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대장정 마지막날 北 核실험 등 '손학규 징크스' 새삼 화제
  • ▲ 손학규 전 대표가 지난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지난 2년여 간 자신의 강진 칩거 생활을 엮은 회고록 강진일기를 꺼내들어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손학규 전 대표가 지난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지난 2년여 간 자신의 강진 칩거 생활을 엮은 회고록 강진일기를 꺼내들어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산(山)도 최순실의 존재는 미처 몰랐던 것일까. "만덕산이 이제 내려가라 한다"며 2년여 만에 정계로 복귀한 손학규 전 대표가 정국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최순실 게이트'에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손학규 전 대표는 지난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87년 헌법체제가 만든 6공화국은 그 명운을 다했다"며, 개헌(改憲)을 화두로 던지기도 했다.

    개헌론을 주도해보려 한 의도로 읽히지만, 공교롭게도 나흘 뒤인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대통령 단임제로는 국정과제의 추진과 결실이 어렵고, 대외적으로 일관된 외교정책을 펼치기도 어렵다"며 "개헌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자신이 스스로 개헌론에 불을 붙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손학규 전 대표는 "정치의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고 짐짓 화답했지만,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점화한 개헌론의 불씨는 일단 꺼져버렸다. "대통령발(發) 개헌 논의는 종료됐음을 선언한다"는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의 말처럼 돼버린 것이다.

    정계 복귀와 민주당 전격 탈당 이후의 정치 행보와 관련해 대중의 이목이 집중돼야 하는데, 세간의 관심은 온통 '최순실 게이트'에 집중돼 있다. 사안의 성격상 원내(院內) 중심으로 정치 현안이 돌아갈 수밖에 없어, 원외(院外) 신분인 손학규 전 대표가 나설 공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뭐만 좀 해보려 하면 대형 이슈가 터져서 묻혀버린다"는 이른바 '손학규 징크스'는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양강 구도에 맞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노리던 손학규 전 대표는 2006년 '100일 민심 대장정'에 돌입했다.

    탄광에 들어간 뒤 얼굴이 까맣게 된 사진 등으로 대중의 시선을 어느 정도 끄는데 성공한 손학규 전 대표는 10월 9일, 민심 대장정의 화룡점정을 위해 마지막 종착지인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역에 운집한 지지자들은 '손학규 대통령'을 연호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손학규 전 대표가 부산발 서울행 KTX 안에 있는 동안 북한의 첫 핵실험 소식이 전해졌다. 자연히 손학규 전 대표의 민심 대장정 마무리 소식은 묻혔다. 손학규 전 대표조차 자신의 회고록에서 "청천벽력"이었다고 돌아볼 정도다.

    이듬해인 2007년 1월 16일 손학규 전 대표는 자신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 신년인사회를 열고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명박~박근혜와 함께 '한나라당 빅3'로 떠오르기 위한 승부수였다. 지지자 1000여 명이 운집했고, 이수성 전 국무총리·박관용 전 국회의장 등도 초빙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 ▲ 손학규 전 대표는 지난 2006년 100일 간의 민심대장정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올라오던 날, 북한의 첫 핵실험으로 인해 이슈에서 묻히는 징크스를 맛보기도 했다. 사진은 이듬해 7월부터 시작된 2차 민심대장정 때 손학규 전 대표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 손학규 전 대표는 지난 2006년 100일 간의 민심대장정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올라오던 날, 북한의 첫 핵실험으로 인해 이슈에서 묻히는 징크스를 맛보기도 했다. 사진은 이듬해 7월부터 시작된 2차 민심대장정 때 손학규 전 대표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그러나 같은날 불과 몇 시간 뒤, 당시 여론조사 수위권이었던 고건 전 국무총리가 전격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치권은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국회에서는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진행하려는 고건 전 총리와 "불출마 선언은 무효"라고 외치는 지지자들이 뒤엉켜 몸싸움이 벌어질 정도였다.

    결국 손학규 전 대표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대선 출정식'은 묻히고, 오히려 "(고건 전 총리는) 훌륭한 분인데, 앞으로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더 많을 것"이라는 '반응'이 더 많이 보도되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시간이 흘러 2010년 11월, 당시 정치권의 핵심 이슈는 임기 4년차로 들어서려 하는 이명박정부 관련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이었다.

    당시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던 손학규 전 대표는 100시간 동안 국회에서 농성을 벌였음에도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특검 및 국정조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외투쟁을 결단했다. 자신은 서울역 광장에서 농성에 돌입하고, 대대적인 대국민 서명운동을 병행한다는 내용이었다.

    22일 정오에 손학규 전 대표가 시작한 철야농성은 당초 29일까지 1주일간 계속될 예정이었다. 이후에는 광화문 1인 시위로 이어진다는 '민주대장정' 일정도 꼼꼼히 짜놨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하는 사건이 터졌다. 손학규 전 대표는 급히 서울역광장의 농성장을 정리하고 국회로 철수했다.

    게다가 정국이 급격히 '안보 정국'으로 선회하면서 "2006년 민심대장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기차 안에서 북한 핵실험 소식을 들었는데 (북핵과 미사일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하게 반대했다"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발언을 해야 했다. 오랫동안 공들였던 '민주대장정'이 완전히 이슈에서 사라진 것이다.

    손학규 전 대표 본인도 지난 26일 출연한 KBS라디오 〈공감토론〉에서 당혹스러운 심경의 일면을 노출했다.

    "블록버스터가 떠서 어떻게 하느냐"는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의 질문에, 손학규 전 대표는 "〈강진일기〉도 좀 많이 팔려야 하는데, 최순실 정국의 여파 속에서 내가 뭘 하겠나"라며 "정국이 최순실 정국으로 가고 있으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최순실 게이트가 우리(손학규 전 대표 측)에게는 재앙이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며 "정치적인 새판 짜기와 7공화국을 오히려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많이 있다"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