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로고

"아, 태산아" 필라델피아 교민들의 '이승만 사랑'

시장경제신문 76호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64> 이승만 아들 묘지를 찾아서

입력 2014-11-21 09:21 수정 2018-11-23 10:11

시장경제신문 76호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64>

“아, 태산아” 필라델피아 공원의 7세소년 묘비...태극기는 누가?
"건국영웅 이승만은 자식 복이 없었다"

뉴욕의 가을, 센트럴 파크에서 롱아일랜드까지 우거진 숲들은 아름답게 불타고 있었다.
110년전 30세 이승만이 처음 해외 독립운동을 시작한 곳 뉴욕,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원조를 청했던 오이스터 베이 대통령 별장은 수리중이라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금은 국가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여행은 미국 동부지역 동포들이 <대한민국 건국절 제정 촉구> 대회를 열고
 ‘이승만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뉴욕에서 뉴저지, 필라델피아등 3곳에서 강연했다.
바로 이승만의 독립운동 코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엔 통째로 빼버린 
이승만과 미주동포의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여정이었다.
 “왜 한국 역사교과서를 바로 잡지 않느냐?”는 분노가 터졌다.
“창피해서 못 살겠다. 생일도 모르는 나라가 무슨 경제대국이냐? 건국절을 빨리 만들라”며
미주 동포들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승만 역사 살리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필라델피아에 갔던 날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1975년 미국 유학을 떠나와 36년간 목회활동을 해온 황준석 목사는
 “강연하시기 전에 꼭 찾아 봐야할 곳이 있다”며 일행을 이끌었다.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공원, 빛 고운 단풍잎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술길 구석에
크고 작은 묘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동묘지, 온통 짙푸른 잔디 밭이다.
그 한 구석 조그만 묘석엔 태극기와 성조기가 꽂혀 있다.
‘RHEE’라는 큰 글자 아래 ‘TASANAH 1899~1906’이 새겨져있는 무덤아닌 무덤,
 바로 이승만의 유일한 혈육이자 아들 태산(아명 봉수)이 묻혀있는 무덤,
누군가 심어 놓은 빨간 장미꽃잎들이 빗방울에 떨고 있었다.
영문 ‘태사나’는 이승만이 “태산아”라고 부르던 것을 들었던 미국 여인이 그대로 옮긴 것.

▲ 1904년 11월 미국에 밀사로 건너가기 전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부인 박씨, 이승만, 모자쓴 아들 태산(봉수), 아버지 이경선, 누님, 뒤에 어린이는 누님 아들.


▶세상에 태어나 7년 밖에 살지 못한 어린이, 이승만의 아들이 왜 필라델피아에 묻혀있을까.  
독립운동 때문이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들어간 다음해 태어난 아들, 독립협회다 신문발간이다 만민공동회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20대청년 이승만은 그후 아이를 더 낳지 못한다.
6년 세월 감옥살이 끝에 미국 유학을 떠난 이승만에겐 “가족보다 국가독립” 뿐이었다. 
1905년 “조선은 일본 보호국”으로 내준 루즈벨트에게 딱지맞은 뒤,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편입하여 학업과 독립강연으로 동분서주하였다. 고국에 남은 부인 박씨는 늙은 시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생활에 쪼들리다가 급기야 테산을 미국 이승만에게 보내 버린다.
괄괄한 성격의 박씨 부인이 시아버지 허락도 없이 7대독자를 미국에 보낸 사연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노발대발한 시아버지 이경선 옹은 뒷날 이승만에게 "저 년을 니 처로 여긴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극언을 하였다고 한다. 

▲ 1905년 6월4일자 워싱턴타임즈 기사.

▶이승만은 남감하였다.
교회 강연으로 생활비를 벌랴 대학 공부하랴 눈코 뜰 새 없는 그에게
어린 아들 보육문제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어쩔 수 없이 친분 있는 신문에 광고까지 내야 했다.
 1905년 6월 4일자 《워싱턴 타임스》에 실린 기사는 이승만을 도우려는 신문사의 작품,
 ‘아버지의 학업이 끝날 때까지 이 아이를 맡아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WANTED A home in a Christian family for little Taisanah Rhee”의 기사를 신문사 측에서
 이승만(Sung Mahn Rhee/나중에 Syngman Rhee로 바꿈)을 위해 일요판 신문에 내 준 것. 
태산은 기독교인 보이드 부인에게 맡겨졌고 그녀는 다시 태산을 시립보육원에 맡겼다.
그리고 1년도 안돼 죽고 말았다. 당시엔 무서운 전염병 디프테라아에 걸렸던 것이다.
아들이 죽는 시간에도 교회 강연을 하던 이승만은 전보를 받고 달려갔지만 때는 늦었다.
6대독자 아버지가 7대독자 아들을 잃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이승만은 자서전 초록에서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고 딱 한줄 썼지만
그날 일기에는 아들이 죽어간 과정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 1961년 양자로 입적한 이인수(가운데)를 맞아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와 포옹하고 있다.(하와이에서)

▶자식 복이 지지리도 없는 남자, 본처 박씨는 1912년 미국 망명때 이혼했고
59세때 뒤늦게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와 재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건국 후 대통령 관저 경무대서 “당신은 다 좋은데 아이를 생산 못하는 게 흠이야.”
가끔 생각난 듯 중얼거리던 이승만은 이기붕(당시 부통령)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으나
4.19때 권총으로 가족을 쏘고 자살함으로써 허사가 되었다.
그후 하와이에 머물면서 이씨 종친회 주선으로 이인수씨를 양자로 맞이 하였고 (1961)
 4년후 90세로 눈을 감았다. 이인수씨 부부는 지금 이화장을 지키고 있다.

▲ 필라델피아 공원묘지에서 태산의 묘를 성묘하는 교민들. 왼쪽이 황준석 목사, 오른쪽 끝이 이종숙 프신스턴 한국학교 교장.


▶“저희가 할 일이지요. 누가 이 묘지를 돌보겠습니까?”
태산의 묘비를 처음 돌보기 시작한 황 목사는 고아처럼 혼자 지내다가 스러진 어린 소년의 삶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고 했다. 이승만에 대한 존경을 그 아들의 묘지에 쏟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이승만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이 건국대통령도 잊어버리고 건국절도 안지키니
“이 묘지는 버려진 상태”라며 “우리라도 성묘 하고, 건국 영웅의 위업도 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필라델피아는 조지 워싱턴등 미국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선언을 한 곳,
 3.1운동때 이승만이 같은 장소(리틀 시어터: Little Theater)에서 독립선언과
독립 행진을 벌였던 유서깊은 곳이다. 이런 사실도 교과서엔 안나온다.
“필라델피아 교민들이 힘을 합쳐 그 독립행사를 꼭 재현해보고 싶다”는 황 목사,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이승만을 찾는 듯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인보길 기자]





뉴데일리 댓글 운영정책

뉴데일리 경제

대전·충청·세종

메인페이지가 로드됩니다.

로고

뉴데일리TV

칼럼

특종

미디어비평

제약·의료·바이오

선진 한국의 내일을 여는 모임. 한국 선진화 포럼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