토도 없이 채택, 삽입하는 형편이었다.
    일부에서 "통제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문제제기에 대하여 광복군사령관 출신 이청천(李靑天) 의원이 다음과 같이 반격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평등을 위하여 잘 살고 고르게 살자는 기본이념이기 때문에, 전체주의하는 공산주의체제나 무제한 자본주의를 취하지 않고, 국가권력으로 무제한 민족주의로 나가야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민족사회주의입니다”
    민족사회주의를 반복하듯 동조하는 의원들은 또 있었다. 사상이나 이념의 미성숙 미분화 단계랄까.
    한마디로 건국헌법 경제체제는 혼합경제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이익균점권 주장의 배경에는 다른 계산이 숨어있엇다.
    바로 ‘적산’(敵産)으로 부른 일본의 재산 처리 문제, 즉 일본인이 남기고 간 기업들이나 각종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인계받아 이를 ‘귀속재산'(vested property)으로 묶어 불하-매각할 때에 '나눠먹기'하겠다는 정치적 로비가 뻔히 드러나고 있었다. 여기엔 좌우가 없었으므로 의원들의 발언권이 줄을 이어 시간만 흘러갔다.
    뒷날 이승만은 '국유화하자'는 민족사회주의식 주장을 뿌리치고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대소 기업에 공평하게 불하한다. 기독교 신앙인 이승만에게 '부패'나 '유착'이란 사탄의 죄악 그것이다. 그토록 청렴한 대통령이 그때 거기 있었기에 그것이 국민국가 국민경제를 키우는 토대가 되었고 박정희 산업혁명의 기둥이 된 것이었다.
  • ▲ 1948년 7월17일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헌법공포식.
    ▲ 1948년 7월17일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헌법공포식.
    ◆’국방군‘을 ’국군‘으로 개칭...역사적 헌법 공포식

    발언경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헌법심의를 보다 못한 이승만이 칼을 빼어 들었다.
    “이익균점권 문제는 이렇게 합시다. ‘지주와 자본가와 근로자는 공동한 평균이익을 국법으로 보호한다’고 만들어 놓으면 원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것을 헌법에 다 넣을 수 없으므로 이 다음에 법률을 정할 적에 반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헌법이 백년 만년 고치지 못하는 게 아니므로 시기 변동대로 고치자고 다수결로 정하면 고칠수 있는 것이니, 여기에선 대강만 명시하여 공포하고, 하루 바삐 우리 정부를 수립합시다. 8월15일이 며칠 안남았습니다.” 
    표결결과 ‘경영참여+이익균점권 보장’안은 부결되고 ‘이익균점권’만 반영되었다. 그것도 1962년 박정희가 개헌할 때 삭제되고 만다. 

    이승만은 헌법의 축조심의가 지지부진하자 조속한 통과를 협박조로 재촉하였다.
    “몇몇 분자들이 장난을 해가지고 국회의 국사를 방해한다면 용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송장(시체)들이 아닙니다....정신 차리시오. 몇 사람들이 쑤근쑤근 헌법통과를 하루라도 제체하자는 태도가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서 조치하는 방법이 있으니 생각들 하시오”    ([제헌국회 속기록(1)] 1948.7.5.~12)

    몸살까지 앓던 이승만은 7월5일부터 직접 의장석에서 사회봉을 들고 두드리며 정리해나갔다.
    유엔총회를 앞둔 준비기간이 촉박하므로 근본적인 수정은 엄두도 안 난다.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제 그대로 통과시키고 직접선거는 뒤로 미루었다.
    청년시절부터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통상-시장경제를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써놓았고 독립운동 내내 직접 기업운영까지 해본 이승만은 터무니없는 ‘전제주의식 통제경제’를 담은 경제조항들도 좌익세력이 설치는 국회에서 당장 개폐하기란 세월만 허송할 뿐이므로 통과시켰다.
    7월12일 제3독회를 열어 자구수정작업에 착수, ‘국방국’을 ‘국군’으로 바꾸는 정도로 끝내고, 이어 정부조직법 심의도 사흘 만에 마친다.

    ★헌법공포식=마침내 7월17일 오전 10시, 중앙청 제헌국회 의사당에서 건국헌법 공포식이 열렸다. 이승만 의장은 두권의 헌법정본(국한문본+한글본)에 서명한다. 붓에 먹물을 찍어 이름을 쓴 이 헌법은 전문10장 102조로서, 5천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공화체제의 국권과 국민주권과 영토를 정한 대한민국 건국장전(建國章典), 한민족사의 국보이다. 
    서명한 헌법을 감개어린 듯 잠시 만져본 이승만은 그의 떨리는 목소리로 공포사를 읽었다.
    “3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3독회로 정식 통과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이승만은 국회의장 자격으로 이 간단한 예식으로 서명하고,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합니다.” ([조선일보] 1948년 7월18일자)

    드디어 나라를 세웠다. 헌법공포가 사실상 건국이므로 대한민국 건국선언도 하였다. 
    부패무능한 황제 고종과 싸우고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과 싸우고,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스탈린과 싸워서 세운 나라, 삼천리 강산 북쪽을 소련이 식민지로 만들었으니 남한만이라도 자유기지를 만들어 자유세계의 힘을 빌어 소련을 몰아내자는 ‘정읍선언’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공산당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일성과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고집하는 김구-김규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세기 투옥과 망명과 말과 글로써 자유세계를 포섭한 독립운동 끝에 73세 이승만은 기어코 나라를 세우고야 말았다. 
    너무 늙었다고? 아니 이제부터 할 일이 지난 세월투쟁보다 몇 곱절 지난한 사명이거늘! 이승만은 기도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던 꿈의 ‘자유국민국가’를 이루었으니 이제 또 기도하고 기도하며 나라답게 국민답게 만들어가야 한다. 
    “이 일은 나 이승만 말고 어느 누가 해낼 수 있으랴! 김성수도 아니고 김구는 더더욱 아니지 않는가” 부족한대로 허겁지겁 서둘러 세운 나라를 정녕 올바르고 튼튼하게 다시 세우는 Nation-Building! 그것은 진정 ‘제2의 건국’을 하지않으면 안될 황무지였기에 또 다시 이승만은 기도한다. 

    참조/건국 초기 개헌 파동
    유진오가 말한 ‘비빔밥’ 헌법은 공포 한달도 안돼 ‘개헌의 그물’에 걸린다.
    ◉한민당의 개헌시도=건국내각에 ‘총리+장관6명’을 달라고 김성수가 요청했다. 이승만은 거부했다. 후회막급 한민당은 즉시 ‘내각책임제 헌법’ 회복을 추진한다. 8월15일 건국선포식 1주일 전이다.
    ◉이승만의 첫 번째 개헌 ‘부산정치파동‘=1952년 제2대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 야당은 공모한다. 6.25전쟁중 미국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할 목적, 야당은 이승만의 권력을 빼앗아야한다. 진작 이를 알고 있던 이승만은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한다.
    ◉이승만의 두 번째 개헌 ’사사오입 파동‘=1953년 8월 가조인한 한미동맹은 곡절 끝에 다음해 1954년 11월 발효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헌법의 ’통제경제‘를 몰아내고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면 개편한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확보, 평생의 목표 ’자유통상 입국‘ 기반조성에 나선다. 이승만이 1960년 하야할 때까지 5년간 가져온 미국 자금은 당시 30억 달러가 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