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없는 다양성, 혼란만 가중시켜…옳은 역사관에 대한 진지한 성찰 필요해
  • ▲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철인정치'를 정치체제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 획일화와 다양성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키백과
    ▲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철인정치'를 정치체제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 획일화와 다양성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키백과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국가〉에서 자신의 이상향으로 철인통치(哲人統治)를 내세웠다. 그는 당시 현자로 대표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서 아테네 민주정의 폐해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어쩌면 민주주의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확신이 아닐까 한다.

    비단 아테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늘 옳았던 것은 아니었다. 실패한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 됐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혼란했던 상황도 그랬다. '길로틴'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공포정치는 인민재판이 주를 이뤘고, 결국 프랑스는 나폴레옹 왕정으로 되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결국 민주주의로 인해 도출된 결론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정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독재, 서로 완전히 달라보이는 두 가지 정치체제는 모두 어디까지나 올바른 결정을 하는 방법론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올바른 결정'이지 올바른 '방법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세종대왕을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 뜻을 펼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우리가 그를 성군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조선의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 지도자이자 군주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서도, 다른 왕조에서도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은 왕들은 많다. 

    혹자는 왕조 시대였으니 평가가 달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왕조시대 이후에도 곳곳에서 비슷한 예시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도 언론탄압과 대통령제 강화 등을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남북전쟁'을 불사하며 미국 내의 노예에 자유를 안겨다 준 링컨을 위대한 정치지도자로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반대를 무릅쓴 소신을 높이 산다. '노예해방은 투표에 부칠 사안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던 그 정신을 미국인들은 자랑스러워 한다. 영국 의회 정치의 폐해를 맛봤던 미국인들이 대통령제를 택해 의회를 거부할 수 있도록 만든 이유도 민주주의가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링컨은 이에 정확하게 부합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얼마전 생을 마감한 리콴유도 그랬다. 그는 싱가폴을 강한 법치국가로 만들었고, 싱가폴 국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독재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독재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반대할 생각이다. 권력을 잡은 후 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예시는 많다. 특히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독재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 쏟아지는 비난도 그런 이유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이 마땅히 살펴야 할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 자유를 억압하고 굶주림을 주었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가 독재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경제적 번영을 주었다면 우리는 그를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다시 역사 교과서 문제로 돌아가보자. '독재'를 제대로 배움으로써 학생들이 진정 깨우쳐야 할 교훈은 민주주의에 의한 결정이 늘 절대선이라는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주의 국가'다. '민주'라는 단어 앞에 '자유'가 전제된다. 민주가 '전체'를 말한다면 '자유'는 개인의 그것을 가리킨다. 전체에 의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결정은 자유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수의 뜻(민주)을 우선시 하다 생기는 '개인의 자유'의 피해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겪게 된다는 것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채택하건, 독재를 따르건, '올바른 결정'만이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절대선'이라는 믿음이다. 정치체제와 관계 없이 국가 속의 각 개인은 국가를 이끄는 '올바른 결정'이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바른 의견을 개진해야만 그 나라의 정치가 발전할 수 있다.

    최근에 우리가 맞딱뜨린 역사교과서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획일화된 교육을 통해 독재정권으로 회귀하려 한다는 야당의 주장과, 좌편향 교육을 올바르게 하려고 한다는 여당의 주장을 보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다양성과 자유를 우선시 하는 검정제로 가는 것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앞서 말한 독재와 민주주의처럼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느냐, 검정으로 하느냐의 문제도 결국 더욱 올바른 것을 배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정이냐 검정이냐라는 방법론적 논쟁이 마치 역사교과서 제도 논쟁의 본질적 문제인 것 처럼 말해서는 곤란하다.

    민주주의는 좋은 방법론이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좋은 주장이다. 그러나 올바른 결정에 대한 기준과 철학없이 무작정 다양성만 앞세우면 저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면서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랬고, 프랑스의 공포정치와 나찌즘이 그랬다.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지 못해 무너진 수많은 국가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려면 그 전에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각자가 사실에 입각한 나름대로 올바른 의견들을 말할 준비가 돼야 한다.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선행되지 않으면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하더라도 다 무의미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방법론에 매몰돼 진짜 집중해야 할 부분을 놓친 채 공허한 주장을 주고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