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랑회 연구발표회, "독립운동은 남자만 했나?" 편파적 보훈에 경고장
  • <대한민국 사랑회 /연구발표회: 하와이 한국여성들의 독립운동>

    "조국이 버린 하와이 여인들! 독립유공자 290명 발굴"

    이덕희 하와이 이민연구소장, 7개 여성단체의 '국권회복운동' 생생한 자료 공개
  •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이 여성 독립운동 연구결과를 발교하고 있다.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이 여성 독립운동 연구결과를 발교하고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정치중심 남성중심으로 반쪽짜리입니다. 이승만 안창호 김구등 남성위주로 써 온 역사에 한국 여성들의 독립운동사를 발굴 합성하여, 완전한 현대사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하와이 이민사의 권위 이덕희(李德姬, 74,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씨는 4월 30일 대한민국 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발표회에서 대한민국이 광복70년간 외면해온 하와이 여성 광복투쟁의 생생한 기록 <하와이 여성 독립운동사>를 공개하였다.
    건국이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상받은 사람은 모두 1만3천930명, 이중에 미주지역은 겨우 153명이고 하와이 여성은 4명뿐이다. 대부분 중국, 러시아등 대륙중심, 무장투쟁 중심, 임시정부 중심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좌파정권시절 사회주의(공산당) 세력까지 독립유공자에 포함시키면서도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부분인 미주지역 독립운동은 무시되어 왔다.
    “나는 여성운동가 아닙니다. 이것은 남녀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하와이 여성들의 국권회복운동이야말로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무대였기 때문이지요. 그분들의 명단을 찾아내 가져왔습니다.”
    이 소장은 이번에 당시 기록들을 뒤지고 유족들을 만나는등 동분서주하며 하와이 지역에서 36년간(1909~1945)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7개 여성단체의 활동 내역과 290명의 유공자 명단을 처음으로 발굴해 냈다.
    특히 1910년대 '사진 신부'들로 건너간 여성들이 광복투쟁의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이들 여성단체들이 각종사업과 떡 김치등 온갖 행상까지 하면서 의연금을 모금하여 미주와 중국등 독립운동에 지원한 금액만도 450만달러(현재가치)에 달한다는 사연들은 눈물 겹다.
  •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이 여성 독립운동 연구결과를 발교하고 있다.
이덕희 소장이 발표한 <하와이 여성 독립 유공자 1909~1945>에서 주요 활등을 살펴보자.
▶하와이 여성독립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점되리라는 위기의식에서 망국전에 시작되었다.
구한말 1902년 12월 처음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이민이 시작된 이래 하와이에 최초의 여성단체 <신명 부인회>가 조직된 것은 한일병탄 2년 전인 1908년 전후였다.
신명부인회는 1909년 송병준 이완용과 일본 왕에게 독립촉구 전보를 보내면서 7천7백달러(현재가치)를 모금하였고, 안중근 의사 재판 경비로 6만7천달러 의연금을 모았다.

  • ▲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가 모금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보낸 의연금 5백원 영수증.
    ▲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가 모금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보낸 의연금 5백원 영수증.
    ▶1909년 4월에는 <부인 교육회>가 조직되고, 목적이 ‘국권 광복의 구국운동’임을 선언한다.
    [한국 공민의 1천만 여자의 속박을 끌러 국가의 원기를 기르면 이민족의 침략을 항거하여 비경에 빠진 국민을 가히 광제할지니...] 하와이 한인들의 진로는 국권 회복이 두 어깨에 담부한 책임이므로 <부인 교육회> 역시 ”남자와의 경쟁뿐 아니라 문명 본원을 발전“이라고 했다.

    ▶1913년 4월 19일 <신명 부인회>등 4개 단체가 <대한 부인회>로 통합 출범한다.
    이 즈음 이승만 박사가 세운 한인중앙학교를 중심으로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이 본격화 한다.특히 <대한 부인회>는 회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사업을 벌여 재정을 충당하는 적극적 방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재봉일로 옷을 만들어 팔고 간도 동포에게 재난 구제금까지 보냈다.

  • ▲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가 모금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보낸 의연금 5백원 영수증.

    ▶1919년 3.1독립만세 소식에 여성대표 41명이 모여 <대한부인 구제회>를 결성한다.
    회원이 300여명인 이 단체는 “우리 대한 부녀들아, 때가 왔도다. 나라 위하여 피 흘리고 죽고 갇히고 고생하는 동족을 구제할 것...”이란 ‘취지서’를 발표하고, 국권을 찾으면 ‘대한민국 적십자회’가 될 것임을 천명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를 컬러 포스터를 제작 판매하여 3.1운동 애국지사 가족들과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하여 본국 재난에도 송금하였다. 호놀루루에서 벌어지는 국제행사에 한복과 태극기로 빠짐없이 참가하였다.
    <대한부인구제회>는 김치, 생선, 무말랭이, 달걀, 떡 등 온갖 행상을 하면서 재정확보와 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3.1절 공연’등 연극을 만들어 순회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한인휘장(Korean badge)'를 제작 판매하고, ’미국 승리 기원‘한다는 ’빅토리 배지‘도 미국 본토까지 판매하였다. 

    ▶지역출신 여성단체로는 유일하게 <영남 부인회>가 1928년 등장하였다. 어느 단체보다 의연금 모금실적이 월등하여 “독립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63년말까지 활동하였다.

  • ▲ 1910년대 '사진 결혼'으로 하와이에 이민간 '사진 신부'들. 하와이 여성독립운동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 1910년대 '사진 결혼'으로 하와이에 이민간 '사진 신부'들. 하와이 여성독립운동의 주인공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