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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朴槿惠 당선자:
화도 차분하게 내는 사람
그는 '송학사'란 노래를 잘 부른다. 박자 음정이 정확하고 격이 있는 창법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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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4년 4월에 쓴 것이다.
朴 당선자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다.
기자가 박근혜(朴槿惠)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봄, 그녀가 38세 때였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비극을 두 차례나 겪은 사람답지 않게 朴씨는 밝은 표정이었고, 옷맵시가 깔끔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장학회 사무실에서 만난 朴씨는 인터뷰를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딸이 나서서 아버지를 변호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말도 듣고 있지만,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버님의 은혜를 입었던 분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나서겠어요."그녀는 특히 정인숙(鄭仁淑) 여인 피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해명을 하지 않아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 첫 만남에서 박(朴)씨는 김종필(金鍾泌) 당시 신민주공화당 총재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기자가 신민주공화당 당보에 쓴 글에서 이 당을 '朴대통령의 嫡子(적자)'라고 쓴 데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朴대통령 서거 후 유신체제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것이 朴씨의 가슴에 오래 남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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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씨가 정치를 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동기는 아버지에 대한 세간의 비판,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데 대한 울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자는 주로 박정희9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서 현재의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씨를 자주 만났다.朴씨는 나의 시각을 교정해주기도 했다.
朴대표는, 기자가 쓴 글 중에서 朴대통령을 '생래적 반미주의자'라고 쓴 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아버지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한 일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셨지만 국내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잣대로써 간섭하는 데 대해서 불만이 많으셨습니다."
기자가 쓰고 있는 朴正熙 전기의 제목이 되기도 한 朴대통령의 유명한 말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대해서 朴대표는 이런 설명을 했다.
'아버님은, '나도 국민의 인기를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시면서 '역사는 나를 알아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을 안 먹으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시기도 했습니다."朴대표는 아버지가 최규하(崔圭夏) 당시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정렴(金正濂) 청와대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김종필(金鍾泌)씨를 다시 총리로 기용한 뒤 스스로 하야하여 JP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만들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최규하 후계자설'은 朴대표의 JP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박근혜(朴槿惠)씨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의 절제일 것이다.
'배은망덕한' 김재규(金載圭)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화를 낼 때도 차분한 말로써 한다.
그렇게 전해지는 싸늘한 분노가 더 오래 기억되었다.朴대표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朴正熙 일가의 청와대 생활이다.
1974년 부모와 함께 승용차 편으로 울산 현대조선소 진수식에 참석하려고 내려갈 때의 이야기."차중에서 두분이 노래를 부르시기 시작했어요.
두만강 푸른 물에...황성옛터, 짝사랑 등을 합창하시는데 화음이 잘 맞았어요.
저는 가운데 앉아 있었으니 스테레오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1999년에 <월간조선>(月刊朝鮮)이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녹음테이프를 구해서 부록으로 낸 적이 있었다.
그 테이프를 朴대표에게 들려주었더니 흐느끼는 것이었다.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눈물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朴대표는 아버지처럼 말을 정확하게 하려고 한다.
상대방이나 상황에 맞추어 주는 실없는 이야기나 과장법이 거의 없다.
항상 주견(主見)을 세우고 중심을 잡는 모습이다.그러니 늘 긴장된 자세이다.
朴대통령도 그러했다.
朴대표나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차중에서도 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朴대표는 아버지에 관한 한 한 점의 과오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의 입장에서 보기엔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그래도 전 정권(朴正熙)을 공격하지 않은 유일한 경우인데도 朴대표는 全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이 아니다.
全斗煥 정권이 구국봉사단의 최태민(崔泰敏)씨를 수사하여 혼을 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 물어보면, 朴대표는 날카롭게 반응한다.
구국봉사단의 총재였고 이름이 새마음봉사단으로 바뀐 뒤에는 고문이었던 崔씨가 박근혜(朴槿惠)씨의 후광을 이용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는 당시 수사기관의 견해도 그는 단호하게 부정한다.박근혜(朴槿惠) 대표는 '송학사'란 노래를 잘 부른다. 박자 음정이 정확하고 격이 있는 창법이다.
1996년에 <월간조선>(月刊朝鮮)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장모 생일 파티 장면 녹음 테이프를 부록으로 낸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가족들이 노래를 하나씩 불렀는데, 근혜(槿惠)씨는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
家庭事(가정사)에서도 정치적 선곡(選曲)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박근혜(朴槿惠)씨의 정치적 감각은 김정일(金正日)을 찾아가 만난 장면의 사진으로 해서 지지층과는 어긋난 경우가 있었다.
2002년 대선(大選)을 앞둔 시점이었다.'어머니 암살 지령자와 오누이처럼 사진을 찍었다'는 비난이 거셌다.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녀의 정치 생명은 끝이라고 본 사람들도 있었다.
김정일(金正日)을 만나고 온 뒤 朴대표의 대북(對北) 발언도 달라졌다.많은 한국의 보통사람들은 박근혜(朴槿惠) 대표에 대해 빚을 진 느낌을 갖고 있는 듯하고, 이것이 그의 대단한 대중동원력이 되고 있다.
이 땅에서 굶주림을 물리친 아버지, 조선여성의 전형처럼 단아한 어머니가 흉탄에 갔고 그 외아들은 장가도 들지 않고 살면서 약물사건에 자주 휘말리는데, 아버지처럼 강인하고 어머니처럼 깔끔한 이미지의 박근혜(朴槿惠)씨가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오니 대중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고, 이것이 한나라당의 기사회생(起死回生-2004년 총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朴槿惠 대표를 '한국 보수층의 잔다르크'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본인은 스페인 필립 2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의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번 총선이 만들어낸 인물, 이번 총선을 통해서 차기 대통령감으로 확실하게 커버린 인물이 박근혜(朴槿惠) 의원이다.
朴대표를 파키스탄의 여자 수상 부토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좀 억울한 비교일 것이다.
부토 수상의 아버지 부토는 유명한 선동 정치가였다.
그는 파키스탄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 딸 부토는 수상이 되기는 했지만, 파키스탄의 내정(內政)은 엉망이 되었다.
그의 남편은 부정부패의 중심 인물이었다.
아직도 영주(領主) 같은 지주(地主) 계급이 기득권을 형성하여 나라를 끌고 가고 있는(또는 망쳐가고 있는) 파키스탄이 한때는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모델이었다.1960년대에 아유브 칸이란 군사지도자가 등장하여 파키스탄을 개혁해가는 것을 보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그룹이 모델로 삼으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아유브 칸을 실각시키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 아버지 부토였다.
부토는 위선적인 민주주의로써 아유브 칸의 근대화를 뭉갠 사람으로 평가된다.박근혜(朴槿惠) 대표는 기자에게 아버지가 쓴 청와대 일기를 상당 부분 건네주어 기사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2년 3월 20일의 일기는 북한이 뚫은 땅굴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이런 판인데도 북괴 남침 위협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의 그 무책임한 소리가 이러고도 또 있을 것인가.
오 신이여, 북녘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남북관계의 본질은 아버지 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이 핵폭탄을 2-3개 갖고 있음이 더욱 확실하게 된 오늘,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역사적 역할은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그의 생각과 행동에 의하여 마련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은 '미소 짓는 악한'이다.
이 부자의 미소 뒤에 있는 악마성을 놓친 사람들은 다 뒤끝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과 무슨 거래를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그 뒤를 보라!행여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김정일 덕으로 정치적 이득을 구해보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딸 부토의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될 것이다.
딸 부토의 실패로 인해 '그 딸에 그 아버지'란 재확인을 받았으니 말이다.박근혜씨가 김정일을 잘못 보고 행동한다면 국가는 물론이고,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朴正熙)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김유신(金庾信)의 명언을 다시 인용한다.
'우리의 정직으로써 적의 굽은 곳을 치면 백전백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