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本은 만만하고, 中國은 두려운가?

    일본이 끌고 간 정신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비분강개 하면서
    중국이 수백 년간 끌고간 수많은 공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필재   
  • 壬辰倭亂 당시 중국은 왜 조선이 중국처럼 왕의 명칭을 건방지게 조종(朝宗)이라 하느냐며
    책망을 했다고 한다. 그냥 ‘조선국왕’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이에 宣祖가 답신을 보냈다.

    《선왕들의 묘호를 조(祖)라고 호칭한 일로 말하면 소방은 바다 밖의 궁벽한 나라로서 삼국(三國) 이래로 예의(禮義)와 명호(名號)는 중국을 본받아 비슷한 것이 많이 있었는데, 우선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에 이르러 기강에 위반된 모든 것을 일체 바로잡고 사소한 절목(節目)까지도 모두 신중히 하여 상하(上下)가 뚜렷한 한계를 만들고 자손에게 전하여 금석(金石)같이 지켜왔습니다.

    다만 묘호의 칭호만은 신라와 고려 시대부터 이러한 잘못이 있었으니, 대개 신민(臣民)들이 전일의 잘못을 승습(承襲)하여 외람되게 존칭을 더하고 서로 전수하며 고칠 줄 모른 것입니다. 이는 실로 무지 망작(無知妄作)한 죄이니, 이로 인하여 죄를 받는다면 신이 비록 만번 죽더라도 참으로 할 말이 없지만 만약 참람한 일이라고 한다면 진정이 아닌 말입니다.

    소방이 선신 강헌왕 이래로 충심으로 황제를 섬기는데 예(禮)와 성(誠)을 다하여 율(律)은 《대명률(大明律)》을 사용하였고, 책력은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였으며, 복색(服色)과 예의에 있어서도 모두 사모하고 숭상하였습니다. 천사(天使)가 올 때는 영조의(迎詔儀)가 있고 배신(陪臣)이 중국에 갈 때에는 배표례(拜表禮)가 있으며 정조(正朝)·동지(冬至)·성절(聖節)에는 망궐례(望闕禮)가 있는데, 모두 경건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엄숙하게 일을 거행하여 한결같이 천위(天威)를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의 문서와 공사간(公私間)의 간독(簡牘)까지도 모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상용 격식으로 익혀왔으니, 이는 떳떳한 법이고 바른 의리로서 우주를 지탱하여 안과 밖이 다름이 없고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모두 아는 바입니다. 어찌 감히 구구(區區)한 하나의 묘호로 참상(僭上)의 법에 스스로 빠지겠습니까.

    더구나 현재 천조가 소방 보기를 일가(一家)와 같이 여기고 국승(國乘)과 패설(稗說) 같은 소방의 서적(書籍)이 중국에 많이 들어가서 소방의 사적(事迹)을 환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7년 간에 대소(大小) 아문(衙門) 및 각 진영의 장관(將官) 및 왕래하는 군사와 팔고 사는 상인들이 줄을 이어 안과 밖이 구분이 없으니, 소방에서 하는 바를 조금도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21일(계유) 2번째기사

    일본은 한반도를 36년간 통치했다. 여기에 대한 연구는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이는 순서가 뒤 바뀌었다. 36년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친일파 명단도 만들고
    극일을 위해 집념을 가지고 매달리면서도 오백 년 동안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했던 중국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판도 없고 연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끌고 간 정신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비분강개 하면서 중국이 수백 년간 끌고간 수많은 공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녀란 중국에 바쳐진 조선의 처녀들이다. 중국은 걸핏하면 말 몇 마리와 공녀 몇 명을 보내라, 은 얼마, 호피 얼마, 산삼 얼마를 보내라, 고자도 몇 명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인데 기이하다.

    우리나라가 사실상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말하기를 모두 꺼린다.

    삼국시대 百濟 멸망 이후 의자왕을 비롯한 1만2천8백7명의 百濟人들이 唐나라의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갔다. 高句麗 멸망 이후 보장왕과 그의 가족, 백성 3만8천3백호(약 20만 명)의 주민들이 唐나라로 끌려갔다. 이들은 대부분 노예 등 사회 하층민으로 흡수되어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高麗 때는 몽골의 침입으로 20만6천8백여 명의 포로가 잡혀갔다.
      
    朝鮮時代에는 병자호란으로 1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젊은 여자들의 경우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다만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냥녀’라며 치욕을 감수해야했다.
    당시 靑은 납치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 양반의 부녀들을 많이 잡아갔다. 속가(贖價)도 처음에는 1인당 25~30냥이었으나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1,500냥 까지 했다. 이 때문에 딸과 며느리를 찾아오기 위한 재원 마련이 어려웠고 개인, 국가의 재정도 파탄을 가져왔다.
      
    과거사가 문제라면 한국은 일본에게 위안부(慰安婦) 문제를 제기하는 것 만큼이나
    중국에 대해서도 역대 한반도 침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지 않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朝鮮과 다르기 때문에 또 다시 나라를 주변국가에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은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核무장한 북한은 대한민국을 인질로 삼고 있다.

    歷史는 늘 변곡점(變曲點)을 찍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대한 역사의 變曲點에 있다.
    우리가 처한 국가안보 상황이 진정 복잡하고, 우리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 되고 있다. 국제 정세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냉철한 戰略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장밋빛 미래를 말하고 싶지만 국제정치란 본래 더럽고, 추악한 것이다.
    어떠한 善意도 장래 동북아시아에서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발생하게 될 熱戰의 양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