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19일 오전 10시 30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서 거행
  •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49주기 추도식'이 19일오전 10시 30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각계 인사, 기념사업회원, 유족, 학생 및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고인의 말씀(육성 녹음), 기념사업회장의 인사말,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과 정원식 前 국무총리의 추모사에 이어 추모공연, 분향 및 이인수 박사의 유족 인사 등으로 진행된다.

    ◇이승만 박사 공적

    우남 이승만 박사(1875. 3. 26 ~ 1965. 7. 19)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으며,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해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 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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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데일리DB

    또한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하여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한다”라는 전단을 배포해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때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해 국제 외교의 중요성과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 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한 뒤 귀국하였고,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ㆍ태평양' 신문을 발간하며 박용만ㆍ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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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해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우남 이승만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