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희생자심사 부실좌익폭도 제외..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만 추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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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는 사망했다.

    제주 4.3사건은 좌익들의 폭동인데도 현 정부와 국회에서 좌익폭동의 날인 4월 3일을 추모일로 국회를 통과시켰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국군과 경찰이 13,90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관들은 전원 사임해야 할 것이며, 특히 국방부장관과 행정안정부장관, 국정원장은 즉시 사임해야 한다.

    2014년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4.3폭동을 추념일로 결정하고, 3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명`공포하였다. 희생자를 가짜로 심사하여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회의 장관들과 국민들이 폭도사령관 김의봉 이하 2,500여명의 좌익 폭도들 앞에 머리 숙여 추념한다면 그 나라는 대한민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진압군이 폭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도와 양민을 구분할 수 없어 억울하게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을 추모하는 날은 1948년 12월 10일로 별도로 국가에서 추념일로 한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폭도를 제외한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과 진압 때 사망한 경찰과 국군과 우익을 같이 추모하는 날로 정해야 한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가짜보고서이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제주도민이 많이 죽게 된 원인인 1948년 10월 24일 제2대 폭도사령관인 이덕구가 대한민국에 선전포고한 내용을 싹 빼버렸다.

    2) 1948년 11월 2일 이덕구 이하 폭도들이 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하루에 중대장 이하 21명이 전사한 것도 싹 빼버렸다.

    3) 국군이 180여명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7번 정도 있는 것도 싹 빼버렸다.

    이 모든 것은 폭동(내란)을 무장봉기라고 하기 위한 것이다. 제주도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11월 17일 계엄령을 내려 국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제주도민 13,900여명을 학살하였다고 하기 위한 것이다.

    제주4.3폭동을 추념일로 결정한 것은 가짜보고서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2014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제주4.3사건이 폭동이 아니고 무장봉기라고 하였는데 이를 대통령이 합법화 시켜준 것이다. 어찌 대한민국 대통령이 좌익들이 폭동을 일으킨 날을 합법화시켜 줄 수 있는가!

     

    제주4.3 희생자심사는 가짜이다.

    1) 제주4.3 특별법에는 심사규정이 없다. 그래서 제주4.3 심사위원들이 규정을 만들었다. 입법기관이 아닌 심사위원들이 입법을 하여 심사하였기 때문에, 13,900여명의 4.3사건 희생자결정은 모두 불량위패이므로 모두 철거해야 한다.

    2) 심사위원들이 심사규정을 결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2001년 9월 헌법재판소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자기네들이 규정을 만들어놓고 그 법을 지키지 않아 13,900여명의 4.3희생자결정은 모두 불량위패이기 때문에 철거해야 한다.

    3) 4.3희생자로 결정되려면 보증인 2명 이상이 해야 하는데 많은 수가 보증인이 없다.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하였다면 보증인 없는 사람을 희생자로 결정할 수 있는가?
     이는 제주4.3희생자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심사 대상자별로 ‘인정’‘불인정’‘보류’로 구분하여 심사를 결정한 후 심사결과보고서에 기명날인하고 전체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심사자의 기명날인한 심사보고서가 없어 13,900여명의 희생자결정은 모두 불량위패이기 때문에 철거해야 한다.

    4) 군법회의와 일반재판을 받은 3,800명 중에서 2,500명을 희생자로 결정하였다. 심사위원들이 사법부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이는 모두 불법이다. 그러므로 2,500명은 불량위패이므로 철거해야 한다.

    2014년 3월 24일 제주4.3 좌익폭동을 추념일로 결정한 현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인가? 인민공화국 정부인가?

  • ▲ 제주4.3사건 바로잡기 대책위원회 대표 이선교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제주4.3사건 바로잡기 대책위원회 대표 이선교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다음은 [박근혜 정부는 좌익 폭도들 앞에 머리 숙일 것인가] 칼럼 중 일부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등 400명의 좌익 폭도들은 무장을 하고 대한민국 건국 5.10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제주에 있는 11개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고일수 순경의 목을 잘라 죽이고, 김장하 순경 부부를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선우중태 순경을 죽이고, 우익의 자녀인 애월면 구엄마을 문정자(10세) 문숙자(14세) 소녀들을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문기찬(33세), 문창순(34세)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를 무효 시켰다.

    전국에서 제주도에서만 2개 구가 무효가 됐다. 이후 제주4.3 폭도대장 김달삼 등 5명은 1948년 8월 25일 북한 선거에 제주도민 52,000여명이 투표한 용지를 갖고 북한 해주에서 개최된 인민대회에 제주 대표로 참석해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제주4.3(좌익) 폭동의 진압 과정을 보면 먼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제주 경찰이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찰만으로는 부족해 제주 주둔 9연대에 진압명령을 내리고 부산에 있는 5연대 1개 대대와 수원 11연대 1개 대대를 제주도에 출동시켜 진압을 하게 됐다.

    1948년 7월 20일 경부터는 폭도들이 경찰을 공격하지도 않고 양민을 죽이는 일이 없어 진압이 완료된 줄 알고 9연대만 남고 육지에서 제주로 출동한 국군과 경찰은 육지로 원대복귀 했다.

    1948년 8월 말까지 경찰 53명, 우익 235명이 죽고, 폭도 사망자는 15명 이었다.
    이것으로 끝났으면 제주도는 많은 희생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4월 3일 폭동을 일으킨 폭도대장 김달삼이 북한으로 가고, 이덕구가 제2대 폭도사령관이 되면서 제주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다시 폭동이 시작됐다.

    1948년 9월 15일부터 이덕구 등 폭도들은 경찰과 우익을 죽이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는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은 내란이다.

    1948년 11월 3일 이덕구 이하 폭도들이 9연대 1개 중대를 대낮에 공격해 하루에 중대장 이하 21명이 전사했다.

    폭도들이 국군을 공격함으로 국군과 폭도들의 전투가 격해져 제주도민이 많이 죽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많은 장병들이 전사하자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1949년 1월까지 제주도에서 폭도와 국군과 중대급 전투가 7번 정도 있었다.

    경찰 153명과 국군 180여명, 우익 1,600여명, 합 2,000여명이 죽었다.
    폭도도 많이 죽고, 협조자도 많이 죽었지만 만일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지 않았으면 제주도는 공산화가 됐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에서 폭동을 진압해 현재 제주도가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 좌익 폭동에 대해 국군과 경찰을 학살자로 만들기 위해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진실을 날조했다.

    2003년 10월 15일 확정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2대 폭도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에 선전포고한 내용이 없다. 폭도들이 국군을 공격한 내용들도 싹 빼버렸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무 잘못이 없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내려 제주도민 13,000여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제주4.3사건을 무장봉기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사건의 책임도 이승만 정부, 송요찬 연대장 등 국군과 경찰과 미군이 져야 한다고 했다.

    제주4.3 폭동의 책임은 폭동을 일으킨 김달삼, 이덕구, 김의봉 등 좌익 폭도들에게 있지 어찌 대한민국에 있는가.

    2007년 3월 15일 제주4.3사건 희생자심사를 해서 현재 13,900여명이라고 했는데, 제주4.3사건 희생자심사위원들은 희생자 심사를 하지도 않고 희생자신청을 하기만 하면 모두 희생자로 했다.

    여기에는 4.3사건과 관련이 없는 자가 있고, 북한과 일본에 살고 있는 자가 있고, 경찰과 국군과 우익을 죽인 3대 폭도사령관 김의봉 외 수백 명의 폭도(살인자)가 있다.

    △1948년 10월 28일 9연대 강의현 소위 외 사병 80명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사전 발각되어 처단  △1948년 11월 3일 국군과 폭도와 전투에서 국군 21명 전사, 폭도 100명 사살 △1949년 1월 1일 새벽 폭도가 국군 2연대 3대대를 공격하여 국군 고병선 중위 외 10명 전사, 폭도 10명 사살  △1949년 1월 6일 새벽3시 폭도들이 명덕리에 있는 함병선 2연대 본부를 공격, 폭도 153명 사살 △1949년 1월 11일 밤중에 폭도들 국군 2연대 2대대를 공격, 국군 문석중 상사 외 4명 전사, 폭도 96명 사살 △1949년 1월 6일 월평리전투에서 국군 3명 전사, 폭도 30명 사살 △1949년 2월 15일 남원면 산록전투에서 폭도 160명 사살 △1949년 3월 중순 녹하악 전투에서 폭도 178명 사살 △1949년 3월 9일 노루오름 전투에서 국군 36명 전사.

    국군과 폭도와의 전투를 간단하게 요약해도 국군과 전투하다 죽은 폭도가 1,000여명이며, 폭도를 포로로 잡아 군사재판에 넘겨 재판을 받은 사형 자가 600여명이며, 무기징역과 15년, 10년, 5년 등 형을 받은 자가 2,000여명이다.

    군사재판을 받은 1,500명이 희생자가 되었고, 경찰과 국군을 죽인 살인 폭도들이 제주 4.3사건 희생자로 둔갑했다. 이들은 제주4.3사건 희생자 명단에서 삭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