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장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 속에 숨은 ‘코드’는 조직 논리와 이기주의
  • ▲ 함께 사열 중인 김장수-남재준 당시 대장. 이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안보실장과 국정원장을 맡아 국가안보전략을 이끌었다. [자료사진]
    ▲ 함께 사열 중인 김장수-남재준 당시 대장. 이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안보실장과 국정원장을 맡아 국가안보전략을 이끌었다. [자료사진]

    지난 4월 22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사표가 수리됐다.

    겉으로는 사직이지만 ‘경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후 김관진 국방장관이 후임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민구 前합참의장이 후임 국방장관으로 내정됐다.

    열흘 이상 지난 지금,
    후임 국정원장 후보에 관한 하마평은 곳곳에서 무성하게 나오지만
    정말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하마평이 대부분 '조직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여의도發, 광화문發, 국정원發 하마평들의 실체


    남재준 국정원장의 사임 이후 후임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전직 장성, 前국정원 차장급 정치인,
    정무적 감각을 갖춘 친박 정치인, 외교관 등이었다.
    이 가운데 전직 장성 출신들은 ‘매파’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는 게 중론(衆論)이다.

    현재 국정원장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이병기 주일대사, 권영세 주중대사, 윤병세 외교부장관, 김 숙 駐유엔 대표부 대사,
    황교안 법무장관 등이다.

    국정원 내부에서는
    현재 원장 대행을 맡고 있는 한기범 1차장,
    2012년 퇴임한 민병환 2차장 등이 거론되는 인물이다.

  • ▲ 이병기 주일대사.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이면서 안기부 차장을 지낸 외교관이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병기 주일대사.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이면서 안기부 차장을 지낸 외교관이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병기 대사는
    국정원 공채 출신이 아니라 외교관 출신으로 정치를 하면서
    과거 안기부 시절 해외담당 차장을 지낸 바 있다.

    김 숙 駐유엔 대표부 대사도 외교관 출신이다.
    그 또한 과거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바 있다. 

    권영세 대사는
    검사 시절 국정원에 파견돼 활동한 적이 있고,
    정치인 시절에는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정원 내부 사정을 비교적 잘 아는 편이다.

    황교안 법무장관은
    ‘국가보안법 해설서’를 펴낼 정도로 공안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전문가다. 

  • ▲ 김 숙 駐유엔대표부 대사. 국정원 1차장을 역임한 직업 외교관이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 숙 駐유엔대표부 대사. 국정원 1차장을 역임한 직업 외교관이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밖에 내부인사로 꼽히며 거론되는 인물들로는
    국정원 1차장(해외정보)을 지낸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이 있다.

    이 중에서 국정원 재직 시절 국내정보를 담당했던
    민병환 前국정원 2차장은 故민관식 국회의장의 아들로
    YS정권 시절 김현철에게 굽실거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안기부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아무튼 이 같은 국정원장 유력 후보군들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해외정보’ 또는 ‘직업 외교관’이거나 ‘대사’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언론들 또한 이들을 적극 지지한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

    이들이 국정원장이 되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굴까?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해외정보 파트와 외교부다.

    국정원 조직은 크게 정보와 수사 분야로 나뉜다.
    정보 파트는 다시 대북정보와 국내정보, 해외정보로 나뉘는데
    여기서 내부적 갈등이 있다.

    현재 국정원의 역량이 상당히 약화된 상황이어서
    해외정보 분야 요원들 대부분은 ‘블랙’ 보다는
    ‘화이트’ 또는 ‘그레이’ 요원으로 해외에 파견된다.

    ‘그레이’ 요원이란 위장을 했으나
    상대국도 어느 정도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요원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신화사 통신, 홍콩 봉황위성TV의 기자들이다.
    서방국가에서 의심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 기자여서다.

    국정원 해외정보 파트의 분위기는
    이 중에서도 ‘화이트’ 요원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것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외교 공관에서 일하면서 외교관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힘들고 어려운 일은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2000년 초 김대중 정권이
    대북공작 파트를 공중 분해시킨 뒤 해외공작 파트까지 엉망으로 만들고
    예산을 대폭 줄여 해외비밀공작은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망가뜨렸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다.

    이후 해외정보 파트 요원들이 주로 ‘화이트’로 파견되면서
    지금은 국정원의 젊은 요원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됐다고 한다. 

  • ▲ 글록 17로 사격훈련 중인 국정원 요원들. 국정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런 모습을 선망하지만 재직하면서는 편한 자리를 찾게 된다고 한다. [사진: 국정원 안보전시관]
    ▲ 글록 17로 사격훈련 중인 국정원 요원들. 국정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런 모습을 선망하지만 재직하면서는 편한 자리를 찾게 된다고 한다. [사진: 국정원 안보전시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쇠락한 대북정보
    국정원 여직원 사건 이후 침묵하는 국내정보


    국정원 해외파트는
    노무현 정권 시절 ‘샘물교회 아프간 납치’ ‘나이지리아 한국 근로자 납치’
    ‘필리핀 사업가 납치’ 등의 사건에서 별의별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이명박 정부 때 해외자원개발을 강조한 덕에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반면 대북정보 파트와 국내정보 파트는
    ‘사람과 임무는 늘었지만 예산은 오히려 줄어든’ 상태가
    5년 가까이 지속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대북정보 파트의 경우
    이명박 정부 때부터 ‘낙하산’으로 온 원장과 그 측근들이
    15년 동안 무너진 ‘휴민트 역량’을 1~2년 만에 되살리라는
    황당한 요구와 눈에 띄는 실적을 강요한 탓에
    탈북 브로커에게 역이용 당하고, 조선족에게 사기당하는 등
    고생만 죽도록 했다고 한다.

    국내정보 파트는
    2008년 광우병 폭동 이후 다시 힘을 얻는 듯 했으나
    2012년 12월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터진 뒤에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급여도 줄었다고 한다.

  • ▲ 국정원 전경. 국가정보기관 중 국정원 만큼이나 오해를 받는 곳도 드물다. [자료사진]
    ▲ 국정원 전경. 국가정보기관 중 국정원 만큼이나 오해를 받는 곳도 드물다. [자료사진]

    국정원 내부가 이러니
    상대적으로 해외정보 파트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어지는
    해외자원 확보, 경제정보수집 활동 강화 기조 덕분에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국정원 또한 ‘조직’이고, 내부에도 ‘조직논리’가 있다 보니
    자신들과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잘 이해하는 사람이
    수장으로 오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4월 말부터 최근까지 후임 국정원장 하마평에 오르는 사람이
    주로 ‘해외정보’ 파트와 외교관 출신이라는 점은 이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이상적인 국정원장: 이후락 + 장세동 + 김승규 + 남재준


    해외정보 파트와 외교관 출신들이
    국정원장을 맡았을 때 분명 좋은 점도 있다.

    우리나라 외교관과 어울려서 인지 해외정보 요원들은
    모나지 않은 태도와 언변을 갖춰 적을 만들지 않는 편이다.
    정무적 감각도 꽤 갖고 있다.
    품위 있는 태도와 훌륭한 ‘스펙’은 보너스다.

    즉 정치권이나 관료들이 보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는 정보요원인 것이다.

    하지만 임명된 지 1년 3개월 만에 남재준 원장이 사임한 현실을 보면,
    지금 국정원에 필요한 원장은 “정무감각 보다는 정보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15년 동안 망가진 국정원을 다시 ‘국가정보기관’으로 되살릴 수 있는,
    자기 손에 흙탕물(또는 피)을 뭍일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
    원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6월 2일, 언론들은
    “청와대가 후임 국정원장 후보를 2~3배수로 압축, 검증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청와대는 제대로 된 기준으로 후임 국정원장 후보를 고르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 ▲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직전 북한으로 가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사진: E역사관]
    ▲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직전 북한으로 가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사진: E역사관]

    우리나라 현실에서 그나마 이상적인 국정원장 롤 모델을 만든다면
    이후락과 장세동, 김승규, 남재준 원장의 장점을 합친 사람일 것이다.

    이후락 前중앙정보부장은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8년
    국방부 내에 79호실이라는 비밀정보기관을 만들고,
    장 면 총리 시절인 1961년에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창설,
    이미 국가정보기관의 밑그림을 그릴 만큼 전략적 안목이 탁월했다. 

    장세동 前안기부장은 좌파들에게는 비난을 받지만,
    대한민국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최고였다.

  • ▲ 盧정권이 임명한 국정원장이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간첩단 수사를 지시했던 김승규 前국정원장. [사진: 당시 보도화면 캡쳐]
    ▲ 盧정권이 임명한 국정원장이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간첩단 수사를 지시했던 김승규 前국정원장. [사진: 당시 보도화면 캡쳐]

    김승규 前국정원장은 노무현 정권의 국정원장이지만,
    ‘법치’와 ‘헌법수호’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심회 사건을 수사하고, 부하 요원들에게 반공의식을 교육하다
    대통령과 충돌한 뒤 사임한, 강직한 인물이다.

    지난 22일 국정원을 떠난 남재준 원장은
    지금까지의 정보기관 수장들과 달리
    흔한 퇴임식이나 꽃다발 하나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남재준 원장 재직 시절에는 투덜거리던 요원들조차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사심 없는’ 그의 모습에 존경을 표하고 있다.

  • ▲ 정치적 상황 때문에 떠난 남재준 국정원장의 인사청문회 당시 TV조선 보도화면
    ▲ 정치적 상황 때문에 떠난 남재준 국정원장의 인사청문회 당시 TV조선 보도화면

    청와대에서 지금 검증하는 국정원장 후임 가운데 이런 인물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국정원장 인선은 조금 늦추는 게 좋지 않을까?

    다수의 언론이
    “6.4 지방선거가 끝난 뒤
    박근혜 대통령이 후임 국정원장 인선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정무적 감각이 충만한 인물’이 후임 국정원장으로 낙점된다면,
    야권과 언론들이 뭐라고 할지 눈에 보이지 않는가?

  • ▲ 국정원 내에 있는 충혼비. 순직한 국정원 요원을 기념하는 곳이다. 현재 여기 새겨진 별 숫자는 50개를 넘는다. [KBS 다큐멘터리 화면 캡쳐]
    ▲ 국정원 내에 있는 충혼비. 순직한 국정원 요원을 기념하는 곳이다. 현재 여기 새겨진 별 숫자는 50개를 넘는다. [KBS 다큐멘터리 화면 캡쳐]

    ‘정무적 감각이 충만한 인물’이 국정원장이 된 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정권 차원의 위기가 닥쳤다는 이유로
    주석궁 안의 '휴민트'를 버린 것과 같은 일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나라와 국정원에 필요한 국정원장은
    ‘정보감각’이 뛰어나고, 전략적 사고와 탱크 같은 실행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래야 국정원을 부활시킬 수 있다.

    80년대 美FBI가
    소련 KGB, 중국 MSS, 이스라엘 모사드와 함께
    가장 경계해야 할 정보기관으로 꼽았던 국정원이
    “휴민트 능력을 상실했다”는 말을 계속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