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7> 생일선물


    도심은 어느새 색과 빛을 화려하게 사용한 붓 터치로 물들어 있었다. 거기다 야간의 놀이공원처럼 요란했다.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은 꿈을 즐기며 환상에 흠뻑 취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휘청거림이 현우에게는 현실로 넘어가는 다리가 됐다. 현우는 오늘따라 도심의 화려함 속에서 왠지 한 스푼의 환상도 퍼낼 수 없었다. 오히려 만지면 사라지는 허상처럼 보였다. 더욱이 그 허상이 모두 벗겨진 실체는 앙상한 무채색의 스케치자국이었다.
    “홍 대리, 동해 씨 정말 미안해. 아무래도 술자리는 두 사람이 해야 할 것 같아.”
    “에~이! 실망이에요, 팀장님.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대신 그 벌로 술값은 내가 계산할게. 그러니까 마음껏 마셔.”
    “저도 조금 섭섭합니다. 이 자리는 저희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팀장님을 위한 자리거든요.”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하고 또 고마워. 그런데 오늘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
    “중요한 일요!”
    “응.”
    “혹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하여튼 홍 대리 눈치는 못 당한다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하다면 오늘이 지수 씨 생일이야.”
    “헉! 생일이라고요?”
    “그래!”
    “저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눈치가 빠른 것이 아니라 눈치가 아예 없었네요.”
    “그러게요, 홍 대리님.”
    “술이야 다음에 또 시간을 내서 뭉치면 되죠 뭐. 여자들은 무슨 날 안 챙겨주는 걸 엄청 섭섭해 하더라고요. 그나저나 팀장님, 선물은 준비하셨어요?”
    “준비한다고 했는데 맘에 들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지금 집에 들렀다가 가야 해.”
    “제가 장담하건데 틀림없이 좋아하실 겁니다. 그나저나 이거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른 가보세요, 팀장님.”
    “이해해줘서 고마워, 홍 대리.”
    “아참! 다음에 저도 하나 만들어주세요. 여자친구에게 점수 좀 따게요.”
    “뭐를 말입니까, 홍 대리님?”
    “뭐긴 뭐야, 유리공예지. 언젠가 한 번 팀장님의 유리공예품을 선물했더니 그냥 한 방에 뻑 가더라고. 그 다음부터 툭하면 또 얻을 수 없냐고 나를 콩처럼 들들 볶는다.”
    “다행이네. 시간이 나면 요번엔 좀 더 심플하게 만들어볼게.”
    “최고는 말고요. 두 번째 정도로요.”
    “후후후, 알았어.”
    “이거야 원! 내 주변의 남자들은 갈수록 남성미가 없어지니, 쩝!”
    “사랑하는 후배야, 자연계에선 제아무리 적응력이 뛰어나도 지난날의 생존기술은 늘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는단다. 때문에 새로운 생존기술을 찾지 못할 경우 멸종의 길로 들어서는 건 시간문제야. 그것이 바로 순리이고 적자생존이다.”
    “한마디로 이 시대의 노총각들을 불쌍하게 봐달라는 애원이군요?”
    “이를테면.”
    “후후후, 나도 홍 대리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 사랑은 눈을 멀게도 하지만 그 중독이 바로 꿈을 키우기도 하거든. 그럼 난 이만 일어날게.”
  •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현우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선물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리고 곧장 주차장으로 가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지수를 위해 준비한 생일선물은 부피가 컸다. 그리고 전체를 보드랍고 부픗한 융(絨)으로 여러 번 감싸 겉으로는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현우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아 그 무게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이 하늘엔 달이 쏟아놓은 환상으로 가득했다. 현우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이제 현우의 심장은 마치 여름을 물고 날아가는 황새처럼 설다.

    “끼이익!”
    “어, 왜 집에 불이 또 꺼졌지. 혹시 누구랑 나갔나? 차라리 간다고 미리 전화라도 할 걸. 하긴 전화를 했어도 통화가 안 되니 소용없는 짓이지. 가만!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는지도 몰라.”
    “딩동! 딩동! 딩동!”
    “정말 없나 보네. 그럼 이거 어쩌지. 보면 무척 좋아할 텐데.”
    눈에 익은 하얀색 출입문은 주위 경관과 어울려 안데르센의 동화적인 이미지로 환상을 선물했다. 하지만 지금은 문명세계의 변두리처럼 그저 정원등만 외롭게 켜져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깊이를 감춘 그 안쪽의 건물은 죽음의 계곡에 떨어진 별처럼 숨조차 쉬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끝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섬뜩한 조용함이었다. 의미 있는 생일파티를 상상했던 현우의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프닝이었다. 현우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힘껏 눌렀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끝없는 침묵이었다.
    “흠, 이걸 어쩌지. 가져온 선물을 그냥 출입문 앞에 놓고 갈 수도 없고. 지난번에 보니까 동네에 길고양이도 어슬렁거리던데. 혹시라도 돌아다니다가 부딪히면……. 그래, 안 되겠어.”
    그런데 그때 마법처럼 출입문이 어둠을 세로로 찢으며 빠끔히 열렸다. 마치 누군가 현우의 독백을 듣고 소원을 들어준 것처럼 신기했다. 마침내 현우가 마당 안으로 길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을 들이밀었다. 들어선 마당은 역시나 동굴처럼 조용했다. 아니,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현우는 동공을 크게 열어 마당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처음 온 것도 아닌데 오늘은 유독 현우를 거부하는 것처럼 왠지 낯설고 어색했다. 길고양이의 눈빛처럼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어디선가 애처롭게 들리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때 달래와 연결된 불안감이 현우를 덮쳤다.

    “지수 씨! 안에 없어요? 계시면 문 좀 열어주세요. 저 현웁니다.”
    “쾅! 쾅! 쾅!”
    “지수 씨!”
    “흠!”
    “!”
    “주인도 없는 집에 이렇게 무작정 들어오는 건 실례가 아닙니까?”
    다급한 마음이 앞서 현우는 누군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뒤돌아본 사내의 눈빛은 경계 차원이 아니라 사뭇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차가운 눈빛을 보자 알 수 없는 안도감도 함께 밀려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내는 열린 출입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 있었다. 현우도 어색하게 뒷걸음질로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에 서서 똑바로 마주한 사내는 처음부터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상태였다. 그제야 현우는 그의 거드름이 매우 위협적인 몸짓임을 알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피 선생님.”
    “그 정도의 매너는 갖고 계신 분인 줄 알았는데 이거 실망입니다.”
    “저도 오늘 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더구나 이 집은 사장님 혼자서 사시는 곳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주위에 길고양이들이 많아 이것을 출입문 앞에 놓고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런 실례를 범하게 됐습니다.”
    “그게 뭡니까?”
    “지수 씨의 생일선물입니다.”
    “생일선물? 전 사장님이 오늘 생일이라는 소리를 전해 듣지 못했는데요.”
    “아, 예. 저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제 기억에 그런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지수 씨는 지금 집에 안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어디에……?”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더구나 사장님이 제게 보고할 이유도 없고요.”
    “아무튼 소란을 피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수 씨의 휴대전화가 연결되지 않던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글쎄요. 그것도 잘……. 아무튼 이제 선생님의 방문 목적을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내일 날이 밝은 다음 다시 찾아오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만이라도 현관 앞에 놓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지수 씨가 늦게라도 돌아오면 볼 수 있게요.”
    “그건 좋을 대로 하시죠.”
    “고맙습니다. 그럼 현관 앞에 놓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입니까?”
    “예?”
    “그러니까 내 말은 사장님에게 따로 전할 말이라도 있냐는 뜻입니다.”
    “그게 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 달빛에 남겨놓겠다고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달빛이라고요?”
    “예.”
    “…….”
    “그럼 전 이만.”

    심드렁한 피오기의 말투에서는 상대방의 노력을 단번에 좌절시키는 묘한 힘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신의나 충성심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현우는 그런 피오기의 눈빛이 폭탄가방처럼 강력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따라서 불필요한 자극은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갈 여지가 충분했다. 그래서 현우는 현관에 선물을 내려놓자마자 집밖으로 서둘러 나왔다. 맑은 공기를 들이키며 올려다본 하늘엔 한낮의 뜨거움이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풍광처럼 달과 별이 바람에 스치고 있을 뿐이었다.
    “음…….”
    현우는 차량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고 놀이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곤 아이들이 두고 간 그네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그때 어둠 사이로 터지는 이른 새벽의 빛처럼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달콤한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낭만적인 선율과 등을 다독이는 위로 같았다. 언젠가 차 안에서 들었던 가사가 없는 멘델스존(Mendelssohn)의 피아노 소품 <무언가(Songs Without Words)>였다. 현우는 품 안에서 마음의 펜을 꺼내들었다.
    “지수 씨, 제가 운명의 길을 잃은 건가요?”
    “…….”
    “그렇군요. 제가 너무 멀리 왔군요. 지금 제게는 방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오지(奧地)에서 길을 잃으면 돌아갈 방법을 찾지 말고 그 자리에 그냥 있으라고. 그래서 전 지금의 자리에 그냥 있을게요. 지수 씨가 사랑의 열병으로 절 찾아올 때까지. 그럼 오늘도 아름다운 꿈 꿔요. 지수 씨, 안녕!”

    마법 같았다. 마음의 펜을 내려놓자마자 홀로 어둠 속을 흐르던 <무언가>도 끊겼다. 이제 현우는 차가 있는 곳으로 다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현우를 어둠 속의 눈동자 하나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피오기였다. 피오기는 현우가 놀이터에서 나와 울타리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저 미시리(얼간이)가 허망한 감정에 완전히 맛이 갔군. 사랑, 그건 처음부터 거짓이었어. 물론 미시리는 짐작조차 못했겠지만. 크크크.”
    놀이터에서 나온 현우를 주변의 어둠이 밀물처럼 휘감더니 다시 새소리가 물어갔다. 그제야 피오기는 현우의 노력을 좌절시킨 것에 대해 약간의 희열을 느끼는지 야비함을 흘렸다. 마당을 지나고 계단을 뛰어올라 피오기가 마주한 건 현우가 두고 간 생일선물이었다. 피오기는 웬일인지 생일선물을 지긋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차가운 초록색에서 갑자기 붉은빛을 띠는 순간이었다. 잠든 호수처럼 정적뿐이던 마당이 한바탕 폭격을 맞은 듯 파열음으로 진동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도전처럼 파괴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이제 현우가 준비한 생일선물은 숨을 쉬지 않았다.
    “쳇! 달빛에 남겨놓겠다고. 사랑은 굶주린 배 속에 절대로 위안이 못 된다는 걸 내 시간이 있을 때 미시리에게 꼭 가르쳐주지. 난 생존(生存)이 곧 생활(生活)이거든.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