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건국내각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 임영신, 안호상, 이인, 이범석, 이승만, 윤치영, 김도연, 조봉암, 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 김동성, 민희식,유진오.(1948.8.5 중앙청앞에서)
    ▲ 대한민국 건국내각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 임영신, 안호상, 이인, 이범석, 이승만, 윤치영, 김도연, 조봉암, 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 김동성, 민희식,유진오.(1948.8.5 중앙청앞에서)
    신생 대한민국의 권력을 누가 잡느냐? 대통령은 이승만이 취임하였으니 ‘총리’와 장관’자리를 두고 정파들의 암투가 벌어지고 국민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독립운동 40년 만에 다시 찾은 나라의 권력투쟁은 그만큼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김구가 일찌감치 ‘반(反)대한민국’으로 돌아서며 경쟁대열에서 멀어져 한민당은 안도하였을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차지하리라는 예상이 대세였다. 한민당 자신도 ‘김성수 총리’안을 은밀하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무위원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 이승만이 취임사에서 비친 ‘예상과 다른 인물’은 누구일까. 한민당 인물이 아니라는 시사가 강하다. 
    이승만은 해방3년간 한민당의 지원을 받았대서 한민당에 기울지 않았다. 그것은 한민당 쪽이 이승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아니, 막상 이승만이 겪은 한민당 지도층이 가장 신뢰하기 힘든 집단이란 결론을 심어주는 사건이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1년전 미소공위 협상대상에서 한민당을 거부하던 소련이 통일전선 전술로 바꿔 문호를 개방하자 우르르 달려가 가입한 것이 한민당이다. 이승만이 ”공산화 함정“이라고 말렸지만 한민당은 좌우합작정부라도 권력참여가 다급하였던 것, 그때 이승만은 국내파 한민당에 결정적인 ‘불신과 경멸’을 가지게 된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이승만은 넓게 보고 멀리 뛰는 민족 지도자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남한만의 정부가 아니요, ‘정읍선언’에서 밝힌 바 목표대로 유엔의 지원을 받는 ‘남북통일 지향 정부’여야만 한다, 어느 특정당 독점이 아닌 ‘거국내각’이 돼야만 통일노력에 국제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장 ‘조각당’에서 혼자 ‘건국내각’을 구성하는 이승만은 그래서 상징적인 최초의 총리 인선부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결과는 무엇이냐? 그 ‘건국 드라마’의 몇 장면을 열어보자.
  •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했다가 국회서 거부당했던 이윤영 국회의원(왼쪽), 대신 임명한 이범석 초대국무총리.
    ▲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했다가 국회서 거부당했던 이윤영 국회의원(왼쪽), 대신 임명한 이범석 초대국무총리.
    ◆초대 총리 산통(産痛)...이윤영 총리에서 이범석 총리로 

    취임 사흘간 칩거하던 이승만은 이화장을 나서 중앙청 국회 의사당 연단에 섰다.
    7월27일 아침 ‘총리 인선’ 발표의 순간, 숨죽인 국회의원들과 기자들이 집중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자신이 작성한 긴 발표문을 30분이나 낭독하며 꼼꼼하게 설명해 나갔다.

    ★이승만, 김성수-신익희-조소앙을 총리에서 제외. 왜>?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중에 몇 단체와 주요 지도자들과 토의 협정하여 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미리 발설이 되면 매인열지(每人悅之: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부득이 혼자 심사각득(深思覺得:깊이 생각하여 깨달아 앎)해서 오늘까지 초조히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각방면의 지도자 측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하여 정부조직과 국무총리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名錄)이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명록만 채용하여 결정한 것은 아니나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하 연설내용은 [제헌국회 속기록(1) 제1회 제35호. 1948.7.27.]에서 발췌)
    이승만은 이처럼 각 정파들과 사전 협의하지 않은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우선 국무총리 적임자로 추천과 여론과 인망을 보아 “가장 유력한 인물들이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세 사람인데, 민의와 국내외 정세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잘라 말했다.
    일순 회의장은 물벼락을 맞은 듯 파문을 일으킨다. 곧 이승만의 사유 설명이 이어졌다.
    “첫째, 해방후 정부 수립 이전에 정당이 먼저 생겨서 분규가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요, 또 유감으로 아는 바입니다....몇몇 정당으로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정당주의로 권리를 다투는 중에 행정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양년 동안에 몇몇 사회민족운동단체 경력이 소상히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당 지도자가 총리로 피임되면 난편(難便)한 사정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므로 아무쪼록 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즉, 이승만은 정당지도자 총리는 ‘정쟁을 유발’할 것이므로 피하겠다는 말이다. 바로 내각제를  반대한 까닭이다. 이어서 이승만은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에 대하여 각각 ‘중용’할 것이라고 다독이는 것이었다.
    “김성수씨로 말하면, 그분의 인격과 애국성심과 공평정직한 것은 추앙하지 않는 사림이 없는 줄로 믿으며....국무총리 보담 덜 중대하지않은 책임을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총리만큼 중용하겠다는 시사였다. 즉, 그가 말한 총리와 맞먹는 자리는 재무장관이었다. 그동안 이화장으로 김성수를 부른 이승만은 미국 건국초기 큰 공을 세운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을 거론하면서 가난한 신생국의 독립을 위하여 재무장관을 맡아달라고 몇 번 간청한 바 있었다.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인촌 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1976)
    신익희에 대하여는 ‘역사상 정치상 몇분 안되는 총리감이지만 입법부의 책임이 더 크므로 국회를 맡아달라“고 당부하였고, ”조소앙씨는 일본 유학생 때부터 명망과 위신이 많은 추대를 받아왔으나....민중의 의혹이 다 풀려서 장애가 없어지면...“ 함께 일할 수 있으리라고 못 박았다. 상하이시절에도 이승만을 지지했던 조소앙의 우왕좌왕에 실망한 이승만의 직격탄 경고였다. 아뿔싸...그때 조소앙은 김구를 따라 평양에 갔다가 실망하여 김구와 결별, 기자들에게 강한 입각의욕을 밝히며 이승만에게 러브콜을 계속하던 터였다.

    이승만은 마침내 ’히든 카드‘를 꺼내들었다.
    ”국회의원 중에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장내는 조용하다. 
    이승만은 ’왜 이윤영 총리‘여야 하는지를 또 길게 설명한다,
    ”이 공포에 대하여 다들 크게 놀랄 것이지만 이윤영 의원이 가장 놀랄 줄 압니다. 이 분을 임명하는 나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째 국회의원 중에서 총리를 택한 것은 민의를 존중하고자 하는 본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이북 대표 한분이 그 자리에 오르기를 특별히 관심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급한 우리 문제 중에 제일 급한 것이 남북통일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슨 정책을 쓰든지 이북동포의 합심 협력을 얻지 않고는 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먹으나 굶으나 머리 둘 집칸이라도 있고 이만치라도 자유 활동하고 살아온 터이나 이북동포의 참혹긍측(慘酷矜惻)한 정형은 우리가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 없는 터입니다.“
    이승만은 조만식 선생을 부통령으로 추대해서 이북동포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생명이 위험해질까봐 자제하였다고 밝히고, 그 대신 평양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부위원장이었던 이윤영 의원이 국무총리를 맡는 것이 민족적 정의로도 가장 적당할 것이므로 ”남북통일 촉성을 위하여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을 믿는다”고 총리 인준을 촉구하였다.
    덧붙여 한국의 오랜 악습인 ’지방열‘(지역감정) 타파에도 “서북 출신 이윤영 의원이 지방열을 극렬 반대하므로 적임자”임을 재차 강조하고 국회를 떠났다.
    서북(평안도-함경도)파의 지방열은 수백년 묵은 열등의식이 뭉쳐진 ’복수열‘로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안창호의 이승만 배척운동이 지방색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점으로도 증명하고 남는다.([윤치호 일기] 참조)

    ★국회, 이승만 나가자마자 ’이윤영 총리‘ 부결

    이승만이 이윤영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는 안을 내놓고 퇴장하자마자 국회는 즉석에서 승인여부를 묻는 투표에 들어갔다. 재석의원 193명의 무기명 투표결과 가 59, 부 132, 기권 2표로 부결을 선포한다. 가장 강력한 한민당 세력의 총수 김성수를 ’총리‘에서 제외시켰으니 부결은 불문가지(不聞可知)였다. 
    한민당 의원들은 그날 오후3시 당사에 모여 ’기정방침‘대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한다. 이승만의 선택은 모두 부결한다는 것이다. 조소앙을 추대한 무소속계(김구 세력)도 단합회의를 가졌다.

    이승만은 이튿날 7월28일 국회 정파들을 겨냥한 담화를 발표한다.
    “이윤영 의원 임명안을 제출한 후 즉석에서 부결시킨 사실을 보면 두 당이 각각 내응적으로 자기당 사람이 아니면 투표 부결에 부치자고 약속이 있는 것이니, 만일 이것이 사실이면 내가 국무총리를 몇번 고쳐서 임명하더라도 자기들의 내정한 사람이 아니고는 다 부결되고 말 것이오, 그 내용을 좀더 알기 전에는 다시 임명하기를 원치 않으며...이윤영씨를 임명한 이유 중에서 부적당하거나 불가하다는 더 큰 이유가 있다면 내가 알고자 할 것이나, 토론 한 번도 없이 부결하다니...” ([조선일보] 1948년 7월29일자)국회내 다수파 한민당과 김구계를 ’두 당‘이라 지칭하며 정면 비판한 이승만은 그동안 독립촉성국민회의 간부들을 겪어보니 “각자 자기정당을 우선시하므로 민족운동을 해갈 수 없었다”고 실토하고 “지금 초대 정부에 또 그렇게 만들어놓고서야 국가건설을 어찌 해나가겠는가”고 탄식을 토한다.
    “국회 안에서 어떤 인물을 지정해가지고 그분만을 지지하기로 활동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 터이니, 이것이 민족의 원하는 것인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민족이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서 그대로 따르기를 결심한다”고 다짐하였다.
    ’그 분‘이란 한민당의 김성수를 가리킨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7.26)에서 조각의 고민과 ’이윤영 총리‘안의 의미를 털어놓았다.
    “...국무총리는 북쪽 출신이어야 하고 부유층 출신은 아니어야 한다. 이 두 요소는 모두 유엔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할 때 파리에서 유리한 자산이 될 것이오.” 
    따라서 김성수는 남쪽 출신에다 최대의 부호이므로 자동탈락이 된다. 
    “...나는 김성수를 임명하고 싶은데 그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run or ruin) 식으로 뭉쳐 있다오....김성수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일곱 개의 장관직을 줄 것을 요구하고 있소....” 
    이래저래 이승만이 김성수를 총리로 선택할 길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던 셈이다.
    내각제를 반대하는 그가 ’한민당 독과점 정부‘를 만들 리가 없고, 9월 파리의 유엔총회에서 반드시 조속한 시일 내 ’국가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이 건국 최우선 목표 ’발등의 불‘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지도자의 국제적 국가이익 확보와,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수구 자본세력의 충돌이라 할까. 거국내각을 주장하는 이승만에게는 ’친일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국내파 중심이  되면 유엔이 세워준 자유독립국가의 정부로서 국제적 평판은 물론, 국가승인 투표에도 장애가 될 터였다.
  • 김성수 부통령시절, 이승만 대통령과 담소하는 모습.
    ▲ 김성수 부통령시절, 이승만 대통령과 담소하는 모습.
    김성수, 이범석 총리 승인 직후 장관 6명 요구

    이윤영의 총리 임명을 국회가 부결시키자 이승만은 청산리전투의 독립투사 이범석(李範奭,1900~1972)을 지명하고 각당의 지도자들을 불러 승인을 요청한다. 독촉국민회 고희동, 배은희를 비롯하여 한민당의 김성수도 이화장으로 불러 협조를 당부하였다.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부하 참모장이던 이범석의 총리 임명에 반대하였다. 김구계 무소속도 반대를 결의한다.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의 당부를 받은 김성수는 이범석을 계동집으로 불러 ’조각 구상‘을 내놓았다. 
    “정부의 12부 4처 가운데 적어도 6개 장관을 한민당에 배정해주지 않으면 당을 설득할 수 없다. 나로서도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한민당이 치른 역할이나 국회 내의 비중으로 보아 그것은 최소한의 요구라고 생각한다”고 압박했다. 12부 장관 절반을 달라는 요구였다. 이범석도 ’동감‘이라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앞의 책).
    이범석 총리안에 대하여 한민당 안에서도 격론이 벌어지고 “이승만이 천황 같다”며 비난하는 소리도 높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투표에 맡기기로 하고, 무소속에서도 이번엔 승인하자는 논의가 늘어났다.

    ’이윤영 총리‘ 부결 1주일 후, 8월2일 10시30분 국회에 나선 이승만은 ’이범석 총리 임명을 승인해 달라‘고 원고 없이 즉석연설로 요청한다. 
    “....8월15일 안에 여기 미군정당국자들은 하루 빨리 주권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총리승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또 들리는 바 남북협의를 하는 분들이 벌써 남한대표를 뽑아 북쪽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토론만 하고 있으면 안될 것입니다....무슨 당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가지고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무기명투표 결과, 재석의원 197명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 무효 3표로 가결되었다.([조선일보] 1948년 8월3일자)
    16세때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 이범석은 19세때 ’청산리 대첩의 용명‘을 얻었다. 1946년 광복군 참모장으로 귀국,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여 미군정의 예산지원까지 받았으나, 건국후 이승만이 총재를 맡은 대한청년단에 통합된다. 이승만을 ’마음으로부터 지지‘한 이범석은 이제 만48세로 역사적인 건국내각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 건국내각 화제의 인물. 농림부장관 조봉암, 상공부 여성장관 임영신, 사회부장관 전진한.(왼쪽부터).
    ▲ 건국내각 화제의 인물. 농림부장관 조봉암, 상공부 여성장관 임영신, 사회부장관 전진한.(왼쪽부터).
    ◆’거국내각‘이냐, ’한민당내각‘이냐...김성수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승만의 ‘조각 원칙’
    이승만의 조각원칙은 ‘일꾼’과 ‘정부안정’ 그리고 당파를 안배한 ‘거국내각’이었다..
    이승만은 열흘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부조직의 원칙을 이렇게 밝혀두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사람의 사회적 명망이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나’를 초월하고 오직 기능있는 일꾼들이 함께 법률을 민의대로 준행해 나갈 사람들끼리 모이는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참으로 큰 사람은 작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서 무슨 책임을 맡기든지 대소와 고하를 구별치 않고 작은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이 도달될 것입니다.” ([조선일본] 1949년7월25일자)
    그래서 ‘큰 사람’ 김성수에게 재무장관을 권했지만 김성수는 즉석에서 거절했었다.

    조각작업=국회의 이범석 총리안이 가결되자 8월2일 그날 저녁부터 이승만은 이범석을 불러 각부 인선을 서둘러, 밤9시40분 1차 임명자들을 발표하였다.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1894~1967)--1919년 도쿄 2.8독립선언 대표 11명중 한사람.
    ▷법무부장관 이 인(李仁, 1896~1979)--독립운동가들 무료변론 전담,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1898~1959)--조선공산당 창설 멤버, 소련의 코민테른 추종 국                                          내외 암약, 해방후 남노당 박헌영노선 비판 결별.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1895~1980)--미국 유학후 미군정 운수부장.

    이튿날 8월3일 2차 임명자 발표.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1898~1996)--이승만의 미주 독립운동 청년동지.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1901~1972)--일본유학 노동운동가, 독촉국민회 청년조직위원장.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1902~1999)--독일 유학 철학자, 중국서 독립운동.

    다음날 8월4일 3차 임명자 발표.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1893~1969)--영국 유학, 은행 경영,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1899~1977)--미국 유학, 이승만 최측근 독립운동가.
    ▷국방부장관 이범석 국무총리 겸임.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1892~1950)--김구의 독립자금 조달, 무소속 국회의원.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1890~1969)--김성수와 동아일보 창간, 만화가, 이승만지지.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1906~1987)--김성수의 보성전문 교수, 소설가 법학자,

    사흘 만에 구성을 완료한 건국내각 각료 명단은 이상과 같다. 
    가장 화제가 된 것은 공산주의자 조봉암과 최초의 여성장관 임영신, 그리고 전진한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의 의중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인사들이다.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기용한 이유=박헌영과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공산주의를 버렸다는  전향증거가 불분명한 공산주의자를 역사적인 건국내각에 입각시키자 반향은 매우 컸다. 
    왜 이승만은 그를 농지개혁을 다뤄야 할 농림장관에 앉혔을까. 바로 농지개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이 미국 교수 보좌관 올리버에게 쓴 편지엔 조봉암을 등용한 이유를 “농민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실토하고 있다. (올리버, 앞의 책).
    여기에 이승만의 전략적 사고와 혁명적 혜안이 돋보인다. 해방 전후 몇 년간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대다수 가난한 농민들을 자유의 품으로 되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이구동성 농지개혁을 부르짖었고 건국헌법에도 명문화 시킨 터였다.
    이제 드디어 농지개혁을 성공시키려면? 국회를 장악한 지주들과 부유층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대표 격 지도자가 김성수인데 그가 내각책임제로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도, ’총리+장관6명‘ 임명을 줄곧 요구한 것도 이승만은 그래서 단호하게 뿌리치지 않았던가.
    오로지 끼리끼리 권력독점을 추구하는 지배계층에 대항할 비밀병기, 이승만이 공산주의자 출신 조봉암을 꺼내든 이유이다. 지주세력과 싸워서 공산당에 빼앗긴 빈농(貧農)들, 즉 다수 국민을 되찾아야 하는 이승만의 혁명적 선택이었다.
    일찍부터 공산주의를 알고 공산주의를 활용하는 용재술(用材術)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이승만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뒷날 ’공금유용‘이라는 약점에 걸려 반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여성 장관 임영신은 이승만이 취임사에서도 찬양한 유엔외교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었다. 청년시절부터 남녀평등을 주장한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남녀공학을 처음 실시하였고 기어이 ’장관‘까지 여성을 기용한 것. “우리 백성의 절반이 여성인데 노예로 버려져있으니 이를 혁파하여 독립국가의 파워로 육성하자“고 외쳐온 지 반세기 만에 ‘여성해방’을 행동으로써 국민 앞에 실천해 보였다.
    ◉노동문제를 관장하는 사회부장관에 젊은 노동운동가 전진한를 배치한 것도 혁명적 카드였다. 조선왕조5백년간 “노동은 상것들이 하는 것, 양반은 노동하면 양반 아니다”라는 왜곡되고 전근대적 계급사회 찌든 악습을 타파하여 ‘일하는 나라’를 만들려는 이승만, 청년시절 예배 때마다 ‘삼천리 금수강산 일하러가자’는 찬송가를 애창하고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건국헌법 제정때 사회주의 경제조항 ‘근로자 이익균점법’(제18조2항)을 추가하는데 앞장섰던 과격파 전진한을 과감히 등용한다. 자유시장경제론가 이승만은 그 조항에 반대하면서도 ‘노동정신혁명’을 단행하기 위해서다. 이승만 자신이 3년뒤 자유당을 창당할 때 처음 당명을 ‘노동농민당’이라 주장했을 정도로 시장경제 건설의 일꾼 노동자 농민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장관 전진한에게 대한노총위원장을 겸임시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밀고 나갔다.
    ◉한독당 윤석구가 체신부장관이 된 것은 배후에서 김구가 은밀하게 밀었음을 이승만이 알면서도 무소속 구락부(김구파+좌익계)를 배려해서 결재한 인사였다. “말썽 많이 부리는 귀찮은 사람인데 실력은 있다‘면서 이승만이 임명했다고 한다.(윤석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1977. 손세일, 앞의 책)

    ★조각을 대충 마무리한 이승만은 8월4일 국회 제39차 본회의를 열고 후임 국회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또 한명의 부의장에는 무소속의 김약수(金若水)가 한민당의 김준연을 누르고 당선된다. 김구계로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김약수는 다음해 간첩 성시백에 포섭되어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킨 주역이다.
    다음날 제40차 국회 본회의는 김병로(金炳魯, 1887~1964) 대법원장을 인준하였다. 
    이승만은 이렇게 대한민국 건국정부 얼개를 갖추고 8월15일 출범준비에 들어간다. 
  • 이승만대통령이 혼자서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 조각당(組閣堂).
    ▲ 이승만대통령이 혼자서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 조각당(組閣堂).
    돌아 선 한민당...”우리 장관 1명뿐이니 ’내편‘ 아니다“

    8월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첫 국무회의가 중앙청에서 열렸다. 부통령 이시영이 안보인다.
    이시영은 전날 내각 명단이 발표되자 조각구성에서 소외되었다는 불만을 품고 잠적했다. 놀란 이승만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이시영 집을 찾아 갔으나 헛걸음이었다. 이시영은 수원에 숨어 있다가 8월10일에야 제5차 각의에 나타났다.([조선일보]1948년8월11일자)

    첫 내각 명단을 본 정파들과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당연하게도 가장 격분한 것은 한민당과 인촌 김성수였다. 총리직 제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았으나 12명 장관 중에 김성수가 요구한 6명은커녕 달랑 김도연 재무장관 한명 뿐이다. 
    한민당이 얼마나 ’배신감‘에 떨었는지 8월6일 상무위원회를 긴급소집, 짤막한 담화를 발표한다.
    ”대망하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된 것은 경하할 바이다....본당으로서 이번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관련은 극히 희박하다.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시주의로 임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감시를 게을리 아니 할 것을 이에 언명하는 바이다.“ ([동아일보]1948년 8월7일자)
    예부터 당파싸움을 일컬었던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전형적 발로라고나 할까. ’당동벌이‘란 ’자기편 사람은 무조건 싸안고 반대편 사람은 무조건 쳐내는 일‘이다. 집단입각을 기대했던 정부에 자기편이 한사람만 들어갔으므로 그 순간 대한민국 정부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으니 ”두고 보자”는 말이었다.  
  • 이승만이 김성수의 '총리-장관6명' 요청을 거부하자 동아일보는 1면머리 사설로 전면개각을 요구하였다. 1948년8월7일자.ⓒ동아DB
    ▲ 이승만이 김성수의 '총리-장관6명' 요청을 거부하자 동아일보는 1면머리 사설로 전면개각을 요구하였다. 1948년8월7일자.ⓒ동아DB
    ★동아일보 1면 머리 사설, 이승만에게 전면 개각 요구

    같은 날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써서 1면 머리에 통사설로 올려놓았다.
    제호 옆 2단 제목은 ’측측(惻惻)한 국민의 심정‘--즉 가엽고 서글픈 국민의 심정이다.

    「건국정부의 구성인물을 보고 국민의 실망과 낙심은 너무나 크다.
    무거운 국민의 부탁을 받은 대통령은 오로지 민원의 소재를 통감하고 널리 중망이 높은 인물을 거용하야 정부를 구성하므로써.......전국의 태안을 도모하여야 하겠거늘 그 조각 구상에는 몇몇의 중대한 과오가 내포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국민의 기대와 너무나 현격한 췌약(膵弱)정부를 출현시키고 말었으니....국민의 실망과 낙심은 당연한 일이다...(중략)...몇 가지 중대한 과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자기의 우월성을 너무도 과시한 나머지 국회의 세력관계를 전연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모와 덕망에 있어서 유위유능(有爲有能)의 사(士) 없지 않거늘 조금도 포섭하지 못하고 차선삼선의 인사를 모래와 같이 혼합하므로써 만족하지 않았던가?
    민성을 끝내 물리치고 그 사람들만을 기용하지 않으면 아니될 이유가 무엇이며 기상천외의 인사로써 국민을 아연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국민은 도저히 납득하기 곤란하다...(중략)...국민은 유위유능한 인물을 망라한 강력정부의 출현을 기대하였지마는 대통령의 과오로 말미암아 사실은 졸작(拙作)정부가 되고 말었다.
    과오는 과오로 알고 개조하는데 발전이 있는 것이니 때를 재촉하여 일대개조의 결단이 있기를
    국민은 대통령에게 간원하는 것이며...(중략)...국민 앞에서 엄중한 비판과 감시를 받을 것이매 건국정부의 사명을 완수하여야 할 것을 부탁하여 둔다.」 ([동아일보) 1948년8월7일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중대한 과오를 반성하고 “전면개각은 빠를수록 좋다”고 촉구한다. ’유능한 인사‘들이란 김성수가 이승만에 제안한 인물들임은 말할 나위 없다.
  •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을 이틀 앞두고 국회의원 100여명은 건국헌법을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운동을 벌인다. 입각 못한 불만 때문이다.ⓒ동아DB
    ▲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을 이틀 앞두고 국회의원 100여명은 건국헌법을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운동을 벌인다. 입각 못한 불만 때문이다.ⓒ동아DB
    ★동아일보, 8.15 이틀 전 ”국회의원들 개헌운동“ 1면 톱기사

    지난 5월31일 제헌국회 개회 초기에 정해놓은 ’정부수립 기념식‘(8.15 건국 선포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8월13일,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또 한 번 1면 머리기사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국회 휴회를 이용하여 헌법개정운동이 맹렬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 운동에 찬성자는 12일 현재 약 100여명에 도달하였다고 하는데, 앞으로 속개되는 국회에서 이 헌법개정이 과연 될 것인지, 또 3세력이 어떠한 논법을 전개할 것인가 극히 주목을 끌고 있다.」

    거리에는 5천년만의 자유국가 탄생을 반기는 축제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그 무렵, 국회에서는 국가탄생을 코 앞에 두고 개헌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톱뉴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한민당 기관지격인 [동아일보]의 보도는 김성수의 한민당이 벌이는 개헌 캠페인이다. ’시시비비주의‘를 선언한 한민당은 거의 날마다 서울 계동(桂洞) 김성수의 저택에 모여 ’집권의 꿈‘을 불사르고 있었다. 워낙 ’내각제‘의 헌법을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로 양보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 공포시행한지 한 달도 안된 건국헌법을 다시금 ’내각제‘로 환원하는 개헌운동을 은밀하게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의 권력욕망을 어찌 할 것인가. 정부수립 전부터 6.25전쟁 중 부산 피난수도에 가서까지 멈출 줄 몰랐던 개헌 열병은 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때 김성수의 손을 잡았던 미국이 손을 놓고서야 끝나게 된다. 
    민족지를 자처한 [동아일보]의 ’독재자 이승만 규탄‘ 보도 역시 이승만이 자진하야 할 때까지 12년간 줄기차게 불을 뿜었고, 그후 60여년간 [동아일보] 지면에선 ’이승만‘이란 이름 석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웬일인가. 2023년 지금, 이승만기념관 건립운동이 시작되자 [동아일보]가 달라졌다. 세상 참 많이 변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