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도록).
    ▲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도록).
    이승만, '이런 사람 뽑아야" 국민들에 사상최초의  선거 계몽

    5천년 민족사에 최초로 실시하는 ‘국민 자유 총선거’는 3월 초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유엔위원단에 선거관련 건의서를 보낸 이승만은 3월10일 “이번 선거는 공산분자와의 결전”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잃었던 국권과 강토를 회복하여 삼천만이 다 자유로 살자는 목적일 뿐이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은 그들이 타국(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하여 우리 독립목적을 방해하는 까닭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분자들과는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총선거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대다수 민중과 독립을 방해하는 소수 분자 사이에 어떤 편이 승리해야 우리 민족이 복스럽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을까를 저마다 생각해서 가장 공정한 각 개인의 투표로 결정할 것이다.

    민족진영에서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승리할까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오. 
    오직 독립주의와 독립반대주의와,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기회만 엿보는 중간주의, 이 세가지 중에서 어떤 주의가 성공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서 투표해야 할 것이며,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분투할 가장 양심적이고 건설적인 애국인사만을 선택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 담화문 ‘투표자에게 권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3.11. 밑줄은 편집자)

    이승만은 ‘총선거 주의사항’ 15건을 지적, “주의와 사실(fact)로는 다툴지언정 개인이나 단체의 결점을 내세워 피차의 감정싸움을 하는 것은 우리 예의적 위신을 손실함이니 피차 양보하여 포옹해야” 한다고 당부, 인신공격등 ‘허위와 중상모략 싸움’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때 동시에 대한노총, 독촉국민회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14개 청년단체들도 자유분위기 보장과 국민의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일찍부터 50여만명의 청년들을 포용한 이승만의 지도력은 이렇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3월30일 선거인등록과 입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었다. 
    선거권(투표권)은 만21세 이상의 남녀, 피선거권(출마) 나이는 만25세로 정해졌다. 
    남북한 공산당의 ‘총선저지’ 폭력사태를 맞아 미군정은 경찰을 총동원, 특별경계에 돌입하였다. 치안총책 조병옥은 경찰력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지방마다 향보단(鄕保團)을 조직, 남로당의 암살 테러와 투표소 기습에 대응하였고, 서북청년회등 월남 애국청년들도 스스로 공산폭력배 방어에 발벗고 나섰다. 수도경찰 총책 장택상은 야간 통행금지 기간을 10시로 앞당기고 “폭동을 인민항쟁이라는 칭호로 찬미하고 폭동을 조장하는 의미로 문자나 언사로 민중을 현혹케하는 자는 시간을 지체치 않고 고발 처단 하겠다”는 경고문을 발령했다.
  • ▲ 5천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1948년 5.10 총선거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난생처음 투표하는 모습.(자료사진)
    ▲ 5천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1948년 5.10 총선거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난생처음 투표하는 모습.(자료사진)
    ◆이승만, 남북회의 ‘무시’...“총선만이 국권 회복의 길”

    “남북요인회담에 대하여는 나는 기왕에 설명한 바 있으므로 우리의 기정 계획에 조금도 변동이 있을 리 없고, 양군 철퇴문제에 대해서도 소련이 진심으로 공정한 해결을 원한다면 먼저 북한의 공산군을 해체시켜 무장을 회수하고 유엔 감시 하에 자유분위기에서 총선거를 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가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요,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정부를 수립해서 국방군을 조직한 후에야 비로소 협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공동성명’이라는 것을 나는 중요시하지 않는다” ([서울신문] 1948.5.4. 이승만 논평)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서 돌아와 김일성과 서명한 '공동성명'을 설명하고 총선 거부를 발표하자 이승만은 거듭하여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남북협상에 관하여서 이미 수차 말한 바 있으므로 이상 더 말하고 싶지 않고 또 그 필요조차 느끼지 않거니와, 다만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소위 정치요인들이 우리 정부를 수립하여 우리 국권을 회복하려는 금번 총선거를 단정단선이라 하여 민심을 선동시키고 있는데 그 의도가 나변(那邊)에 있는지 이해키 곤란하다. 그러나 우매하지 않은 우리 애국동포는 이러한 모략과 선동에 동요되지 않을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총선거만이 우리 국권을 회복하는 길인 것을 잘 인식하여주기를 다시 강조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9.5.8. 이승만 논평)

    미군정의 남한 과도정부 정무회의도 김구-김규식의 귀환성명을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남조선 일부 정객들은 결국 공산주의 세계제패를 강행하는 소련의 군문에 항복하였고 그 대변인 북조선 공산도배들과 야합, 완전독립을 위한 총선거를 파괴하기는 행동에 나섰다....북조선에는 30만의 무장 공산군을 배경으로 한 공산독재가 양군철퇴 직후 24시간내 전조선에 적색정권을 세울 자신이 만만한 까닭이다....정치적 야망에 불타는 일부 불평부득의 정객들이 공산당의 거짓말과 참말을 섞어 쓰는 기술을 모르는 수작이다. 그들은 공산당의 포로 됨이 분명하다. 진정한 지도자란 민족을 생과 광명의 길로 선도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력을 가진 자이거늘, 과거의 명성과 관록으로만 그 지위를 유지 못한다. 여러분 동포들이어, 정치적 잡음에 흔들리지 말고 5월10일에 닥쳐오는 국운을 좌우할 총선거에 총진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조선일보] 1948.5.8.)
  • ▲ 1948년 제주4.3폭동의 주역 김달삼(당시25세). 오른쪽은 1949년 6월7일 한라산에서 사살된 이덕구,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되었다.
    ▲ 1948년 제주4.3폭동의 주역 김달삼(당시25세). 오른쪽은 1949년 6월7일 한라산에서 사살된 이덕구,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되었다.
    ◆슈티코프 지원, 박헌영 남로당 전국 폭동...제주도는 ‘해방구’

    김구-김규식 두 김씨가 공식적인 ‘총선 보이콧’을 발표함과 동시에, 이번에 평양서 슈티코프가 두 김씨를 앞세워 결성한 ‘남조선 단선반대 투쟁위원회’가 해주(海州) 본부에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박헌영의 남로당은 김일성과의 투쟁경쟁에서 질세라 5월8일 총동원령을 내린다.
    ▶부산=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리고 투표사무소에 들어가 선거위원장을 살해하려다 실패, 선거위원들을 집단 폭행, 선거인명부를 탈취한다. 영도 투표소에 침입, 권총을 난사했으나 실패.
    ▶대구=‘단선반대’ 삐라를 살포하고 30여명이 대구방직공장에 난입, 곤봉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파업을 선동하고 신문사 인쇄공장에 수류탄을 던져 파괴하다.
    ▶전남 광주-목포=관내 전역의 전신주를 뽑아버려 통신 불통, 터널 속 철길을 파괴하여 열차들이 탈선, 문서창고의 선거관계 서류와 투표용지를 탈취하여 불살라버리다.
    무안-함평에서는 경찰의 무기를 강탈, 총격전이 벌어져 4명이 즉사, 20여명이 체포되다.
    ▶대전=기관차끼리 충돌 시켜 전복하고 전선을 모조리 절단하며 밤엔 봉화를 올려 야간 투쟁을 벌이다. 새벽까지 3개 선거사무소에 난입 불을 질러 선거가 지연되다.
    ▶인천=몇개 투표소에 수류탄을 던져 선거위원들이 부상, 송림동 사무소엔 20여명이 난장판을 만들고 휘발유를 뿌려 전소시켰다. 부평 소재 미군 디젤공장에 불을 질러 차고가 전소되다.
    ▶강릉=경찰서 3개 지서를 폭도들이 습격했으나 경찰이 물리치다.

    ▶제주4.3폭동=25세 청년 김달삼(金達三,1923~1950)이 주동한 제주 폭동은 내륙의 폭동과는 그 규모와 참상과 피해에서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내란’이었다. 소련 총독 슈티코프의 자금 지원을 받은 박헌영이 김삼룡(金三龍)에 지령하고 김달삼과 이덕구(李德九,1920~1949) 등이 자행한 남로당 최대의 반란! 여기서는 그 무차별 만행의 ‘선거전후 피해’만 적어본다. 
    ◉사망: 경찰15명, 후보 2명, 공무원11명, 양민107명. 부상자: 경찰 23명, 우익 후보 등 133명. 경찰서 피습 26건, 무기 약탈 12건, 검거인원 8천4백여명이다.
    제주도의 남북2개군은 투표가 불가능하였다. 주동자 남로당 간부 김달삼은 소위 지하선거를 하여 투표지를 가지고 해주로 월북하고, 이덕구가 이어받아 폭동을 확산, 대한민국 건국후 10월에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선전포고’를 발령, 한라산에 사령부를 두고 해주와 평양을 오가며 장기 폭동을 이어간다. 제주도는 그들이 말하는 ‘해방구’였다. 그것은 바로 ‘무장봉기 인민항쟁’을 가장한 북한공산군과 싸우는 ‘남북전쟁’이었고, 6.25남침의 전초전이었다. 한라산 빨치산 투쟁은 휴전 후 1954년에야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전국 선거저지 폭동 피해 최종집계=사망 191명, 부상 643명. 건물 파괴 432건. 방화 224채. 총기도난 131자루. 철도파괴 147건. 통신파괴 1112건. 봉화 877곳. (박찬표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7. 손세일, 앞의 책).
  • ▲ 이승만 자신이 만들어낸 유엔감시 총선거, 이화장의 이승만이 종로구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1948.5.10)
    ▲ 이승만 자신이 만들어낸 유엔감시 총선거, 이화장의 이승만이 종로구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1948.5.10)
    ◆5천년만의 자유민주 선거 '대박'...남녀평등 실현...미국 “한국인 능력 보았다”

    드디어 5월10일, 공산당의 폭력 테러와 싸우면서 대망의 총선거가 전국에서 일제히 완료되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직접투표에 참여하였을까. 이승만을 비롯한 각 정파들과 미군정은 물론, 총선감시에 나선 유엔 한국위원단의 관심도 참여율과 투표율에 총집중되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국회의원 선거위원회의 집계는 총유권자 813만2,517명 가운데 등록유권자 784만817명, 그 중에 748만7,649명이 투표에 참여, 무려 95,5%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서도 투표율 95.2%로 집계, 95%가 넘는 투표율엔 변함이 없었다.
    단군 이래 5천년 왕조의 전제주의 아래서 신음하던 백성들이 역사상 최초로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직접 뽑는 선거에 얼마나 큰 기대와 참여의 기쁨이 컸던가. 산골 벽지와 다도해의 섬들까지 남녀노소들이 스스로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국민 의무’에 뛰쳐나온 것이었다. 난생처음 붓뚜껑으로 지지후보 이름 옆에 O을 찍는 투표의 유효투표율이 96.4%나 되어, 이승만도 하지 사령관도 유엔위원단도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이승만은 귀국 후 3년간 온갖 정치적-이념적-국제적 진통 끝에 회심의 ‘유엔 외교’로 치룬 선거 결과를 보자, 감격 감사하며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금번 총선거에 90% 이상의 호성적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다시 한번 표명한 것이다. 외국 신문기자들이 말하기를 한국 부인들의 투표가 50% 이상이나 된다 하니 한국의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모든 동포가 건국정신으로 이와 같이 열정을 나타낸 것은 깊이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이승만 담화 [경향신문] 1948.5.13.)
    낙선자들에게 당선자를 지지 후원하라고 당부한 이승만은 당선자들에게는 “민의를 위반하고 횡주(橫走:멋대로 날뜀)하지 말라”며 국가 건설에 희생정신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다짐을 두었다.
    “일반 동포는 자신들이 세운 국회에서 무슨 문제가 결정되면 절대 불가침의 국법이 되는 것이니 사사로운 이해를 초월해서 지지해야 한다”는 국민계몽도 잊지 않았다.

    하지 사령관도 “모든 남녀가 공산분자의 무서운 협박과 폭행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용감하게 투표장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며 “미증유의 민주주의 승리”라고 찬사를 보낸다..
    미국무장관 마셜도 기자회견에서 “소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적 선거방해에도 불구, 90%가 넘는 투표율은 한국인들의 자주적 민주정부 구성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성명을 냈다.

    이승만의 ‘선거 혁명’ 5·10 총선거는 남녀평등론자 이승만이 출발부터 여성에게 완벽한 참정권을 보장한 세계신기록이다. 유럽의 선진국 스위스조차 1971년에, 아랍부국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서야 여성 참정권을 일부 허용하지 않았는가. 

    ★이승만, 무투표 당선=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다른 후보가 등록을 안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등록하려다가 못한 사람은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내다가 부장 조병옥과 갈등 끝에 파면당한 최능진(崔能鎭)이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에 참여했던 그는 이승만의 국회진출을 막기 위해 김구가 출마해야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이 입후보하려고 막판에 등록했다고 한다. (송남헌 [해방30년사-1] 성문각, 1976). 그러나 그의 등록은 취소되었다.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인 200명도 못 채워 명의를 도용하고 인장을 위조한 2중 추천명단들이 발견되어 선거관리위원회가 등록을 무효화 시킨 것이었다.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현음사, 2001). 이승만 말고도 무투표 당선된 후보는 전국에서 12명이 나왔다.

    ★국회 의석 분포=북한지역 의석 100석을 남겨두고 남한전역 200석 가운데 제주4.3폭동으로 투표를 못한 2석을 제외한 198석의 의원이 당선 확정되었다. 
    이들의 세력분포는 무소속 85명, 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등 순이다. 기타 대한노동총연맹 등 11개 단체가 각 1명씩이었다. 
    무소속이 가장 많은 이유는 ‘선거를 거부한 김구’의 한독당원들이 무소속으로 많이 출마하였고 중간파들이 합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85명중 30명 선이고 나머지는 한민당과 노선이 같은 의원들‘임이 판명되었다. ([동아일보] 선거분석. 1948.5.20. 손세일, 앞의 책).
    따라서 참패한 것으로 드러난 29명의 한민당 의석은 곧 크게 불어나 70석을 넘게 된다.

    이승만의 지지 세력은 어떤가. 
    이승만의 직계 독촉국민회 55석, 독촉농민총연맹 2석 및 독촉노동총연맹 1석 등 총 58석이다. 여기에 무소속에서 재입당한 당선자들과 이승만의 남한 단독선거 노선을 지지지 협력해 온 한민당 계열,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12석 및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6석까지 합치면 친이승만 세력은 총 150석 내외로 어림되었다. 즉 198석의 75% 선이다.
    그러나 정치는 숫자만으로 계산되지 않는 권력의 동물, 그 정체가 제헌국회에서 드러난다.
  • ▲ 김구와 김규식(오른쪽)이 1946년 2월 민주의원 설립식에 참여한 모습. 가운데 미군정장관 아놀드.
    ▲ 김구와 김규식(오른쪽)이 1946년 2월 민주의원 설립식에 참여한 모습. 가운데 미군정장관 아놀드.
    ◆선거 거부한 김구 “모든 문제는 ’남북 정치회의‘가 결정해야”

    총선거를 “한국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전진”으로 평가한 유엔위원단은 다시 서울에 모여 두 김씨를 초청하여 만난다. 남북회의와 앞으로의 행보를 알기 위해서다. ’공보‘60호로 발표한 대화내용을 요약한다.
    ◉김구의 답변=“남북공동성명서의 내용은 꼭 실행할 것을 북한당국자가 약속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미-소 양군의 철수후 치안문제는 남북이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다짐 하였으니 일단 현상유지 될 것이오, 내전은 없다고 명문화 하였고, 북한이 통과시킨 인민공화국 헌법은 장래 통일정부를 위한 초안이라 즉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장래 남북회의 등 모든 문제는 전국(남북한) 정치회의에서 최종결정을 내릴 것이다.”
    ◉김규식의 답변=중국대표 유어만(劉馭萬)이 미군 철퇴후 북조선이 남조선에 쳐들어오지 안겠느냐고 묻자, 김규식은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언약이 김일성 장군으로부터 제안되었고 우리가 정중히 서명한 만큼 불신임하지 않는다.”

    ★북한, 남한에 송전 중단...전국이 한때 암흑세계

    김구와 김규식 두 김씨가 유엔위원단에게 “남북약속과 김일성을 불신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5월14일 그날 그 시간에,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명령에 따라 대남송전(對南送電) 스위치를 모두 꺼버린다. 평양에서 김구에게 송전계속을 다짐한지 불과 9일만이다.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역은 암흑세계로 변하고 모든 공장들이 멈춰 서고 말았다. 미군정은 부산항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발전선들을 풀가동하며 응급대책에 나섰다.

    ★김구의 은퇴설=총선 열풍에 남북협상파는 한풀 꺾이고 이미 항간에는 ’김구 은퇴설‘이 파다하게 퍼져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결코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던 그들은 '95.5%' 민의 앞에 꼬리를 감출 수 밖에 없었다. 
    김구는 “나는 혁명자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투쟁할 뿐”이라며 은퇴설을 애써 부정하였다.  그리고 5월19일엔 경교장에서 한독당 상임위를 열어 "개인자격으로 선거에 출마했거나 당선된 자들에 대하여 제명처분"을 내렸다.
    5월29일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이승만과의 합작”을 묻는 질문에 마침내 “전면 거부”를 선언한다. “그 분의 말과 같이 피차에 방향을 고치기 전에는 합작은 불가능할 것이다.”([조선일보]1948.5.30)
    철석 같은 약속을 식기도 전에 헌신짝처럼 금방 던져버리는 소련과 김일성의 일방적 횡포를 당하면서도 김구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북한 공산당과의 합작에 매달리는 것일까. 
    그 한 달 전 4월 중국 남경에서 귀국한 김구의 측근이자 동지인 남파 박찬익(南坡 朴贊翊)이 김구에게 토로한 기록을 보자.
    “공산당은 믿을 수가 없는데 백범은 통일을 위해 이념을 배제해야 한다고 고집하다니....중국의 국공합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산당이란 제스처만 할뿐 타협할 수 없는 인종들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공산당과의 협상을 추진한 것은 백범의 실수요. 국민들에게 통일 환상만 불러오고 용공분자들의 활동 토대만 만들어주었으니, 당장 국민 앞에 사과하고 은퇴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박찬익전기간행위원회 [남파 박찬익 전기] 을유문화사, 1989. 손세일, 앞의 책)

    그런데도 김구는 제 발로 걸어들어간 함정에 너무 깊이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김구를 앞세운 남한 총선거 저지작전에 실패한 슈티코프와 김일성, 남조선담당 공작총책 성시백은 이제부터 새로 수립되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서 ’김구라는 무기‘가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이리라.

  • ◆이승만, 국정 구상 밝히고 정당들의 ’단결 서약서‘ 받기 운동

    미국 상하의원들을 비롯한 각계의 축전과 하와이 동포들의 축하와 선물이 이화장에 날아든다. 이승만은 5월20일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로 ’중앙정부수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행동통일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당사회단체의 ’서약서‘를 받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 '서약서'는 이승만이 미국-유럽에서처럼 '충성서약'을 의무화하는 문화를 한국에도 심으려는 시도로 보였다. 
    「이번 국회는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여 국가 주권의 즉시 회복, 독립정부의 조속 조직, 민생경제의 긴급시책 등에 그 사명이 있음에 비추어 본위원회 구성원 각 정당사회단체 소속 국회의원들은 국회에서 이승만 박사 통제하에 행동을 통일할 것을 결의함」 ([조선일보]1948.5.25.)

    26일엔 이화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국정부 수립과 주요정책에 대한 구상을 밝힌다.
    ▶정부수립은 국회의원들이 허심탄회로 일치단결하여 노력한다면 빠를 것이오, 과도입법의원과 같은 방식이면 늦어질 것이다.
    ▶민생문제가 시급하다. 곧 이어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국방군을 조직할 것.
    ▶미군은 우리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국방군을 조직해야 하고, 서북군(북한군) 침공의 우려가 해소될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남북 통일문제는 국제정세에 의해서 좌우될 문제이다.
    ▶남북협상이라 하는 것도 새 정부(대한민국) 대표가 해야 할 문제.
    ▶정부형태는 곧 국회가 작성하는 헌법에 정해질 것이지만 나는 대통령 책임제를 채택한다.
    ▶김구, 김규식 양씨와 합작에 노력해왔다. 나는 쓰러진 부분을 먼저 세워놓고 다음에 쓰러진 부분도 살려야 된다는 것이 본래부터의 주장이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과 어떻게 합작이 가능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양씨가 뜻을 고친다면 서로 노력할 수 있다. 한군데로 방향을 고쳐야만 될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관과 국정 구상은 단호하고 확고했다. 
    국제사회의 힘으로 소련을 물리쳐 남북통일을 하겠다는 ’정읍선언‘을 유엔에 올려 결의안으로 채택하게 만들고 유엔의 힘을 빌은 총선거를 통해 ’반공-자유 혁명‘에 성공을 거둔 이승만은 더욱 자신감을 얻은 듯, 이제 제헌국회 개회와 건국헌법 제정에 돌입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