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長男' 李哲承 선생, 가다!

    “방죽(둑)이 安保라면 물은 自由이다. 방죽을 쌓고 무너지지 않게 지켜야 물이 고일 것이다.
    이 물을 이씨, 김씨, 장씨가 나눠서 농사도 짓고 공장도 돌리면 되지 않는가.”

    趙甲濟   

  •    한국 현대사의 가장 뛰어난 애국적 정치인 중 한 분인 李哲承(이철승ㆍ94) 전 신민당 총재가 27일 오전 3시에 별세했다.
    李 선생은, 대한민국건국단체총연합회 의장,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등으로 최근까지 활동했으나, 지난 중순 감기 증세로 입원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전주 출신인 李 선생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해방 이후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을 지내며 反託 애국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선친은 6·25 전란중 북한군에 학살당하였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전북 전주 지역에서 제3·4·5·8·9·10·1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5·16 이후엔 정치규제를 당해 해외 체류를 오래 하였다. 박정희 장군의 청렴성을 알아보고 친하게 지낸 사람이 당시 민주당 소장파의 대표였던 이철승 의원이었지만 박정희 주도의 군사혁명으로 손해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 되었다. 1970년에는 신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쟁을 벌였다.
     
      국회 부의장을 거쳐 1976년엔 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을 지냈고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쇄신법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중도통합론에 입각,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안보 면에선 협력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1985년 12대 총선 때 신민당 창당에 참여, 전주·완산에서 당선돼 7선 의원이 되었다. 반공민주주의 노선의 야당 운동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건국50주년기념사업회 회장(1998년),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2007~2009년) 등을 지냈다.
     
      그는 반탁(反託·신탁 통치 반대)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늘 강조하였다. “반탁운동은 우리 민족이 미국, 소련, 공산당 세력과 3대 1로 맞서 싸워 승리해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과 정통성을 만들어낸 제2의 독립운동”이라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대한민국의 체제가 북한보다 우월함이 입증된 것은 반탁운동이 내세웠던 ‘자주·독립·민주·통일’의 건국 이념이 정당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몇년 전 청년들 앞에서 강연을 한 이철승 선생은 한 학생의 질문을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철승 총재님을 평가한 내용중 과거 야당 총재(아마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칭)하실 때 유신(독재)정권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협조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李 선생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에게 협조했고, 나는 안보를 위해 초당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협조하였다."
      학생들은 탄성을 지르며 국가 원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日帝에 저항하고,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全과정에 주도적으로,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던 李哲承 선생은 꼭 자유통일을 보고 가셔야 했다. 政敵과 싸우면서도 유머와 교양을 잃지 않으셨던 그는 비록 대통령이 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인간으로선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長男'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 여사와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UN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다음달 2일. 故人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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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2011년 5월, 이철승 선생의 90壽 문집 출판기념회에서 필자가 축사를 한 내용인데, 미리 써놓은 蓋棺錄(개관록) 같아서 싣는다.
     
       <<90壽 생신을 맞아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의 출판기념회를 갖는 素石 李哲承 선생은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세대인 1920년대생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素石 선생은 이 위대한 세대의 선두에 서서 온몸을 던져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키우고, 가꾼 분이십니다.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戰亂과 가난을 이기기 위한 생존투쟁을 격렬하게 치른 이 세대 중 素石 선생은 아직도 살아계신 행운의 生殘者, 즉 살아남으신 분이십니다. 建國 대통령 李承晩 박사는 90세에 돌아가셨지만 素石 선생은 같은 90壽인데도 살아서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으니 참으로 多福한 생애라고 하겠습니다.
       한 기자가 소석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칠순이 넘으니 人生이 어떻게 보입니까? 더 잘 보입니까."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 거 많이 있지.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다. 자기가 뭐라더라도 先
       代가 간 길에서 또 가는 것이다. 아무리 기를 써도 나이가 되면 冥府를 향
       해서 터벅터벅 가는 것이다. 어거지로 인위적으로 버둥거려도 안되는 것이
       다. 이런 걸 많이 느끼지.”
      
       저에게 선생은 이런 분으로 인상 지어져 있습니다.
       <손이 두툼한 분, 경우가 밝으신 분, 성실하고 세심한 분, 先輩와 先代에 대한 존중심과 의리가 강한 분,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건강한 스포츠맨, 극히 상식적인 분, 언어감각이 탁월한 분, 천박하지 않는 육두문자의 제1인자, 부탁을 많이 하는 분(그래서 전화가 걸려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부탁이 모두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라 거절할 수 없도록 하는 분, 「모씨는 신문 가십만 읽지만 나는 社說 읽는 사람이야」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는 분, 「金모씨가 집권하면 난 지리산에 들어갈 거야」라고 말했다는 분, 그러나 지금은 서울 도심지를 누비면서 右翼 빨치산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분, 李承晩·金九·金性洙·趙炳玉·張勉·朴正熙·金泳三·金大中에 대하여 권위 있게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분, 그리하여 「大韓民國과 나」란 제목의 책을 쓸 수 있는 자격의 소유자가 되신 분이십니다.>
      
       李哲承 선생의 평생은 ‘反共자유투사’의 삶이었습니다. ‘반공투사’나 ‘자유투사’는 많으나 공산당과 싸워 자유를 지켜내고, 그 자유가 위협을 받을 때는 위대한 建國 대통령과 建設 대통령까지도 政敵으로 삼아 싸웠던 진정한 민주주의자로서의 ‘反共자유투사’는 희귀한 존재입니다.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는 반공은 안 된다, 동시에 반공과 안보를 무시하는 자유주의는 무책임하다는 신념이 선생의 생애와 회고록을 일관하고 있는 정신입니다. 素石 선생은 살벌한 한국 정치판에서 아주 드물게도 예의와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회고록에서 素石 선생이 남긴 유머와 명언들만 모아도 소책자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의 뇌리에 찍힌 名言이 하나 있습니다.
      
       “방죽(둑)이 安保라면 물은 自由이다. 방죽을 쌓고 무너지지 않게 지켜야 물이 고일 것이다. 이 물을 이씨, 김씨, 장씨가 나눠서 농사도 짓고 공장도 돌리면 되지 않는가.”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하던 야당 총재 시절에 한 말이기에 더욱 감명이 컸습니다. 야당 총재가 대통령 같은 말을 했으니 그때는 ‘사쿠라’라고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보의 둑을 지키는 데는 與野가 다를 수가 없다면서 ‘중도통합’의 기치를 걸고 묵묵히 외롭게 걸어갔던 素石 선생의 진정성을, 우리는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선생의 그 후 활동과 대조하여, 이제야 비로소 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중도를 定義하시기를, 안보를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의 한나라당 정권은 ‘중도’란 말을 ‘실용’이란 말과 짝짓기 하여, 실천과정에선 ‘좌도 우도 아닌 기회주의’, ‘善과 惡, 敵과 我軍 사이에서 중립’으로 둔갑시킨 점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석 선생님은 회고록을 쓰시면서 저에게 여러 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간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회고록은, 素石 선생의 생애를 일관한 생활 신조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소석 선생은 反託反共의 최일선에서 육탄으로 이승만 박사의 建國운동을 뒷받침하였지만 李 박사가 권위주의적으로 흐르자 이에 반대하여 야당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이승만 박사를 폄하하려는 세력을 상대로 열심히 싸우고 계십니다. 1950년대 민주당 의원이던 이철승 선생은 청렴강직한 박정희 장군과 친숙하게 지낸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셨습니다만 5.16 군사혁명으로 가장 오랫동안 피해를 본 분이기도 합니다. 야당총재 시절 온건하고 합리적 對與투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작업에 협조한 것이 죄가 되어 그 후의 정치역정이 성공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분임에도 박정희를 ‘현대사의 巨人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담담하게 평가합니다. 반면에 한때의 동지였던 兩金씨에 대하여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세속적 利害관계나 정치적 계산으로만 본다면 소석 선생의 이런 행동과 생각은 得失 타산이 영 맞지 않습니다. 선생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이런 오기와 지조에 대하여 自評하기를 "결국 나는 한국적 현실에 맞는 정치인이 못 되었고, 지조와 의리만을 지켰기 때문에 훗날 40대 기수 가운데서 나만 대통령을 못한 셈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회고록을 다 읽고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석 선생의 90생애를 관통한 삶의 공식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한민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즉 국가이념과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다른 사람을 평하고 노선을 선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회고록의 제목인 ‘대한민국과 나’는 素石 이철승 선생의 묘비명에 새겨야 할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석 선생은 단순히 長壽하셨다고 축하를 받을 분이 아닙니다. 아직도 건강한 심신으로, 퇴역을 모르는 현역으로 맞는 90수이기에 더욱 오늘이 빛나는 것입니다. 수년 전 연말 반탁기념일 행사 때 素石 선생이 육두문자를 쓰신 적이 있었습니다. 다수 국민들을 향하여 '별놈의 보수', 헌법을 가리켜 '그놈의 헌법', 국군을 '인생 썩히는 곳',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老兵들을 향하여 '미국 바짓가랭이 잡고 늘어진다'고 상욕을 한 이를 가리켜 그때 이철승 총재께선 이렇게 일갈 하셨습니다.
       "조국의 역사도 모르는 상놈의 정권이고 장돌뱅이 대통령이다."
       젊은 사람들이나 후배들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소석 선생이 이처럼 화를 내신 것은 그 사람이 미워서라기보다는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이 묻어 있는 대한민국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 소석 선생이 건강을 유지하시는 한 이유도 아마 잔인한 김정일을 동정하고 동정 받아야 할 북한동포들에게 냉담한 위선자들에 대한 분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석 선생은 1988년 총선을 끝으로 政界에서 은퇴하셨는데, 이 분의 황금기는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