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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김구, 김규식 3거두는 남한단독선거 문제로 하지 사령관 앞에서 갈라진다.
’지도자‘라고 다 같은 지도자일까.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면서 공산당의 정체도 모르고 이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 위치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들은 스탈린이 이용할 먹잇감이 되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일찍이 공산주의 정체를 갈파하여 스탈린과 20년 넘게 싸워 온 이승만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을까. 그들의 대화내용을 들어보자.
★이승만, “당신들은 염려 말라. 나 혼자서 역사에 책임 지겠다”
메논이 유엔에서 연설하기 전날 밤, 2월19일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경무대 관저로 초청했다. 그는 한국지도자 3거두가 유엔소총회에 ’단합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한 시간이나 설득조로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놀랍게도 딴청을 피웠다. 불과 열흘 전 이승만과 남한선거에 대하여 ’합의‘했던 일을 잊은 듯 말을 바꾸는 것이었다. 두 김씨는 남북지도자회의를 성사시키기까지는 선거를 미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게 아닌가.
김규식은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 노력도 해보지 않고 남한선거를 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분단을 영구화시킨 반역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이 “그럼 당신의 해결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규식은 엉뚱하게도 “남한 선거로 수립되는 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 또 미국이 그 정부에 원조를 해줄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선거에 뛰어들 수는 없다”고 버티는 결의를 보였다.
이승만은 격분했다.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는 것도 그 이유도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시오, 우사(尤史:김규식 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외국에게 우리를 얼마나 도와주겠는가 물을 수 있겠소? 유엔이 승인해준다는 답을 먼저 들어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말이요? 우리가 힘을 합해 정부를 세우고 나서 승인을 요구해도 승인을 해줄지 말지인데 그것도 당신은 모른단 말이잖소?
당신들이 염려할 필요 없소. 나 혼자서 역사에 책임을 질것이고, 아무도 당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오.”
이승만은 벌떡 일어섰다. 하지를 향해 속사포를 날렸다.
“나는 이 두 양반, 특히 김구씨에게 선거에 참여하자고 온갖 수단으로 설득해왔지만 실패했소이다. 장군의 영향력은 성공할지 모릅니다. 이 두 양반을 장군에게 맡깁니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났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두 김씨의 표변한 대화법의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사흘 전 2월16일 그들이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써서 북한 공작원을 통해 보낸 뒤, 그 회답을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이승만도 누구도 아직은 아무도 알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김두봉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는 다분히 옛정을 그리는 감상적 문투였다고 한다. (손세일, 앞의 책).
“인형이여,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弟)는 인형이 보고싶을 때마다 때묻은 보따리를 헤치고 일찍이 중경(重慶)에서 받았던 혜찰(편지)을 재삼 읽고 있습니다”로 시작, 남북지도자회의를 열어 남북통일문제를 논의하자고 호소한 편지는 결론을 이렇게 장식한다.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우사 형과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를 주장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호응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백범김구전집-8] 대한매일신보사, 1999).
김구 연구에 헌신한 손세일은 이 편지가 엿새 전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서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그 ’38선 베개‘ 성명서는 앞서 밝혔듯이 북한공작원 성시백이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번 편지 작성자도 ’비슷한 인물‘이 아닐까. 김구의 입이자 손발인 엄항섭은 성시백과 계속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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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오른쪽)은 유엔서 돌아와 김구를 방문, 총선거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김구는 거부하였다.
◆두 김씨, 선거 거부 발표...이승만은 ’건국 스케줄‘ 발표
유엔소총회가 2월26일 ’남한단독선거‘ 결의안을 확정하자 이승만은 즉각 환영하고 나섰다.
“유엔이 한국총선거에 대하여 31대 2표로 가결한 것은 유엔대포단의 노력과 미국무성의 정당한 주장으로 우리의 기대한 바를 달성하게 되었다....지금은 유엔의 협조와 미국의 후원으로 모든 장애가 해소되고 우리 앞길이 순조로이 열리게 되어, 이제부터는 우리 전 민족이 주저말고 일심합력하여 모범적 선거를 진행해서 국권을 확립하고 조국통일책을 여러 우방의 협조로 속히 해결되기 바란다.”([경향신문] 1948.2.28.)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정반대로 말한다.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조국 통일과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분투하겠다.(김구 [경향신문] 1948.2.28.)
”나는 통일선거라 해도 참여하지 않겠고 앞으로는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 하겠다“(김규식 [경향신문]1948.2.28.).
★두 김씨, 3.1절 기념식도 따로...미군정, 선거일 5월10일 확정
서울운동장에서 3.1절을 맞아 10여만 군중이 모여 경축행사가 벌어졌다. 3.1독립선언 기념식에 이어 유엔의 중앙정부수립 결정에 대한 축하 국민대회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선거일정을 비롯, 정부수립과 국방군 창설, 유엔 가입에 이르기까지 건국 스케줄을 발표하여 군중의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반면, 김구와 김규식은 경교장에서 해방우 처음 이승만과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김구는 이대로는 통일할 수 없으므로 남조선선거에 응하지 않겠다며 ”이승만과 더 이상 행동을 같이할 수 없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서울신문] 1948.3.3)
하지 미군사령관은 이날 총선거 날짜를 5월9일로 발표하였고, 이를 계기로 38선을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이 갑자기 늘어나 하루 1,000명에 유박하였다.([동아일보] 1948.3.4.)
유엔위원단은 3월12일 전체회의에서 선거일을 5월10일로 변경한다. 9일은 일요일이므로 기독교계에서 반발했기 때문이다.
메논 의장과 후스쩌 사무총장은 경교장을 방문, 김구에게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조선일보] 1948.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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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소총회의 남한선거 결의후 김구가 '선거 불응'을 발표한 기사(조선일보 1948.3.1일자). 오른쪽 지면은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기사.
★김구, 장덕수암살 재판 연속 소환에 위기감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구는 3월12일과 15일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다.
소환장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미 군정이 김구의 소환거부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김구는 이 사건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전면 부인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나에게 이렇듯 죄인 취급을 하는데는 나로서 말할 것이 없소. 죄인이라면 기소하고 증인이라면 할 말이 없으니 가겠소“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김구를 변호인쪽에서 말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검사가 증거를 대며 계속 추궁해도 묵묵부답이다.
방청석에서는 ’뭘 숨기느냐. 다 불어라‘ 수근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김구는 뒷날 암살재판 수모 때문에 고립감과 위기감을 느껴 북한행을 더욱 결심했다고 실토한다.
”나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려 한 것을 볼진대 점차로 험악해오는 신변의 위험성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만일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김구는 통일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였다고 전해주기 바란다.“([경향신문] 1948.4.17.)
재판출석 이후 거리에서도 손가락질과 야유까지 받아야 했던 김구, 하지만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마샬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두 김(金)이 표면상으로 부를짖는 것은 ’한국의 통일‘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평양의 초청을 수락한 기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적어도 이번 선거에게 그들의 주총자들 중에 당선되거나 고위직에 오를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즉 ’들러리 서기‘가 싫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다른 데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다. 공산주의는 이런 반대파 속에서 번성한다. 두 김은 평양에서 일이 잘 안될 경우에 대비하여 남한에 정치적발판을 마련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김규식이 공개적으로는 선거를 보이콧하고서도 비밀리에 그의 친구들에게 국회에 몇 명이라도 자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후보자들을 내고 선거운동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보고를 받아왔다....좌익과 중도세력은 유권자의 10~15% 정도이다. 그들은 지금 후보자 등록을 하고 있다.」 (Jacobs to Marshall, Apr. 9, FRUS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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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나와 진술하는 김구(왼쪽 앉은이).
◆성시백, 김일성 편지 전달...슈티코프, 김일성에 남북회의 코치
드디어 기다리던 북쪽 두 김씨(김일성-김두봉)의 편지가 3월27일 남쪽의 두 김씨(김구-김규식)에게 전달되었다. 심부름은 역시 거물 공작원 성시백이다. 2월16일 성시백을 통해 편지를 써보냈던 남쪽 두 김씨가 40일째에 받은 편지를 보니 북쪽 두 김씨가 도장을 찍은 날이 3월15일이다. 왜 이렇게 늦었을까.
소련군정청장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는 그의 일기에 상세히 적어놓았다.
소련군정은 이미 김일성을 시켜서 ’남북제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를 정해놓고 그 준비를 하면서 ’올가미‘에 걸린 남쪽 두 김씨를 초조하게 길들이는 순치기간을 두어, 김일성의 협상 주도권을 확보해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회답를 늦추어 보냈다는 것이다.
레베데프는 소련에 있는 ’북한 총독‘ 슈티코프에게 일일이 보고를 보내 지령을 받는다.
슈티코프는 ”김구의 반탁투쟁 등 공산통일 방해행위부터 신문사설로 문책하라“고 명령한다.
김일성은 준비회의에서 슈티코프의 지시대로 주장한다.
”김구는 미군철수부터 요구해야한다. 남조선 선거를 반대한다면 반대 투쟁을 벌여야 하고, 평양에 와서 선거반대 공동성명에 서명해야 할 것이다. 김원봉의 말로는 김구와 김규식이 말로만 반대하고 실제는 선거에 참여한다고 한다.“ (전현수 편역 [레베데프 일기 1945~1948] 나모커뮤니케이션, 2007).
★김일성의 ’일방적 통고와 명령‘ 편지...김구 ”그래도 북한에 가야한다“
김일성-김두봉의 편지는 너무나 뜻밖에 일방적이고 위압적인 명령조였다. 인사말도 없이 ’당신네들‘이란 말로 두 김씨의 '반통일적 행태'를 질책하며 미소공위의 파탄 책임을 물었다.
그것은 김구가 김두봉을 ’인형(仁兄)‘이라 부르며 다정하게 호소했던 감상문과 천지차이였다.
”이제야 당신들은 유엔과 미국의 정치음모를 간파한 듯 한데, 당신들은 어떤 조선을 위하여 투쟁하려는지 그 목적을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대책을 이미 세워두고 그 투쟁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한다“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편지에서 말한 남북통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남쪽 두김씨의 편지는 그 편지를 보낸 것으로 용도종료, 성시백을 시켜 두 김씨를 옭아맨 것으로 끝이다.
북의 편지는 남조선의 참석자 명단을 20명 지정하고, 회의 순서까지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김구의 경교장(京橋莊)과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엔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및 북의 초청 통고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시백은 북한이 지정한 참가대상 인사들 모두에게도 편지를 전했던 것이다. 홍명희 등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북한의 공작을 받은 사람들은 날마다 구수회의를 거듭한다.
그 사이 북한 라디오는 남북정치협상회의를 4월14일 평양에서 개최한다면서 남북의 참석정당들을 거명. 희망자들은 연락하라고 방송하였다.
엎친데 덮친 격이 된 두 김씨는 차마 북한 편지 내용은 발표하지 못한 채, ’감상(感想)이란 이름의 성명을 발표한다.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의구가 없지않다“면서도 ”좌우간 평양에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회담의 성공을 확신하는가” 묻자 김구는 “북한의 소련군도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런 국제분위기로 보더라도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서울신문] 1948.4.1)
그야말로 ‘일방적 지령’에 끌려가면서도 막연한 희망사항을 되풀이 말함으로써 남북회담에 대한 국내외 기대감만 높여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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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공산화과정과 남한 폭동 등의 사건 진상을 알려주는 두 일기. 소련붕괴후 공개되었다.
◆이승만 “공산주의와 결전” 선언...김구의 방북에 직격탄
미군정의 선거준비와 함께, 3월초부터 본격적인 선거 캠페인에 돌입한 이승만은 ‘투표자에게 권고함’이란 담화를 발표, 이번 선거가 “공산주의자와의 결전”이라 선언한다.
“우리가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잃었던 국권과 강토를 회복하여 삼천만이 다 자유로 살자는 목적일 뿐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은 그들이 타국(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하여 우리 독립목적을 방해하는 까닭이니, 누구를 막론하고 독립방해분자들과는 끝까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민족진영에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승리할까가 문제가 아니요, 오직 독립주의와 독립반대주의,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기회만 엿보는 중간주의, 이 세가지 중에서 어떤 주의가 성공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서 투표해야 할 것이며,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분투할 가장 양심적이고 건설적인 애국인사만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총선거에 대한 주의건 15개항’도 발표, “주의와 사실로는 다툴지언정 인신공격 등을 금지하여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위신을 손상하지 말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연설에 맞춰 대동청년단, 독촉국민회청년단, 대한노총, 서북청년회, 전국학생연맹 등 14개 청년단체도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과 국민참여를 계몽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3월31일 두 김씨의 ‘감상’을 들은 이승만은 측근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저 김일성 뒤에 소련이 있는 줄 모르고, 쯧쯧..,소련에 직접 가서 스탈린과 담판하겠다면 모를까 김일성을 백번 만나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쯧쯧“(비서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앞의 책).
그리고 이승만은 이런 담화를 또 발표한다.
”남북회담 문제는 세계에서 소련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줄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아직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蒙昧)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이번 북한에서 온 편지 내용이 발표된 것과 같다면 이것은 소련 목적을 성원하는 이외에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을 다 알수 있는 것인데, 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국사에 방해되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욱 낙심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국권회복을 하루바삐 성취하자는 합의로써 총선거를 충분히 진행한 뒤에 우리 힘으로 남북통일을 우리 정부에서 달성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동아일보]1948.4.2.「남북협상은 소련 목적에 추종」)
★이승만,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남북회담전망’
「두 김씨의 북행 결정은 그곳에서 큰 선전꺼리가 될 것으로 일단 관측됩니다. 이미 이곳 공산당 신문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은 김구를 부의장으로 만들어 북한에 체류시키려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결국 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을 들고 나오든가, 북한정권이 유일한 정부이므로 통치권이 남한까지 미친다고 공포하라고 김구를 조용할 것입니다. 북한의 군사적 준비가 그걸 말해줍니다. 김구는 늘 그랬던것처럼 미군철수부터 요구할 것이 틀림없지요. 소련군은 국경을 건너가서 미국을 주시할 것이고 만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 뒤의 일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김규식 박사는 꾀가 너무 많은 사람이라서 꾀로 소련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남쪽에서 지체 없이 우리 계획을 추진하는 일입니다. 1948.4.5」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1960)
★미군정,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으려는 것...북행 도로는 넓다‘
딘 미군정장관은 4월1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넓은 도로 뿐만 아니라 철도도 있으니 이를 이용하면 좋을 것이며 우리는 하등의 간섭도 안할 것이다. 하루바삐 통일을 원하는 것은 미국이 누구보다 더 갈망하고 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지푸라기를 잡으려다가 귀한 생명을 잃어선 안된다” ([동아일보]1948.4.2.)
하지 사령관은 4월6일 ’남북협상의 선행조건‘이란 특별성명을 내놓았다.
“무릇 협상 대표란 선거로 뽑힌 사람이라야 국민적 대표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딘 장군 보다 더 강한 비난을 쏟았다.
“북한에서 온 초청은 남한의 주요 정당 영수들은 다 빼고, 국민대표를 선정하는 유일한 방법인 선거를 반대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지명했다. 그 대다수는 공산주의 주구로서 해방이래 남한에서 반동행위를 해왔고 한반도를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보려고 애쓰던 자들이다” ([조선일보]19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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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공산화의 두 주역, 슈티코프와 렘베데프(오른쪽).
◆슈티코프 “김구의 참석이 가장 중요”...김일성 연설문까지 직접 작성
★두 김씨, 신변보장 받으려 연락원을 김일성에게 파견
남북연석회의 날짜가 다가오자 김구와 김규식은 사전파견 연락원으로 안경근(安敬根)과 권태양(權泰陽)을 선정, 편지를 써서 평양으로 보냈다. 회의 개막날짜 연기와 신변보장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특히 신변보장은 김구가 몹시 신경쓰는 문제다. 왜냐하면 중국 임정시절 김구는 공산당원들을 여러명 ’해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월 성시백이 처음 ’김일성 장군 특사‘라며 나타났을 때에도 김구는 물었다. “장군께서 나의 과거를 용서해주실는지...” 성시백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장군께서는 과거를 일체 불문에 부치시고 백범 선생을 통일 대통령으로 모시고자 정해놓고 계시니 아무 염려마시고 평양에 가시면 됩니다.” 그 말에 김구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의 입으로 확약을 받아야 하겠기에 편지에 “지난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백지에서 출발하자”고 써 보냈던 것이다.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안경근은 회의 날짜 연기와 신변보장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우리가 통일을 위해 만나는데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이미 회의 준비도 끝나있으므로 두분 선생이 이쪽으로 넘어오셔서 우리와 상의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송남헌 증언, [남북의 대화] 고려원, 1987). 레베데프는 “과거를 백지화 하자고? 자기 죄를 다 인정하는군” 낄낄 웃었다.
★슈티코프, 남북회의 의사일정 확정...김구 ’축사‘ 시킨다
레베데프는 연락원이 가져온 편지도 슈티코프에게 즉각 보고한다.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는 남북연석회의를 주재하는 총감독이다. 모든 시나리오는 이미 스탈린의 결재를 받아 시행중이다. 슈티코프가 “가장 중요한 것은 김구의 참석”이라며 독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북회의를 여는 목적이 김구를 이용한 남한선거 저지전략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뒷날 소련 패망후 공개된 [슈티코프 일기]와 [레베데프 일기]에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3월30일자 레베데프의 기록. 북남조선 연석회의 의사일정이다.
「4월14일의 확대회의에 대하여 협의하다.
정치정세에 대하여 김일성, 김구, 허헌 세사람이 보고한다.
김일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박헌영이 한다. 보고가 끝나면 의견교환 뒤에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한다.
제1일, 연석회의를 거행한다.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로 주석단을 구성한다.
의사일정을 채택한다. 김두봉, 김구, 허헌, 김규식, 김달현, 이극로 최용건, 김원봉 이상8명의 축사를 듣는다.
제2일, 첫 번째 문제에 대해 3명의 보고를 듣는다. 토론시간을 갖는다. 토론자에게는 발언시간을 15분으로 제한한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결정서를 작성할 위원회를 선거한다.
제3일, 첫 번째 문제에 대한 토론을 종결하고 결정서를 채택한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 보고자는 허헌이다. 선전노선에 대하여 조직노선에 대하여 토론한다....등」
이와같이 스탈린이 남조선 선거저지-공산화 각본을 정하고 슈티코프-레베데프가 시나리오와 콘티까지 짜서 김일성 일당을 무대에 내세워 연기 시키는 남북연석회의는 이제 남한의 두 김씨가 거느리고 오는 남한 엑스트라의 입장을 기다리는 중이다.
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연설문도 직접 써서 레베데프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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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폭동의 희생자들 위패를 모신 평화공원 건물. 가해자인 남로당원들까지 포함시켜 계속 문제가 되고있다.
◆제주 4.3폭동 만발...김구는 경교장 뒷담 넘어 38선 직행
★남로당 폭력투쟁 전국 일제히 개시
소위 ’2.7구국투쟁‘이란 선거반대 폭동에 이어 선거일이 5월10일로 확정되자 남로당은 4월부터 본격적인 폭력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한다. 이것은 물론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것인데 북한에 있는 박헌영에게는 김일성과 헤게모니를 다투는 ’충성경쟁‘이므로 총력을 기울여 지휘한다.
청년당원들로 ’선전선행대(宣傳先行隊)‘라는 무장조직을 구성, 목포 유달산에 봉화를 올린 것을 신호로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폭력을 개시한다. 선거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후보자들에 대한 테러, 교량과 철도 폭파, 전신주 뽑아내기, 무자별 방화 등 전국을 휩쓸었다. 서울 북한산과 인왕산에 봉화시위가 벌어지고 후보자 등록 사무소들을 기습한다. 미군정은 당시 3만여명에 불과한 경찰력만으로는 1만3,800여개소의 선거사무소를 지키기에도 역부족인지라 다급하게 지방별 향보단(鄕保團)을 조직하여 대응하였으나 어림도 없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4.6.~12)
제주4.3폭동은 남로당 폭력투쟁의 하이라이트였다. ’슈티코프의 일기‘를 보면 박헌영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투쟁을 격려한다. 25세 김달삼(金達三, 1923~1950. 본명 이승진李承晉)이 제주남로당 군사부장-유격대사령관으로 4월3일 밤 제주일대 경찰지서들을 일제히 기습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확산된 폭동을 계속하여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저지‘에 성공하였다.
★김구 “우리민족끼리 해결”...김규식 “북한군에 남조선 정부 며칠 못 간다”
이런 와중에 김구와 김규식은 4월12일 이승만-이청천-김성수 등을 자기조직 국민의회에서 해임하는 ’공식이별‘ 작업을 벌인다. 김일성의 ’무조건 환영‘에 답하듯이 남북회의를 앞두고 집안정리를 서두른 것이다. 이에 맞장구를 치듯이 ’문화인 108명 성명‘이 14일 나왔다.
동아일보 주필 출신 설의식(薛義植)이 주동한 이 성명은 당시 문화계의 명사들을 망라하여 남북회의를 지지한다는 명문이었다고 한다.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를 외치는 글은 지식인다운 정세분석은 아예 없고 오로지 ’불타는 민족주의 열정‘이 넘치는 선동문이었다. 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하자는 취지였다,
15일 저녁에는 김구가 경교장 정원에서 북행환송파티를 열고 한바탕 민족주의를 부르짖는다.
“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민족끼리 민족정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 해보자는 것이다...담판을 해보아서 안되면 차라리 38선을 베개삼아 메고 자살이라도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삼천만에 읍고함‘이란 성명에 나온 말을 되풀이 하였다.
이보다 앞서 나온 김규식의 발언은 한술 더 떴다. 섬찟하다.
“북조선에 20만의 군대가 있으니 남조선에 정부가 서도 그 정부는 며칠 못갈 것인데,...그래서 우리는 남조선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반대하는 것이다....우리 일은 우리끼리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을 알아야 한다....흥해도 우리 힘으로 흥하고 망해도 우리 손으로 망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8.4.6.)
김규식의 주장은 북한군에 남조선정부가 며칠못가 망한다면서 북한에 간다니, 김일성과 ’우리끼리‘ 무슨 일을 끝장 본다는 것인지, 김규식을 아는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평양방송은 19일 밤 10시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기 바란다’고 방송하여 두 김씨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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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가 38선 표지선 앞에서 아들 김신(오른쪽)과 비서 선우진(왼쪽)과 기념 쵤영을 하고있다.
★"가지 마시오" 북행 말리는 시위대 경교장 앞마당에 농성
드디어 19일 아침, 경교장 마당은 인파에 덮였다. 김구를 환송하는 한독당 사람들을 비롯, 월남한 기독교단체, 부인단체, 서북청년회, 전국학련 학생들이 뒤섞인 500여명이 진을 쳤다.
김구는 둘째아들 김신(金信)과 비서 선우진(鮮于鎭)을 대동하고 경교장을 나왔다. 그때 ”가지 마시오“ 외치는 인파가 김구 앞에 누워버렸다. 일부는 김구의 자동차 바퀴 공기를 빼놓았다.
베란다에 올라선 김구는 ‘내 마지막 독립운동 길을 막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경교장을 나갈 수가 없었다. 김구 측근들은 다른 승용차를 뒷담 너머에 대기시킨다.
점심까지 챙겨먹은 김구 일행은 오후 2시 넘어서 남몰래 경교장 뒷담을 넘었다.
(선우진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이승만 “남산의 소나무들이 다 죽어가고 있소”
2월 하순경 이런 일이 있었다.
김구가 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남한만의 선거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아일보 기자가 물었다.
“백범 선생은 전에 이승만 박사에 대한 애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남산의 푸른 소나무가 색이 변한대해도 나는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선거 반대는 그 말과 상치되는 것 아닙니까?”
김구는 10여분 뒤에 대답하였다. “작은 문제는 이견이 있어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뜻을 같이 하고 있소”
이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승만이 말했다.
“남산의 소나무들이 전부 죽어가고 있소”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김구, 38선에서 기념 사진...김규식, 북한의 짐검색에 호통
김구가 38선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6시40분, 기자들과 짧은 회견을 하고 북한사람의 도움으로 38선을 넘었다. 작은 마을서 저녁도 굶은 채 대기중 밤11시가 되어서야 북한측 영접책임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사무착오”라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평양서 보낸 차로 옮겨타고 어느 여관에 도착하니 새벽1시, 이튿날 사리원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 닿은 시간이 20일 오후 2시였다.
“설사가 나서 뒤따라 가겠다”던 김규식은 21일에야 승용차 11대에 일행 16명을 태우고 서울을 떠났다. 경찰이 지프차로 에스코트하였다. 일행은 원세훈, 김봉준, 최동오, 신숙, 김성숙, 박건웅, 신기언, 송남헌 등이다. 38선을 넘어 평양서 보낸다는 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복차림의 북한 보안원들이 일행의 짐을 샅샅이 검색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노발대발 호통을 쳤다.
깊은 밤 새벽1시에 ’특별열차‘로 출발, 아침6시 평양 도착, 김구가 머무는 상수리(上需里) 특별호텔에 합류하였다. (선우진, 앞의 책). 이 같은 북한의 두 김씨 영접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