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기념사업회 주관…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참석
  • ▲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49주기 추모식이 열린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49주기 추모식이 열린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2014년 7월19일, 49년 전 오늘 하와이의 한 요양원에서 90세의 이승만 박사는 숨을 거뒀다.

    독재와 부정에 항거한 4.19 학생 민주화 운동으로 하야한 이승만은 자신의 고향, 황해도 평산에는 분단된 조국의 아픈 현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30여 년 이상 독립운동을 했던 제2의 고향, 하와이로 떠난 이승만은 결국 통일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2014년 대한민국에는 독재자는 사라졌고 부정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승만이 그토록 바라던 통일은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 부끄러운 반쪽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승만의 49주기 추모식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운 리더 이승만을 단순히 추모(追慕)하지 못하고 추도(追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이날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을 찾은 500여 명의 국민들은 얼굴은 어두웠다. 

  • ▲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49주기 추모식을 찾은 박승춘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49주기 추모식을 찾은 박승춘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독립협회의 지도자로서, 미주 지역 항일운동의 길잡이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역량을 결집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이승만 박사. 광복 이후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서도 꿋꿋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대한민국의 기초를 굳건히 다진 이승만 박사. 우리 역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이승만 박사는 6.25남침전쟁으로 인한 국가 위기 시에는 탁월한 외교력으로 유엔군 파병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세계의 지원과 지지를 이끌어내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지켰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은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 북한은 아직도 끊임없이 도발 위협을 가하여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휴전을 완강히 반대하면서 온전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외치셨던 이승만 박사의 통찰력이 옳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라고 추모사를 했다. 

  • ▲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49주기 추모식을 주관한 이기수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49주기 추모식을 주관한 이기수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가 주관한 이날 추모식에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 양자 이인수 박사, 정동제일교회 송기성 목사 등 500 여명의 국민들이 참석했다. 

    ◇이승만 박사 공적

    우남 이승만 박사(1875. 3. 26 ~ 1965. 7. 19)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으며,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해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 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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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하여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한다”라는 전단을 배포해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때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해 국제 외교의 중요성과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 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한 뒤 귀국하였고,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ㆍ태평양' 신문을 발간하며 박용만ㆍ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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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해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우남 이승만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윤희성 기자 ndy@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