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세력이 이명박 대통령의 구속에서 얻어야 할 교훈
  •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법원에서 징역 17년형을 확정받았다. 이 전 대통령은 올해 80세다. 이미 1년이 넘는 기간을 구치소에서 보냈다. 조선시대에는 80세 이상 고령의 죄인은 형벌을 면제 받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고령에 세 번째 수감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재판에 임했던 것은 사법부가 자유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는 기대 때문”이라며 “그러나 대법원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했다”는 항변을 남겼다. 이미 사법부가 이른바 ‘촛불혁명’의 완장부대로 전락한 지 오래된 마당에 이 전 대통령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오늘자 한 일간지 사설은 문재인 정권의 검찰이 ‘이 전 대통령의 감옥행을 정해 놓고 혐의가 나올 때까지 털었다’고 표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감옥으로 보내버렸으니 좌파정권이 추진해온 이른바 ‘적폐청산’은 드디어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이명박 두 보수정권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두 대통령 개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보수세력 전체의 패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구속을 두고 우파진영 내에서 분석이 분분하다. 보수분열의 참담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작용과 반작용은 물리법칙 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수진영이 분열하고, 좌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보수정권 출신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고, 보수세력 전체가 수세에 몰린 것도 작용과 반작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법치국가에서는 여야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서 죄없는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지는 않는다. 보수정권 출신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갔다는 것은 단순히 정권을 야당에게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주사파 출신들에게 정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계급투쟁론적 역사관으로 세상을 보는 좌파들에게 대한민국은 애시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일 뿐이다.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모든 가치관과 모든 이데올로기를 근본부터 뒤집어엎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고, 정권투쟁 방식이다.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킨 과정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저 한탕 뜯어먹기 좋은 나라에 불과하다.

    결국 건국과 산업화라는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박근혜·이명박 두 보수 대통령은 저들의 역사관에서는 반드시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두 대통령에 대한 구속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좌파세력이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완전하게 장악했다는 정치적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대착오적 주사파 세력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책임

    역설적이게도 한줌의 변종 바이러스에 불과하던 주사파 운동권들이 역사의 주류로 등장한 배경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보수진영 내에서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520만 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된 이명박 전 대통령 앞에는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 10년간 좌경화된 국가정체성을 바로잡아야할 시대적인 책무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좌파들과 정면 승부를 피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동안 386 주사파 출신 운동권들이 대거 정계로 진출했지만, 이들도 최소한 ‘진보’라는 당의정이라도 덮어써야만 정계에서 명함을 내밀고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간 이어진 좌파정부는 이들 극좌 운동권 세력들이 제도권 정치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었다. 그 사이 이들 386은 486이 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출판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애국우파 진영의 저항도 시작됐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를 부정하는 좌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작용인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정갑 전 예비역 대령이 주도한 ‘국민행동본부’라는 시민단체는 무려 10년 동안 줄기차게 거리투쟁을 주도했다. 이른바 ‘아스팔트우파’는 이렇게 탄생했다. 국민행동본부는 주요 일간지에 520차례(2001~2009년까지 집계)가 넘는 의견광고를 실어 좌파정부의 실체를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거의 매주 집회를 열었다.

    변화의 ‘혁명적 에너지’를 엉뚱한 ‘촛불’로 분출


    아스팔트 우파의 10년에 걸친 눈물겨운 투쟁으로 17대 대선에서 ‘우파정권 출범’이라는 결실을 이뤄냈다. 애국세력들은 이제 이명박 대통령이 나라를 정상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중도실용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취임 시부터 퇴임 시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망가진 국가 안보시스템과 국가정체성을 정상화 시키려는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투쟁한 애국인사들에 대한 배려는 애당초 없었다. 무슨 자리를 바라고 투쟁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그 흔한 형식적인 위로의 인사조차 없었다. 오히려 철저히 외면하고 심지어 피하기 바빴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조갑제· 서정갑 같은 아스팔트 극우세력과 멀리해야 한다”는 직보를 가장 먼저 했다는 이야기가 캠프에서 흘러나왔다. 내각은 ‘고소영 내각’이라고 조롱받았고, 청와대는 정치 교수들의 취업집단으로 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17대 대선에서 무려 520만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선거라는 이름의 혁명적 상황을 맞이 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 혁명적인 열기를 좌파인적 청산과 국가정상화라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변화의 열기는 불만으로 변했고, 도리어 촛불시위라는 대통령 자신을 향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중도실용 정책이 가져온 결과


    2008년 5월 MBC의 미국산 쇠고기 허위 선동으로 시작된 광우병 촛불시위는 그해 8월까지 4개월 동안 광화문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특히 시위가 극심했던 6~7월 두 달은 광화문은 밤이 되면 공권력이 무력화된 이른바 ‘해방구’가 되었다.

    2008년 6월29일 시위에서는 광화문 일대에서 1개 중대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 시위대들은 쓰러진 전경을 호송하는 것조차 막았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쇠고기 광우병이라는 거짓선동에 당당히 맞서지 않았다. 중도실용을 내세워 좌파와 타협한다는 차원에서 야간 불법집회를 ‘촛불문화제’라는 이름으로 허용했다. 그러자 점차 가두시위로 번지기 시작했고,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폭력시위로 확산됐다.

    이 촛불난동 기간 동안 전경버스 100여대가 불탔고, 전경 5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공권력이 미치지 않던 지역에 있던 ‘조중동’이라 불리던 보수언론은 촛불시위에 겁을 먹고 논조를 급격하게 변경해 촛불시위 편에 가담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따라 불렀다며 거짓선동에 사실상 항복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이 촛불시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파들에게 끌려다니는 형국이 되었다.

    지도자에 필요한 덕목은 시대정신과 용기


    우파애국세력은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를 다하는 동안 정치적 고비가 생길 때마다 힘을 실어주었지만, 당시 집권 여당은 단 한명의 국회의원도 애국 세력의 태극기 집회에 얼굴을 비추는 자가 없었다.

    이런 선상에서 볼 때 ‘국사교과서 사태’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부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온통 북한 교과서를 그대로 베껴놓은 듯한 철저한 계급사관에서 저술된  국사교과서를 이명박 교육부가 허락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방치한 좌경화된 국사교과서를 박근혜 대통령이 뒤늦게 바로잡으려다 좌파들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2010년 3월 북한이 천안함 폭침만행을 저질렀을 때 청와대가 “예단 말라”며 대북 보복을 미루자 애국심과 공분(公憤)을 표출할 길이 없던 국민은 ‘천암함 가족돕기 모금운동’을 하며 울분을 삭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증거가 발견되면 “대북심리전을 재개 하겠다”고 약속 했지만, 북한의 어뢰가 발견된 후에 북이 “확성기를 조준 타격하겠다”고 협박하자 없었던 일로 꼬리를 내렸다.

    그해 11월에는 북한이 대낮에 우리의 연평도를 포격했는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제대로 된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 6.25 이래 처음으로 북이 우리 국토를 직접 공격하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북한과 승부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전 대통령이 조금만 더 용기를 가지고, 국가관 역사관, 철학이 투철한 지도자였다면 이 위기를 도리어 하늘이 준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으면 70년 분단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통일의 기회로 전환하는 계기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퇴임 무렵에 가서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한 보복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다. 사람의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구속을 앞둔 고령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을 이렇게 냉정하게 반추하는 것은 그가 사람의 일, 특히 분단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처럼 분단된 국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우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 전체는 물론이고, 국가 자체가 생존의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