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배우 하성광 프로필 이미지, 연극 '엔드게임' 공연 장면.ⓒ극단 76
    ▲ 배우 하성광 프로필 이미지, 연극 '엔드게임' 공연 장면.ⓒ극단 76
    클로브와 햄이 생기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끝이야 끝. 끝날거야."
    "내 차례다. 낡은 헝겊 쪼가리…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창밖으로 황폐한 세계가 보이는 벙커와 같은 곳에 네 사람이 살고 있다. 눈이 멀고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햄(하성광)은 절뚝거리는 클로브(김규도)를 노예처럼 부리고, 햄의 부모인 나그(정재진)와 넬(이재희)은 쓰레기통에 살면서 가끔 머리를 내밀며 과거의 추억을 되뇐다.

    주인공 햄은 끊임없이 무의미한 명령을 내리고 클로브는 계속 자신이 떠날 것임을 선언하지만 실행하지 못한 채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서로 구속하는 네 명의 일상이 놀이처럼 반복된다. 그러다 살아있는 소년을 발견한 클로브는 마침내 햄을 떠나려는 차림새로 나타난다.

    "나와 당신의 이야기이고 주변과 세상 이야기인데 베케트식으로 생의 부조리함을 익살스럽게 풀어냈어요. 어떤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상상해도 무난해요. 철학과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부조리극이라고 해서 난해하고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재미있고 묘한 매력이 있어요. 저 조차도 부조리한 걸요.(하하)"
  • ▲ 연극 '엔드게임' 공연 장면.ⓒ극단 76
    ▲ 연극 '엔드게임' 공연 장면.ⓒ극단 76
    지난해 9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이후 잠시 연극 무대를 떠났던 배우 하성광(49)이 1년여 만에 돌아왔다. 그것도 부조리극의 대표적인 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작품 '엔드게임'으로 말이다.

    22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알과핵에서 공연되는 '엔드게임'은 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후속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엔드게임'은 체스에서 왕을 잡기 직전 외치는 용어로 장기의 '장군'과 같은 의미다. 어떤 움직임으로 패배를 피할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의 상황을 암시한다.

    '엔드게임'의 프랑스어 원제목은 '승부의 종말'로 1957년 발표됐으나 베케트가 영어 제목으로 썼던 '엔드게임'을 공연 제목으로 결정했다. 원작의 번역은 오세곤 교수가 참여해 원작에서 느껴지는 어감과 다중적인 의미를 대본에 최대한 풀어 적었다.

    하성광은 "관객 200명이 보면 모두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잘 읽혔고 살가웠어요. 관계도 더 명확하죠. 제가 맡은 '햄' 역은 거친 고독남 같은 캐릭터에요. 나쁘게 표현하면 독재자와 비슷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베케트가 2차 대전 당시 피신 생활을 했어요. 전쟁에 대한 공포, 인간의 잔혹함, 상황의 어둠을 직접 몸으로 겪어냈죠. '엔드게임'은 고립된 곳과 밖의 열망, 탈출하는 게 나을까 여기에 있을까 등 대비되는 소재들이 많아요. 관객들이 불편하게 볼 수 있지만 몇 년 뒤에 생각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연극 '엔드게임'은 극단 76이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1976년 서울 신촌 골목의 작은 극장에서 시작한 극단 76은 기국서(67)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햄릿', '관객모독', '미아리 텍사스', '개', '용산 의자들', '철딱서니들' 등 시대를 성찰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작품을 소개하며 동시대의 관객들과 소통하고 있다.

    2006년 '리어왕', 2009년 '용산 의자들'에 이어 10년 만에 기국서 연출과 재회한 하성광은 "기 연출에게 선택을 당했죠. 독특하고 강한 연출이라 처음에는 겁도 났어요"라며 "연극은 연출과 배우만 만나서 하는 게 아니라 관객과 만나요. 늘 부담감이 존재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떨리는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 ▲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장면.ⓒ국립극단
    ▲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장면.ⓒ국립극단
    전남 진도 출신의 하성광은 1995년 데뷔해 '관객모독', '70분간의 연애', '인어도시', '이형사님 수사법', '풍찬노숙', '기름고래의 실종', '고모를 찾습니다'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그의 연기인생에서 2015년 초연된 고선웅 연출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기군상(紀君祥)이 쓴 중국 고전을 각색한 이 작품은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 '조씨고아'를 지켜내고 복수를 도모하는 필부 '정영'과 그 과정 속에서 희생한 의인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다. 정영 역의 하성광은 복수의 헛헛함을 가슴 절절하게 호연하며 제52회 동아연극상과 제8회 대한민국연극대상의 연기상을 수상했다.

    배우로서 '정영=하성광', 특정 이미지에 갇히는 게 답답할 법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책임감처럼 받아들이고 애정을 드러냈다. "얼마 전 이수역에서 지하철을 바꿔 타려고 내리는데 한 여성이 저를 따라오더니 대뜸 울기 시작했어요. '조씨고아 하셨던 하성광 배우시죠?'라면서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내 연기가 타인의 영혼을 건드릴 수 있구나.' 놀라웠고 책무가 깊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