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페이지 일기장 다섯권에 담긴 비장한 사명감, 육영수 여사에 절절한 추모
  • 박근혜 씨가 보여준 아버지 日記

    "혁명과업 수행중 내 인생의 반려자인 내자를 잃은 것이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다"

    趙甲濟 

     *월간조선 1989년4월호
    제2부·정상의 고뇌-대통령 일기


    또박또박 써 내려간 비록(秘錄)

  •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朴대통령은 군인시절부터 기안을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1952년 5월에 이종찬(李鍾贊)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발표된 「육군장병에게 고함」은 개헌 파동에 따른 정치위기 가운데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역사적 문서인데, 그 초안자가 당시 육군본부 작전국차장이었던 박정희(朴正熙)대령이었다.

    박근혜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청와대 본관 2층의 아버님 방에 밤늦게 들리면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 빛 아래에서 무엇인가 쓰시고 있는 모습을 자주 뵌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침대 머리맡에도 메모지를 두었다가 정책구상이 떠오르시면 기록을 하시곤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1972년 1월12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굵은 파카 만년필로 한자를 많이 섞어서 세로로 써 내려간 그의 일기는 1979년 10월17일로 끝난다.

    16일에는 이광요(李光耀) 싱가포르 수상이 방문했고 그 날밤 만찬이 있었다.
    李수상은 곁에 앉은 박근혜(朴槿惠)양에게 정치지도자의 자질을 설명하면서 『대중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라 추종자(Follower)다』고 말했다.
    16일밤 朴대통령이 쓴 일기에도 수상의 말이 인용돼 있다.

    「李수상은 공산당과 싸울 때는 쉬면서 싸울 수가 없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고 말했다」

    박근혜(朴槿惠)씨가 보존하고 있는 <박정희(朴正熙) 일기>는 약 2백 페이지짜리 일기장 다섯 권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그 일기를 읽다가 여러번 울었습니다.
    8·15 피격사건 직후에 쓰신 일기에는 「내가 죽어야 할텐데 당신이 대신 변을 당했다」는 한탄이 절절합니다.
    어머님을 추모하여 쓰신 시도 많아요.
    혼자 진해에 다녀오셔서는 어머님과 함께 갔던 진해에 대한 추억담과 어머님이 사라진 쓸쓸함이 적혀 있습니다』



  •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비장한 사명감이 주조(主調)

    근혜(槿惠)씨가 가져와 기자에게 보여준 일기는 바로 어제 쓴 것처럼 잉크빛이 또렷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달필로써 또박또박 써 내려간 이 일기는 물론 누구를 의식해서 쓴 것도 요사이처럼 공개될 것에 대비하여 쓴 것이 아니다.
    그런만큼 朴대통령의 진면목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해 준다.

    이 일기를 읽어본 느낌은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를 읽은 뒤의 그것과 비슷했다.
    「국가를 위한 비장한 사명감」이 두 일기의 주조(主調)이다.
    난중일기에선 비장한 사명감이 왜군에 대한 증오심과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朴대통령 일기에서는 그것이 북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심과 조국근대화에 대한 집념으로서 구체화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1946∼48년 사이에 박정희(朴正熙)장교는 남로당의 군사비밀 조직의 한 핵심인물이었다.
    숙군때 체포돼 전기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숙군을 지휘했던 백선엽(白善燁) 당시 육군정보국장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사형집행자 명단을 결재받을 때 『아까운 사람이 하나 있다』고 특별히 간청하여 사면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5·16뒤 미국은 한때 朴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박정희(朴正熙) 일기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철저한 반공주의이다.

    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일기는 그렇게 재미있는 게 아니다.
    비화(秘話)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세한 상황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기가 중요한 것은 정치·역사학자의 입장에서다.
    한국역사상 가장 엄청난 물질적, 가시적 변화를 가져온 근대화 운동의 견인차였던 朴대통령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창구가 이 일기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무미건조한 기사식(記事式)이다.
    주로 朴대통령의 개인적 감상이 많이 나타나 있다.
    일제시대때 교육받은 사람으로서는 맞춤법이 훌륭하고 용어선택도 정확하다.
    가끔 흥분조로 흐르는 대목이 나타나지만 시적(詩的)인 감상이 아니라 산문적인 묘사이다.
    그는 시도 산문식으로 썼다.

    朴대통령은 산문적인 인간형이지 결코 시적인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근혜(槿惠)씨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큰 사건이 나서 한참 바쁠 때는 일기를 쓰지 않았고, 국내외 정세가 조용할 때 썼다고 한다.
    따라서 대사건의 뒷이야기 같은 것은 많지 않다.

    이 청와대 일기 이전에도 朴대통령은 가끔 일기를 썼다.
    1954년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 쓴 일기, 귀국하는 선상에서 쓴 일기, 5·16쿠데타 전에 쓴 글 등이 있다. 1960년 9월 29일에 쓴 박정희(朴正熙)소장의 글에서는 5·16의 징조가 보인다.

    「만사가 이대로만 순환하고 진전이 없다면 명일의 사회는 여하히 될 것인가.
    4월혁명에 선혈을 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찾으려고 선두에 서서 젊은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던 학도들이 또다시 거리에 나와서 생활계몽을 호소하고 기성인들에게 경각을 부르짖었다.
    (중략)
    정국은 난마와 같이 헝크러지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만 커져 가고 있다.
    난(亂)하면 악한 놈이 득세한다는 옛말대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이러한 도정을 줄달음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여!.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4월 혁명정신을 다시 상기하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陸여사를 추모하며

    육(陸)여사의 1주기인 1975년 8월15일에 쓴 일기는 「청와대 일기」가운데서 가장 감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벌써 아내가 진 지 일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과연 유수와 같이 빠르도다.
    작년 이날 09시45분경 아래층 집무실에 『오렌지』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하였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린 그날이었다.

    그로부터 일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일년 남 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야(野)에 묻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번이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신적 타격과 실의(失意)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내와 인내로써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용기를 되찾기에 안간힘을 다 썼다.
    그럴 때마다 아내 영정앞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했다.
    아내는 언제나 나에게 격려와 용기를 일깨워 주었다.
    (중략)

    오늘도 동작동 산 기슭에는
    당신을 기리며 원근(遠近)에서 찾아온
    저 끊일 줄 모르는 행렬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고 있다오.

    당신이 가신 지 1년이 되었는데
    평소 당신을 직접 만나 보지도 못한
    저 수많은 백성들이
    성실하고 온화한 당신이 뿌린 온정에
    잊을 수 없어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팔월의 뙤약빛도
    쏟아지는 소낙비도
    아랑곳 없이
    허리가 꼬부라진 팔순의 노파도
    앞 못보는 盲人들도
    불구의 몸이 된 상이군인들도
    지체가 불구인 어린소년도
    음성 나환자들도
    먼 시골에서 새벽차로 올라온
    노인단체들도
    해외에서 돌아온 교포들도
    UN군 장병들도
    각계각층
    남녀노소가
    당신을 찾아와서
    당신이 가신 것을
    슬퍼하고 있다오
    고이 잠든 당신의 무덤앞에
    머리숙여 분향하고
    당신의 명복을 빌고 있다오.

    『오 신이여!』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선포 이후 朴대통령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74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민주화 투쟁이었다.
    유신헌법 철폐를 목표로 김영삼(金泳三)총재가 이끄는 신민당과 종교단체 및 학생세력은 광범한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1975년 1월22일 朴대통령은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그날 밤에 쓴 일기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토로했다.

    「국론의 통일을 기하며 난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가부는 오로지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줄 것을 바라고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천지신명이 정당하고 현명하신 가호와 심판을 내려줄 것을 기원하였다」


    1975년 2월12일의 투표일 밤, 그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심정은 지극히 담담하다.
    모든 것을 國運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전국적으로 조용한 가운데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들어오고 있다.
    대세는 명일 7시경이면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의 일기.

    <이번 국민투표는 공명제일주의로 깨끗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일념에서 관계장관과 지방장관들에게도 직접 수차 투·개표 과정에서 절대로 부정행위가 있어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설명을 하고 확인을 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공정하게 실시된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전국의 투표구 가 1만 6백77개소 투표인수가 1천 3백만명이나 되기 때문에 말단에서 혹 과잉충성분자가 비위를 저질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오후 3시경에는 국민투표 결과가 거의 확정.
    신은 나에게 또다시 무거운 책임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하여 중책완수에 헌신할 것을 신에게 서약하다>


    1975년 3월20일의 일기 전문(全文)은 이러했다.

    <작일 철원북방 휴전선내에서 북괴의 지하땅굴을 또 다시 발견.
    UN군사령부에서 발표.
    땅굴은 폭이 2m, 높이2m, 길이 3.5km. 북괴의 집요한 남침야욕의 또 하나의 실증을 우리는 얻었다. 이런 판인데도 북괴 남침위협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의 그 무책임한 소리가 이러고도 또 있을 것인가.
    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월남패망의 교훈 자주 언급
    

    朴대통령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 수중에 넘어감으로써 월남이 공산화에 의한 통일로 매듭 지어지는 것을 보고 대단한 충격과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5월13일에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찬반논의를 금지시키는 초헌법적 조치를 취했다.

    월남패망의 날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는 글로써 일기를 끝맺고 있다.

    朴대통령은 1975년 추석을 앞두고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을 허용하였다.
    이 계획안을 만든 것은 정보부였다.

    朴대통령은 『조총련 사람들이 고국의 발전상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문세광(文世光)과 같은 사람도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면서 이 계획을 승인했었다.

    1975년 9월16일자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략)
    서로 껴안고 눈물겨워 하는 모습을 보도를 통하여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역시 그들도 한 핏줄의 동포다.
    천인공노할 악의 원흉은 공산분자들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잘 되어 남북의 동포들이 이렇게 상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朴대통령은 인도지나 사태 1주년인 1976년4월의 일기에도 여러번 그 교훈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4월1일(토) 맑음

    1년 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 때 국내정세를 회고하고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사수(死守)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국론(國論)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타산지석으로 삼고 우리가 갈길이 무엇이란 것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4월24일(토) 황진·흐림

    작금 지상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보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60만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
    ·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全인류가 특히 툭 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인도(人道)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무슨 옹호단체들이 어찌하여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僞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 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에 하급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 되었더래도 자기들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귀국차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돌아간 그들이 지금 무사할까?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도 포악할까?

    인류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주의(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容認)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꼭같은 살인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적 조국의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제니 팟쇼니 하고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호전광 북괴(好戰狂 北傀)라고 저주

    4월29일(목) 흐림.

    내일은 1년 전 월남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 앞에 굴복하고 패망한 날이다.
    나는 작년 바로 오늘 오전에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조국수호에 全국민이 일치단결하고 총궐기하자고 호소한 바 있다.
    충무공이 말씀하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격언을 인용하였다.
    수도 서울을 全시민이 사수(死守)하자고 호소했다.
    대통령도 최후까지 서울시민과 같이 남아서 사수할 것을 서약했다.
    비장한 각오로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호소하고 천지신명에게 서약했었다.
    특별담화가 나간 바로 다음날인 내일(30일) 월남공화국 패망의 비보를 들은 것이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단결의 힘은 조국을 수호하고 겨레의 생존을 보호하는 굳건한 원동력이 되었다.
    호전광 북괴(好戰狂 北傀)도 감히 도발을 하지 못했다.
    뭉치고 단결된 민족의 힘만이 적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 조국과 나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재인식하게 되었다.
    북괴는 지금도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그 구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내부의 어떤 허점·취약점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들은 내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무력도발을 해 올 것이다.
    우리 내부의 튼튼하고도 강인한 체제와 우리의 저력만이 침략자들의 무모한 불장난을 미연에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朴대통령은 5월 16일과 10월17일이 오면 반드시 5·16거사와 유신에 대한 감상을 피력하였다.
    1978년 5월 16일의 일기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전략).
    제2의 5.16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10월유신은 능률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제도였다고 확신한다.
    10월유신 이후 지난 5년 동안의 우리 국력(國力)의 신장은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이대로 추진된다면 80년대 중반에 우리는 대국(大國)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 체제를 이해 못하고 비난하고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다만 결과를 가지고 후세의 평가를 기대하는 도리 밖에 없을 것이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일기에서도 김형욱(金炯旭)을 개탄


    1976년부터 朴대통령은 한미관계의 악화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미국 언론과 의회가 코리아게이트사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朴대통령의 체제가 미국여론의 비난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朴대통령은 박동선(朴東宣) 로비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발짝씩 물러나려고 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지를 계속 확보해두기 위한 약소국의 로비였다는 인식에서. 朴대통령은 미국쪽에 빌붙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증오하였다.

    특히 金炯旭에 대해서는 사석에서 『개도 주인을 알아보는데…』라고 한탄했었고, 그의 1978년 6월7일자 일기에도 그 기분이 잘 드러나고 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에도 불구하고 주한 미군사령관들은 대체로 한국과 朴대통령 처지를 이해하여 본국의 정책과 맞서가면서까지 朴대통령편을 들기도 하였다.

    1979년의 두 일기를 소개한다.

    4월24일(금)청

    전 유엔군사령관 스틸웰 장군의 내방을 받고 환담.
    금일이 장군의 61주년 생일이었음으로 오찬을 같이하면서 생일을 축하하고 한반도 안보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을 하다. 재임중에도 한국민과 한국군을 좋아했고 한국의 안보가 그의 조국인 미국의 안보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소신을 견지하던 장군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전우(戰友)로서의 우정을 느껴왔었는데 퇴역 후에도 한국에 대하여 변함없는 우정을 잊지 않고 있는데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소위 박동선(朴東宣) 사건으로 한국을 헐뜯고 한국을 해치려고 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미국인의 도덕성, 인간적인 의리 등에 대하여 근자 퍽 회의적인 인상을 가졌으나 스틸웰 장군과 같은 위대한 미국인도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또 달라지기도 한다.


    6월3일(일) 흐림

    다가오는 7월초 본국으로 전임하는 유엔군사령관 베시 대장 송별 골프대회를 뉴 관악 칸추리에서 개최하다.
    미8군의 장성급 7명과 아측에서 각군 참모총장 및 국방장관, 청와대 등 12명 계 20명이 참가, 미측에서는 출장중인 미태평양사령부 해군사의 쿠건 중장도 합류하여 14홀을 돌고 저녁에는 경호실 식당에서 만찬을 같이 하다.
    베시 장군은 역대(歷代)유엔군 사령관 중에서도 특히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한국민을 좋아하는 친한적(親韓的) 장군이었다.
    그는 카터 대통령의 미(美) 지상군 철수계획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의견을 가진 장군이었으나 금번 美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주한 美 지상군 철수정책에 대하여 카터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하는 까닭에 참모 차장으로 전임돼 간다고 한다.
    주견과 소신이 뚜렷한 훌륭한 장군이었다.
    장군의 건강과 대성(大成)을 기원한다.



    5·16에 대한 소감

    1979년 5월16일에 朴대통령은 또다시 5·16거사에 대한 소신을 일기에 적고 있다.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 진행되겠지만, 거사의 지휘자가 이 사건에 대해서 18년 뒤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한번 보자.

    5·16 혁명 제18회 기념일이다.
    1961년 5월16일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좌시만을 할 수는 없다는 우국(憂國)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 이었다.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마와 같이 헝크러지고 부패·부정·무질서·부조리·정체·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당시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을 단행하고 구(舊)정치인들로부터 전권(全權)을 인수한 혁명정부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구악(舊惡)에 물든 대표적인 인사들을 구속하고 쾌도처럼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나가는 혁명정부에 대하여 다수 국민들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구(舊)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은 외세(外勢)를 빌어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 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1963년 12월17일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로서 제5대 민선대통령으로 당선된 나의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군정은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이 되었다.

    5·16혁명 18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18년간을 회고하며 감회가 무량하다.
    조국근대화 과업도 이제 결실기에 들어섰다.
    l-2-3차 5개년계획이 대체로 순조로이 진행이 되어 우리의 국력도 괄목하리 만큼 크게 신장하였고 공업화도 착착 추진되어 5·16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우리 만큼 나라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기적」이니 한강의 기적이니 하고 우리가 걸어온 도정과 결과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인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때보다도 고조되어 있다.
    자기들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72년 가을에 단행된 10월유신은 우리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과업이 열매를 맺을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 분발하고 총화(總和)로써 정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內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마지막 일기


    1979년 10월17일은 朴대통령에게는 운명적인 날이었다.
    10월유신 선포 7주년인 이날 부산에서는 전날에 이어 대규모 야간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날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베풀어진 유신선포 7주년 기념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공화당 최영철(崔永喆)의원의 사회로 노래시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 의원은 「바보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내려갔다.

    만찬도중 부산을 다녀온 구자춘(具玆春) 내무장관은 朴대통령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朴대통령은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역정을 냈다.

    청와대 비서진은 공화당 사무총장 신형식(申炯植)씨에게 눈짓을 했고, 만찬은 밤 9시반쯤 끝났다.
    朴대통령은 청와대로 들어오자마자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공수부대 1개여단을 부산으로 급파하도록 지시한 다음, 비상국무회의 소집을 최규하(崔圭夏)총리에게 지시했다.

    중앙청 3층의 국무회의실에서 밤 11시30분에 급히 소집된 비상국무회의는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하였다.

    이날 朴대통령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일기를 썼다.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일부 반체제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朴대통령은 아마도 이날 새벽이나 자정 무렵에 이 짤막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파출소를 습격하고 경찰차를 불태우고 있는 시민·학생들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대의 인기보다는 훗날 역사의 평가를 선택하겠다고 쓴 朴대통령은 이날 밤 정상(頂上)의 고독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딸/ 내 기록 속의 朴槿惠(1)

    최초 인터뷰-'오죽하면 딸이 나서겠어요'

    趙甲濟


  • ▲ 박정희 준장이 미국 연수후 귀국하는 군용선에서 그린 스케치.(1954)
    ▲ 박정희 준장이 미국 연수후 귀국하는 군용선에서 그린 스케치.(1954)


    '오죽하면 딸이 나서겠어요'

    내가 박근혜 씨를 공식적으로 인터뷰한 것은 1988년 말이었다. 한 전직 대통령(전두환)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딸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것이다. 故朴正熙 대통령의 딸인 朴槿惠씨(당시 38) 가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전기 간행·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에 주로 잡지에 의해서 진행된 朴대통령 시절의 정치秘話보도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폭로저널리즘」이란 말을 들었다. 朴대통령 시절에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어두운 면을 주로 부각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가 오른쪽 왼쪽 사이를 몇 번씩 왕복한 끝에 중앙에 멈추듯 朴대통령에 대한 인식도 호(好)와 불호(不好) 사이를 몇 차례 왔다갔다 했으니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는 時流를 타고 있었다. 내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槿惠씨는 자신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는 것은 『아버님을 바로 알리기 위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고 했다.

    『딸이 나서서 아버지를 변호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말도 듣고 있지만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버님의 은혜를 입었던 분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비극을 두 차례나 겪은 사람답지 않게 밝은 표정에 깔끔한 옷맵시를 보인 朴씨는 『지난해 8월 아버님에게 누명을 씌운, 鄭仁淑 피살 사건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듣고 입을 연 것이 이렇게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버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적은 없고 어머님과 그 사건을 다루었던 분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고 했다. 陸英修 여사는 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이렇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사표를 써 가지고 와서 대통령께 울면서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 여자와 관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건, 즉 살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호소했다는군. 나는 그 사람을 내 보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槿惠씨는 이렇게 말했다.

    『5공화국 시절에 그 사람이 아버님 묘소에 참배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백번 참배하면 뭣하나. 아버님의 누명을 벗겨드려야지」라고요.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 사람이 혐의를 받았지 아버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는데 돌아가시니까 아버님이 朴鐘圭 경호실장을 시켜 鄭仁淑을 죽인 것처럼 소설을 쓰더군요. 동생 지만(志晩)이도, 「아버님을 살인자로 몰고 있잖아」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아버님의 누명을 벗겨드리자면 자신이 매장돼야 하니까 어렵겠지요.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정인숙(鄭仁淑)사건 누명 벗겨드려야


    「그 사람」의 이름을 朴씨는 직접 대지는 않았으나 이미 사회적 상식이 돼 있는 전직 고위공직자가 「그 사람」이었다. 이날 朴槿惠씨를 만나러 오기 직전에 나는 전 공화당 의원을 만났다. 내가 朴씨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그 전 의원은 『이 말씀을 꼭 전해주십시오. 제가 鄭仁淑 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데 朴 대통령께서 지독한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鄭仁淑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가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그 사람을 곤경에서 건져주었다가 누명을 쓴 겁니다. 제가 언젠가는 진실을 증언하겠다고 따님에게 꼭 전해주세요』 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朴槿惠씨는 金大中씨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둘 게 있다고 말했다.

    『그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였어요.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앉아 있었죠. 아버님이 신문을 펼치시더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놀라시면서 신문을 어머님에게 넘겨주시더군요. 어머님도 놀라시더니 두 분께서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하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북괴가 金씨를 납치해 놓고 우리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 집무실로 서둘러 내려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이 사건으로 뒤에 누명을 쓸 것을 걱정하셔서인지 검찰 고위간부를 불러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해두었다고 합니다』

    5공화국 시절에 朴대통령과 관련 한 기사를 가장 많이 쓴 기자들 중의 한 사람인 나에게 槿惠씨는 이렇게 부탁했다.

    『朴正熙라고 존칭없이 꼭 써야 합니까. 장군, 대통령, 씨라고 붙이면 안 됩니까.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동양적인 예절도 있지 않습니까. 교육상으로도 그렇지요』

    朴씨는 아버지에 대한 그 수많은 기사들을 죄다 읽었다고 한다. 때로는 『고문 받는 느낌』이었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울분』을 가누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읽어내려가다가 어처구니없어 중단해버린 적도 많습니다. 요사이는 이렇게 기자님들에게 이야기도 하고 하니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기자라면 남의 가슴에 못박는 기사를 쓰지 않겠어요』

    김형욱(金炯旭)은 왜 달아났나

    朴槿惠씨는 1988년 하반기부터 주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아버지를 변호하고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朴씨는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기사가 있으면 꼼꼼히 읽어두었다가 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감상을 말하곤 한다. 내가 최근에 '신민주공화당보'에 「朴대통령의 제자 노릇 똑똑히 하라!」는 제목의 글을 쓴 것을 잘 읽었다면서 전화를 걸어온 朴씨는 『그런데 공화당을 「朴대통령의 嫡子(적자)」라고 표현한 데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고 했다. 그 말에는 공화당과 金鍾泌 총재가 朴대통령을 제대로 옹호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데 따른 불만이 깔려 있었다.

    朴槿惠씨는 기자들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아주 능통하였다. 기사거리를 잘 만들어 제공해주고 朴대통령이 남긴 다섯 권의 일기(1972∼79년)를 조금씩 조금씩 공개하여 달마다 기사거리의 메뉴를 바꿔주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언론매체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주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말고 朴대통령의 일기를 묶어서 출판합시다』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면 작살을 내겠다고 위협하는 곳이 많다』면서 웃었다. 나는 1988년 12월, 이듬 해 2월, 3월에 걸쳐 네 차례 약 10시간쯤 朴씨를 인터뷰하고 월간조선에 기사를 썼다.

    1974년 8월15일에 陸 여사가 문세광(文世光)의 총탄으로 타계한 뒤에는 朴 대통령이 딸을 말동무로 삼았기에 朴씨는 대사건의 비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예컨대 金炯旭 실종사건.

    『아버님이 여러 차례 金炯旭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어요. 아버님은 金씨가 미국으로 달아난 것은 정보부장 시절에 권력을 남용하여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물러난 뒤 보복을 받을까 불안해하였고, 유신 선포 이후 국회의원도 못하게 되니까 보호받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십디다. 金씨가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나자 미국 의회에 나가서 증언을 했는데 그때 아버님은 金씨를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성사가 될 뻔했는데 金씨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십디다. 「나를 욕하는 것은 그렇다치고라도 우리 나라 전체를 욕되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고 하시더군요』

    朴대통령의 金炯旭실종사건 분석


    1979년 10월초 金炯旭이 파리에서 실종된 데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었던 기자는 몇년 전 그 金炯旭 자서전 출판 봉쇄 공작에 관계하였던 한 재미 동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金載圭 정보부장의 직접 부탁을 받고 金炯旭이 자서전 출판을 단념하는 조건으로

    ①150만 달러 제공
    ②한국여권 발급
    ③서울에 있는 金炯旭의 토지(당시는 압류상태)의 반환을 제시, 金炯旭의 승락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러나 金炯旭이 여권을 뉴욕총영사가 직접 자기 집에 가져다 줄 것을 고집함으로써 (金載圭는 총영사관에 와서 가져가라고 했는데 金炯旭은 납치를 걱정하였던 것 같다)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이다. 金載圭는 그 뒤 파리에 오면 150만 달러를 주겠다고 金炯旭을 꾀어 파리에 온 金炯旭에게 50만 달러를 먼저 주어 안심시키고 나서 잔금 100만 달러를 미끼로 金씨를 불러내 납치, 살해했다는 것이 이 중계자의 얘기였다.

    朴槿惠씨는 1979년 10월 중순, 그러니까 金炯旭 실종이 보도된 뒤 식사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金炯旭이는 미국에서 북한 돈을 받아서 反정부 활동을 한 것 같다. 이번 실종사건은 金에게 돈을 대주던 북한 조직이 그 사실의 탄로를 막기 위해서 그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朴씨는 『아버님이 정보기관의 보고』를 받으시고 그것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고 했다. 金炯旭 납치·살해를 金載圭 당시 정보부장의 지령으로 보는 측에서는 李厚洛씨에 의한 金大中씨 납치사건과 비교하기도 한다. 즉, 李 당시 정보부장이 朴대통령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스스로 알아서 한 일이 金大中씨 납치였듯, 金載圭는 金炯旭 자서전으로 朴대통령이 골치를 앓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 그런 일을 지시했다는 해석이다. 그랬을 경우 金載圭는 朴 대통령에게도 이 공작을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0·26 사건 때 金載圭피고인의 변호인이었던 모씨는 『金載圭가 방아쇠를 당긴 데는 金炯旭납치 사건의 지휘체제가 들통 나 朴대통령으로부터 문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작용하고 있었을지 않을까』라고 추리하기도 했었다. 박근혜 씨는 『아버님은 人命을 가볍게 보는 분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에서 모로 전 수상이 납치되었을 때 납치범들이 구속된 동료의 석방 등을 요구했지요. 제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고 물으니까 아버님은 두말 없이, 우선 살려놓고 봐야지 라고 하십디다. 鄭仁淑 피살사건, 金大中씨 납치사건, 金炯旭 실종 사건 같은 것은 아버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朴槿惠씨는 공산권과의 문제에 있어서도 朴대통령이 人命을 중히 여기는 정책을 써 왔다고 강조했다. 1978년 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령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을 때는 우리 정부가 불시착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선수를 쳐서 미리 「소련당국의 우호적 처리에 감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여 소련의 환심을 사도록 했다는 것이다. 1975년에 월남이 赤化되었을 때 탈출하지 못하고 사이공에 남아 있던 李大鎔 공사의 귀환을 위해서도 朴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외국을 통해서 송환 교섭을 벌이면서 공산 월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비난성 성명 등을 자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10·26 밤의 청와대


    1979년 10월26일 아침에 朴槿惠씨는 여느 때처럼 청와대 2층에서 朴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경북 문경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던 사람이 보낸 족자 선물을 받아 벽에 걸어 보고는 대견해 하면서 1층 집무실로 내려갔다. 朴대통령은 『오늘 삽교천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朴槿惠씨는 『말씀을 분명히 끝맺으시는 아버님이 그날따라 흐리시는 것이 지나고 보니까 이상하게 여겨지더군요』라고 했다. 이것이 생전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이다. 『그날 오후에 청와대 헬기 착륙장 쪽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 아버님이 돌아오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후에 저는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보내고 나와 보니, 아버님이 저를 여러 번 찾으셨다고 비서가 말하더군요. 끝내 통화를 못하신 아버님은 나가시면서, 「오늘은 저녁 먹고 올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하라」고 일러두셨더군요』

    10월27일 이른 새벽에 朴槿惠씨는 아버지의 悲報를 金桂元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듣는다. 『너무 기가 차서, 「아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했지요. 金실장은 車실장과 金부장이 싸우다가 金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휴전선은 안전합니까, 라고 물으니까. 金실장이 비상계엄이 선포돼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조금 있으니까 아버님의 屍身(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서 들어오시고…. 아버님은 舊約(구약)의 모세처럼 이 민족을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하시기는 했지만 그분 자신은 그 땅을 밟지 못하실 운명이었던가 봐요』

    섬뜩했던 金載圭의 눈매


    金載圭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槿惠씨는 문득 10·26 사건 1주일 전쯤의 어느 광경이 떠올랐다고 한다.

    『청와대 복도에서 金桂元 비서실장 및 盧載鉉 당시 국방장관과 마주쳤어요.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뒤따라오는 車智澈 실장과 金載圭 부장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어요. 두 사람은 굳은 표정인데, 눈매가 모두 살기등등한 거예요. 가슴이 섬뜩합디다』

    1979년 10월 24일, 朴 대통령이 부마사태의 수습에 바쁘던 때, 槿惠씨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아버지에게 몇 가지 건의를 했다고 한다.

    『제가 청와대 출입기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따로 수집한 여론을 종합해서 아버님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측근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고, 우선 정보부장을 갈아야 한다는 여론을 전해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하시고 들어주시더군요. 중간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님께선 '무슨 일을 그렇게 해!' 하고 역정을 내십디다. 그러고는 또 '이야기해 봐', 하시면서 재촉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의 분위기로 봐서 아버님께서 정보부장을 경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곧 발표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10·26 뒤 청와대를 비우고 서울 신당동 사저로 물러난 朴槿惠씨는 고 朴대통령의 생일인 1979년 11월14 일에 계엄사합동수사본부에서 가져 온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포장을 풀어보니 스위스에서 만든 최고급 파텍 회중시계였다. 금으로 만든 것인데, 생일을 축하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시계는 金載圭부장이 주문한 것이었다고 한다.

    『10·26 사건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정보부장이 너무 강경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시계를 주문한 사람이 법정에서는 자신을 미화하더군요. 세상이 바뀌니까. 아버님에게 유신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붓통을 선물했던 사람이 나는 유신에 반대했다고 나섭디다』

    朴槿惠 씨는 아버지에게 車智澈 경호실장에 대한 나쁜 여론도 귀띔한 적이 있었으나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그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던 車실장을 朴대통령이 왜 그토록 편애를 했는지 수수께끼다. 인간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출중한 朴대통령에게도 사각지대가 있었다는 얘기다.

    『아버님은 말년에 가셔서 崔圭夏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님과 단 둘이서 식사를 하는 자리가 많았는데, 崔총리를 밀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더러 하셨어요. 아버님이 부처순시 때 서정쇄신을 강조하셨는데, 崔총리께서 우선 내 주변부터 정화하겠다는 말을 했대요. 아버님은 흐뭇해하시면서, 崔총리를 옹립하는 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말씀도 하셨어요. 우선 80년대에 들어가서는 유신헌법을 고치겠다고 하셨어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도 대통령 경선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일찍 후계자를 발표하면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아버님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실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내가 『崔대통령이 12·12사태 때와 80년 봄에 한 행동을 보면 그 분이 난세에는 국가지도자감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고 했더니 朴槿惠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崔씨에게 대통령자리를 넘겨주더라도 뒤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계속 의문을 제기했더니 槿惠씨는 『아버님은 퇴직 후의 落鄕(낙향)생활을 꿈꾸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님은 퇴직 뒤의 생활을 꿈꾸듯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못쓰는 땅을 개간하여 나무도 심고, 젖소도 키우고, 그림도 그리고 하시겠다고 벼르셨습니다. 후계자에게 정권을 넘기시고 후견인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으셨고, 순수한 마음으로 낙향생활을 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고 했다.'

    鄭昇和(정승화) 장군 증언:
    박근혜가 받은 청와대 돈 6억원의 성격


    지난 해 12월4일 大選후보 토론회에서 새누리당 朴槿惠(박근혜)씨가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밝힌 청와대 6억원 관련 상황은 25년 전 내가 가장 먼저 썼던 일이다. 1987년 11월 필자는 '12·12 사건 鄭昇和는 말한다'(까치)는 책을 냈다. 10·26 사건 때 계엄사령관이었고, 12·12 사건으로 全斗煥 세력에 의하여 밀려났던 鄭 장군은 10·26~12·12 기간의 격동기를 술회한 녹음테이프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정리를 부탁하였다. 나는 녹취록을 작성하고 해설을 곁들여 그해 투표일 한 달 전에 출판하였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이듬해 국회의 5共 청문회에 자주 등장하였다. 지금은 故人(고인)이 된 鄭 장군의 술회는 다음과 같았다.

    <계엄사 합수본부(본부장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서 어느날 '김계원 비서실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수사하다가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은 돈이 9억원이 나왔습니다. 그냥 압수하여 가져오려다가 박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남겨놓은 재산이 없는 것 같아 그 가족이 앞으로 생계가 어려울 것이 염려되므로 그 돈 9억원 가운데 6억원은 박근혜양에게 주고 1억원은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비로 쓰도록 빼놓고 2억원은 여기 가져왔습니다'고 보고해왔다. 천만원짜리 수표 20매가 든 봉투였다. 나는 일이 그렇게 처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직감하였다. 회수해오도록 지시를 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 가족에게 건네준 돈을 다시 찾아오는 것은 그들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 가족을 도와주어야 할 입장이었던 당시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처리할 것을 인정하면서 완곡하게 지시하였다.

    '박 대통령의 가족에 대한 생계대책은 앞으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상의하여 국무회의 등에서 적당한 방법을 마련하여 예비비 등에서 처리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인데, 너무 서둔 것 같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2억원을 비서실장 최인수 준장에게 내어주고 은행에 예금하여 보관하도록 조치하였다.>
    나는 그 뒤 金桂元 비서실장 보좌관이던 權肅正(권숙정)씨로부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합수본부의 한 중령이 와서 비서실장 금고 안에 있던 돈(9억원이 아니고 9억5000만 원)의 처리 지침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朴 대통령의 장조카 朴在鴻(당시 동양철관 사장)씨와 합수본부 중령의 입회 하에 權 보좌관이 근혜씨에게 6억원의 현금과 수표가 든 샘소나이트 가방을 전달하고, 영수증도 받았다.

    6억원의 성격은 청와대 비서실장이 관리하던 돈으로서 서거한 대통령의 딸에게 준 '생계비'라는 것으로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