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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원 피카소를
숭배하는 이들에게趙甲濟 -
2005년 가을
필자가 尙美會(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근교의 펠리페 2세 궁전 에스코리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에스코리알 바로 옆 돌산 꼭대기엔
높이 140m의 세계최대 돌십자가가 박혀 있고
이 바위산 속으로 동굴처럼 생긴
스페인 內戰(내전) 희생자 묘지가 파여 있다.우리 버스가 진입로로 우회전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깃발을 흔드는 차량 행렬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다음날(20일)이 프랑코 사망 30주년인데,
그의 무덤이 있는 돌산 동굴로 몰려가는 지지자들의 행렬이었다.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러 가듯이 독재자를 추모하러 가는 선진국의 젊은이들!그 며칠 사이 스페인 언론들은
프랑코의 功過(공과)를 다루는 특집 기사들을 내보냈다.
한 신문은 <그는 독재자인가, 국민 영웅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프랑코가 1936~1939년 사이 스페인 내전을 주도하고 수십만 명을 죽게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높은 편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좌파 정부를 타도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은 공산화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프랑코가 생전(生前)에 지금의 카를로스 왕(王)을 후계자로 키워
사후(死後)의 민주화를 준비하였다는 호평(好評)도 있었다.스페인 언론은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코가 히틀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한 사실을 지적,
이 결단으로 오늘의 스페인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프랑코 사망 30주년이 되는 날
나는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 2층 6호실에 있는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GUERNICA) 앞에 섰다.이 흑백 대작(大作)은 [반(反)프랑코=반전(反戰)]의 상징적 그림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內戰) 때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가
나치 공군이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名作(명작)을 그렸다.피카소는 생전에
스페인이 민주화 된 뒤에 이 그림을 조국에 가져가서 전시하도록 유언했었다.
그 사이 이 그림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게르니카>는
1981년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으로 왔다가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겼다.죽은 아기를 안고 부르짖는 어머니, 말, 소, 부러진 칼의 이미지가
보는 이들을 생각 속으로 밀어넣는 이 그림에 대해 이런 評(평)이 있다.“고야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피카소는
전쟁의 본질과 의미를 추상화하여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
피카소의 인간됨을 가장 혹평한 사람은
영국의 저술가 폴 존슨일 것이다.
그는 <창조자들>이라는 책에서 피카소를 이렇게 평하였다.<그는
보통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두 개가 없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과
善惡(선악)을 분별하는 능력.>피카소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정의감도 없고,
동정심도 없으며,
특히 여자들에게 잔인하고 변태적이었다고 했다.2차 세계대전 중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했을 때
그는 피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나치가 그를 보호했다.
피카소는 나치의 후견인들에게 그림 선물을 했다.
물론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그는 전쟁중 재산을 더 많이 불렸다.
연합군과 드골 장군의 노력에 의하여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공산당과 피카소는 서로를 이용하였다.
그는 공산당이 집권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협력한 사람을 단죄해야 한다고 외쳤다.
프랑코를 비판하였던 이가
그보다 심한 스탈린의 독재는 비판하지 않았다.
1956년의 부다페스트 봉기,
1968년의 프라하 사태 때도
그는 침묵하였다.
별장이나 城(성)을 살 때는 공산당이 관리하는 지역을 골랐다.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1950년 3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평화 빨치찬 세계 총회>란 단체의 대표 12명을 이끌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것을
입국(入國) 금지시켰다.
FBI(연방수사국)는
피카소를 안보에 危害(위해)한 공산주의자로 분류,
그가 죽을 때까지 감시 파일을 유지하였다.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는
소련 공산당 간부 주다노프가 조종하던 공산당의 선전 조직이었다.
피카소는 미국에 가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原爆(원폭) 제조 금지를 설득하고,
NATO 창립에 항의하며,
미국의 공산당을 지원하고,
할리우드의 10인을 체포한 데 항의하려고 입국(入國)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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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미군(美軍)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실제로 이런 학살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을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의 그림에 담은 것은
방미(訪美)가 좌절된 이듬해였다.
세계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반미(反美) 선동에 악용하였다.
이 선동 그림은 미국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적으로도 악평(惡評)을 받았다.
피카소는
1944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가
1973년에 죽을 때까지 열성 당원이었다.
수백만 프랑의 기부도 했으며
당(黨)의 선전에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그림 <비둘기>는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평화공세에 악용되었다.
소련과 중공의 우표에도 실렸다.
휴전회담 때 판문점에도 등장하였다.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피카소는 화가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1950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1962년엔 레닌상을 받았다.
소련 당국은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타락한 것]으로 규정,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이 공산당원 피카소를 입국(入國)금지시켰다고 해서
미국을 욕하는 이는 없다.
미국 정부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예술엔 國境(국경)이 없지만 예술인엔 국경(國境)이 있다.윤이상과 이응노의 반국가적(反國家的) 행위를
음악과 미술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수작은 상식에 반(反)한다.
피카소의 반미(反美)선동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고교(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넣은 경위에 대한
국가기관의 조사(또는 수사)가 필요하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