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한국전쟁 참전 한국계 미국인받은 무공훈장만 19개...전역 후 지역사회 봉사
  • 김영옥 대령ⓒ김영옥 평화센터
    ▲ 김영옥 대령ⓒ김영옥 평화센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운 휴머니스트 고(故) 김영옥 대령에게 미국 연방 의회 금메달을 수여하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연방 의회 금메달은 의회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이다.

    앞서 지난해 3월 미국 연방 하원의원 메릴린 스트릭랜드, 미셸 박, 영 김, 앤디 김은 김영옥 대령의 영웅적 리더쉽과 인도주의 실천을 기리기 위해 금메달을 수여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통과되지 않았다. 이에 지난달 30일 법안을 재발의한 것이다.

    고인 김영옥 대령은 19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김 대령의 아버지 김순권 씨는 미국 대한인동지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항일운동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영옥 대령은 입대했다. 그가 배치된 곳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0보병 대대였다. 

    1943년 100대대는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당시 독일군은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에 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을 치고 있었다. 연합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어, 포로가 필요했다. 이에 김영옥 대령은 직접 적진에 들어가 적 2명을 생포했다. 

    김영옥 대령은 피사와 로마 해방전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피사의 사탑에 오른 최초의 연합군으로 기록됐다. 이탈리아는 공을 세운 김영옥 대령에게 '동성무공훈장'과 '십자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김 대령은 프랑스 브뤼에르, 비퐁텐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 대령은 기관총탄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맸다. 그는 항생제 처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는 김 대령에게 '십자무공훈장'과 '레종 도뇌르훈장' 수여로 보답했다.

    김대령은 6.25전쟁에서도 큰 공적을 쌓았다. 그는 '부모의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예비역 대위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구만산·탑골전투·금병산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다. 여기에 그가 이끈 부대는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38도선 인근의 전술선)에 도달했다. 또 휴전선을 60km 위로 밀어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격한 결과 아군의 오폭을 받고 부상 당했다. 이에 그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료 받고 다시 전선에 돌아왔다. 이 같은 공헌으로 김영옥 대령은 6.25 전쟁 특별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영옥 대령이 한국·유럽·미국에서 받은 무공훈장을 다 합치면 19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김 대령은 전쟁고아 500명을 돌봐 인도주의를 몸소 실천한 '휴머니스트'다. 그는 한국전쟁 고아들에게 전투식량을 나눠줬다. 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장병 1인당 50센트씩 모아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전달하기도 했다.

    1972년 전역한 김영옥 대령은 한인 청소년과 소수 인종들을 위한 사회봉사에 여생을 바쳤다. 그는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을 설립했다. 또 가정폭력 피해자와 한인 입양아를 돌봤다. 더 나아가 그는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해 미 캘리포니아 의회 위안부 결의를 도왔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조사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을 위해 평생 봉사하다, 2005년 별세한 김영옥 대령은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김영옥 대령에 대해 “(인종) 장벽 및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대와 지역사회 모두에서 그의 공헌은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기간 군사적 영웅 및 확고한 지역사회의 리더이자 인도주의자로서 이 높은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며 김영옥 대령 금메달 수여 법안 발의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앤디 김 의원 역시 “김 대령은 제복을 입었을 때 뿐만 아니라 확고한 지역사회 리더로서 모범적인 봉사를 했다"며 고 김대령을 치켜 세웠다. 영 김 의원도 "김 대령은 역경을 이겨내고 미국과 아시아계 미국인 지역사회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전부를 보냈다. 모든 한국계 의원이 뒤늦고도 당연한 의회 금메달을 추서하기 위해 일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