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 김낙환 박사"우남 이승만의 신앙적, 사상적 배경"
  • ▲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윤희성.
    ▲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윤희성.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가 주최하는 '이승만포럼'이 지난 8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제21회를 맞았다. 

    이날 목회학 박사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가 발표자로 나서  우남 이승만 박사의 신앙적, 사상적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1888년 한국에 들어온 캐나다인 목사 제임스 게임과 청년 이승만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논하면서 둘의 멘토링을 집중 조명했다.

    또, 김낙환 목사는 그간 깊이 있게 평가된 바 없던 게일 목사의 업적과 일대기도 생생히 전달했다.

    다음은 발표문 전문이다.  

     

    제21회 이승만포럼
    2012. 11. 8(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제임스 게일과 청년  이승만의 멘토링 관계
                         
                 

    김낙환(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 목회학 박사)
                                   * <우남 이승만 신앙 연구> <시집 보물상자>의 저자

    I. 들어가는 말

    요즈음 들어 멘토링(Mentoring)이란 단어는 아주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리더십 전문가, 팀 엘모어( Tim Elmore)는 ‘멘토링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나눔으로써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을 더 해주는 관계적 경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멘토링을 쉽게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이 잠언(箴言)서에 나타나고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철이 철을 통해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성장하고 지혜가 자라는  것이다. 성장 잠재력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멘토(Mentor)라고 하고, 멘토의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라고 하고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멘토링(Mentoring)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남 이승만(李承晩, 1975-1965)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한국 현대사의 핵심인물이다. 우남은 소년기에 동양(東洋)의 전통학문인 유학(儒學)을 공부하였고, 어머니로부터는 불교(佛敎)를 배우고, 청년기에는 배재학당에서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통하여 신학문(新學問)과 접하며, 기독교라는 서양종교에 접하게 되었다.

    우남은 본래 유인(孺人) 혹은 불교(佛敎)인이었으나 한성감옥의 5년 7개월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견디며 기독교(基督敎) 신앙인으로 회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이후에는 평생을 기독교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신 분이었다. 기독교인이 된 우남은 유교정신이 조선(朝鮮)의 국기(國基)가 된 것처럼, 기독교 정신이 국기가 되는 자유(自由)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남은 1904년 여름에 한성감옥에서 저술한『독립 정신』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데, 이 교〔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요...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에 근원(根源)을 삼아,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 미 각국과 동등이 되리라.

    멸망 지경에 도달한 대한제국이 부흥하여 미국이나 영국 같은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기(國基)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동양의 전통사상인 유학를 공부하고, 그 사상을 신봉했던 우남이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 그리고 그가 신앙적, 인격적으로 성장하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는 우남의 성장을 지켜보고, 우남을 사랑하고, 우남이 가진 놀라운 잠재력을 보면서 우남을 도왔던 몇 분의 멘토들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분들은 구한말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을 찾아오신 몇 분의 선교사(宣敎師)들과 선각자(先覺者)들이었다.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젤러(Rev. H.G. Appenzeller)를 비롯하여 캐나다 의료 선교사인 에비슨(Oliver R. Avison), 그리고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가 미국에 가서 선진교육을 받고 돌아온 개화파 애국자인 서재필(徐載弼)박사, 윤치호(尹致昊) 박사, 그리고 연동교회 담임자로서 30여 년간 한국에서 사역을 하신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과 같은 분들이다. 특별히 오늘은 이승만과 게일의 관계를 집중하여 조명하면서 두 분의 멘토링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II. 우남 이승만의 신앙적, 사상적 배경(背景) 

    열아홉 살이 되도록 동양적인 세계관과 중국, 애국사상을 터득했던 우남은 1894년에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당공부를 중지하고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895년 2월에 신흥우의 형, 신긍우의 권유로 서울 정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선교학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배재학당을 다니며 여러 명의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신학문(新學問)을 수학하고, 영어(英語)를 배우며 기독교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남이 어려서부터 청년기까지의 경험들, 그동안 끊임없이 배우고 익힌 유교(儒敎)적 사고(思考)들, 그리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에게 받은 불교적 영향들은 우남이 기독교인(基督敎人)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커다란 방해거리가 되었다.

    우남이 회심하기 전에 마음 상태를 그의 전기(傳記)를 쓴 이원순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아직 불교도인 어머니가 우남이 배재에 다니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에 우남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기묘(奇妙)하게 생각되는 것은 1900년 전에 죽은 사람(예수)이 내 영혼을 구해 준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자문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 이야기를 해 주던 이상한 사람들이 이처럼 바보 같은 교리를 믿을 수 있을까? 확실히 그들은 이 무지한,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따라서 가난하고 무지(無知)한 사람만이 교회에 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위대한 불교의 지식이나 유교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교양있는 학자는 결코 이와 같은 교리(敎理)에 미혹(迷惑)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자 나는 아무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배재학당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후에 배재학당을 다니는 동안 기독교에 대한 우남의 생각들이 변해 가는 모습을 이원순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나는 새벽예배에 이따금 참석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구원(救援) 이상의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동포애(同胞愛)와 봉사의 복음을 나에게 베풀어 주었다. 나는 이 외국 종교가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었고, 그리스도는 공자(孔子)와 동일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가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생각 할 수는 없었다.

    이 이야기는 그가 투옥되기 전까지의 정치운동을 하던 시기에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우남의 자세와 감정을 명확하게 나타내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남이 1899년 초에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를 영입하여 새로운 혁신내각을 조직, 급진적인 정치 개혁을 추진하려는 음모(陰謀)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약 7개월 간 미결수의 생활을 강요당하게 되는데, 이때에 우남은 자신이 조만간에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심각한 종교적(宗敎的)인 고뇌를 겪게 되었다.

    우남은 캐나다 의료 선교사인 애비슨(Oliver R. Avison)박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성경을 차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에비슨을 통하여 임수된 신약성서(新約聖書)를 탐독하던 우남은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회개(悔改)하고 기독교에 귀의(歸依)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남은 이러한 일련의 회개의 과정에 관해서 자신의 영문 투옥경위서(Mr. Rhee's Story of His Imprisonment)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선교학교〔배재학당〕에 다닐 때에는 그 책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나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선교학교(배재학당)에서 어느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Oh God, save my soul and save my country.)”〔그랬더니〕금방 감방이 빛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을 누리면서 나는〔완전히〕변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그 때까지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증오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남은 성경을 읽던 도중에 자신이 배재학당에 다닌 시절에 들었던 선교사의 설교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경무청 감방에서 무거운 형틀을 쓰고,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앙적인 경험으로 인하여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배우고 경험해 온 불교 혹은 유교인의 자리에서 기독교인(基督敎人)으로 회개하고 개종(改宗)하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남의 기독교 신앙생활(信仰生活)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남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순간,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어둡고 침울했던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찾아 온 것이다. 이 짤막한 기도야 말로 유가(儒家)에서 태어났고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의 영향 아래에서 자란 우남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남은 대한민국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정신이 근간(根幹)이 되는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 ▲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윤희성.
    ▲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윤희성.

    III. 선교사, 목사인 제임스 게일(Jamce S. Gale. 1863-1937)

    우남이 회심(悔心)하는 과정에 또한 출옥한 한 이후에 세례를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하는 과정,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YMCA에서 학감(혹은 한국인 총무)으로 일하는 모든 과정에 우남의 성장을 지켜보고 우남을 돕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은 바로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이라는 분이었다. 게일은 우남을 만난 이후로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 가지로 우남의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특별한 후견인(後見人), 멘토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가. 게일의 생애(生涯)

    게일은 1863년 2월 캐나다 온타리오 주 엘마(Elma)에 개척 농장에서 장로교회 장로인 아버지의 5남 1녀의 자녀 중 다섯 번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884년 토론토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에 재학 중에 프랑스에 가서 불어를 공부하고 선교(宣敎)단에서 일하면서 교파를 초월한 선교방법을 배웠다. 1886년 북미 하령회(夏令會)에 참석해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외지 선교를 할 것을 결심하였다.

    토론토대학 기독교 청년회(YMCA)의 지원을 받고 평신도 선교사로서 25세의 나이로 1888년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게일은 조선 어를 배우기 위하여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깊은 시골로 들어갔다. 조선에서 개신교회가 철음으로 세워진 솔내마을로 공부를 하러 간 것이다.  그는 솔내에서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도인 서상륜의 집에 하숙을 하면서 조선어를 상당히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머물렀다. 후에 게일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외국인 한국어 학자로 간주 되었는데 한자(漢字)에 대한 지식은 그 어느 외국인도 따라갈 수 없었다. 솔내에 있는 동안 그는 전적으로 조선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1889년 3월 황해도 소래에서 평생의 조사(助事)가 된 이창직을 만나 한글, 한문, 풍습을 공부하고 마침내 1900년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게일은 자신을 파송한 토론토대학 청년회에서 선교비가 끊어지자 1891년 미국 북장로교회로 전직(轉職)하였고,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1897년 5월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다. 의료 선교사 헤론이 죽고 2년이 지난 1892년 4월에 이미 자녀가 둘이나 있고, 자신보다 세 살이나 위였던 헤론의 미망인 깁슨과(Harriet Elizabeth GIbson)과 결혼(結婚)을 하였다. 그러나 깁슨 여사도 1908년 병으로 인해 16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 게일은 1910년 4월 영국인 실업인의 딸, 아다 루이사 세일(Miss Ada Louisa Sale)과 재혼하였다. 부인 아다와의 사이에 삼남매를 두었으나 둘째는 어려서 죽어 양화진에 매장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39년간 사역하다가 영국의 베스(Bath)라는 곳에서 십여년 동안 아내와 더불어 남은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74세를 일기로 오르몬드 로지(Ormond Lodge)라는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 게일의 사역(使役)

    게일은 부산(1889-1891), 원산(1892-1897), 서울(1900-1927) 평양등지에서 사역하였다. 연구와 탐사를 위해 걷거나 말을 타고 한반도를 무려 25회나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정리하면 1. 지역 순회전도 활동과 연동교회에서의 목회활동, 2. 예수교 학당인 경신(敬信)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의 교육활동 3. 한국학 연구와 저술활동 그리고 성경번역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863년 2월 캐나다에서 출생
    1888년 12월 25세 나이의 선교사로 한국 부산에 옴
    1892-1897 원산에서 활동 
    1892년 헤론의 미망인 깁슨과 결혼
    1897년 그리스도 신문 주간(主幹)
    1900년 가족들과 더불어 서울로 상경, 연동교회 담임
    1901년 연동교회 부속 건물에서 예수교 학당의 후신인 경신학교, 정신학교
           시작   
    1903년 황성기독청년회(YMCA) 창립
    190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회장
    1910년 아다와 재혼, 성서공회 성서개역위원으로 활동
    1927년 64세의 나이로 한국을 떠남
    1937년 7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게일목사는 25세 젊은 나이에 한국에 나와서 사역(使役)을 하다가, 후에 미국 북장로교회로 적을 옮겨 연동교회에서 근 30년간 목회(牧會)를 하면서 교회를 안정시켰고, 목회의 분주한 틈을 내어 많은 문서(文書)분야의 사역을 감당한 재능이 있는 선교사였다.

    게일은 교육에도 뜻을 두어,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후에 피어선 성서신학원 원장으로 교육 일선에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게일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남긴 공헌, 특히 문서분야의 공헌은 아무리 칭찬해도 과(過)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의 사역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담임한 연동교회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국전체를 상대한 큰 그릇으로서 선교하는 것(선교사)과 가르치는 것(교육가), 글을 쓰는 것(저술가)이었다.

    다. 게일의 번역 및 문서 활동 

    천성(天性)이 학자로서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가 대단해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4시까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는 서양에서의 한국학의 효시(曉示)라고 지적될 수도 있는 훌륭한 저서들을 많이 저술했는데 그의 번역물인『텬로역정(天路歷程)』은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선비들을 개종(改宗)시키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책자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순례자의 과정(Pilgrim's Progress)’의 번역물인데 기독교인이 수많은 유혹과 역경을 헤치고 천성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한성 밖의 세상에서도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이었다.

    게일은 문인(文人)으로서 수많은 책을 썼는데 그 중『코리언 스켓치』라는 책은 구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 책에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만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한번은 게일 선교사가 순회전도를 하는 중, 어느 집에서 고기를 주었다고 한다. 너무 배고파 고생하던 게일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그 고기를 맛있게 먹고, 너무 맛있어서 그 고기가 무슨 고기냐고 물어보았는데, 그 고기를 대접했던 조선인이 그 고기는 개고기라고 하자 그는 너무 놀랐다고 한다. 서양인들에게 개고기를 먹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 이 후로 노란 개만 보면 군침을 흘렸노라.’ 모두 43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889년 대영 성서공회의 회원으로 언더우드를 도와〈한영사전〉편찬 
    1890년 성서공회 전임위원으로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서, 요한1서를 번역,
    1891년〈한국어 사전〉을 편찬, 세 번의 개정판을 출판
    1892년 이창직의 도움으로〈성서〉,〈사과지남(辭課指南)- 한국어 문법책〉, <천로역정〉번역 출판함. 언더우드가 신(神)-God 을 ‘천주(天主)’로 번역하려고 한 것을 ‘하나님’ 이라는 용어(用語)로 주장하여 관철하다. 
    1897년〈그리스도신보〉로 시작해서〈기독신보〉로 바뀌기까지 10년간 주필 이 됨
    1898년 수필집〈한국만록(韓國漫錄)〉출판   
    1905년 한문(漢文)독본인〈유몽천자〉4권 집필, 영문소설〈첨병〉– 북한 기독교 확장 역사를 기록한 책, 서울의 역사인〈한양〉,〈루터교 기략〉, <성경요리문답〉,〈의회 통용규칙〉집필, 출간
    1909년〈과도기의 조선〉집필
    1913년〈한국 풍속도- 코리언 스케치〉와〈한국 활자에 대한 소고〉출판,〈예수의 재림〉번역
    1917년〈시가(詩歌) 연구〉,〈찬송가 개편 착수〉
    1919년 김창업의〈연행록〉을 부분적으로 번역,〈옥중화(獄中花)〉를 번역해 <춘향전〉으로 발표
    1922년〈구운몽〉영어로 번역
    1920-24년〈연경좌담〉,〈야소인의 인격〉,〈구약예표〉,〈류황 곽도긔〉,〈선영대조대학〉,〈양극탐험〉,〈영미 신이록〉,〈소영웅〉,〈그루소 표류기〉,〈기독성범〉,〈와표전〉,〈모자 성경문답〉,〈덕혜입문〉,〈나사렛 목수 예수〉
    1925년 사역으로 성경신역〈신.구약 전서〉, 그 외에〈언문소고〉,〈금강산지〉,〈한국 결혼고〉,〈원각사 탑기〉,〈한국 문헌록〉, 이지향의〈표해록〉을 번역하였다.
    1927년  마지막 글은 한국의 풍속과 유적을 연구한〈한국 민족사〉가 있다.

  • ▲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윤희성.
    ▲ 김낙환 대전 옐림교회 담임목사.ⓒ윤희성.

    라. 게일과 옥중에 있던 양반들과의 만남

    게일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수시로 감옥을 찾아가 성경 및 기독교 서적을 차입해 주고 전도하였다. 게일은 한국인 개혁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개혁파 정치인들과 개인적인 신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1989년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사건으로 한성 감옥소에 전후에 투옥된 후 옥중에서 선교사와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예수 믿기를 결심하였는데 감옥 안은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토론하는 옥중학교, 옥중 도서실로 인해 화해, 감격과 감동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게일은 그의 저서『전환기의 한국』에서 복당(福堂: 한성감옥)에 모인 정치범들의 성경연구 및 기도반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벙커 목사 부부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이들〔이승만 유성준, 김린,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등〕의 감옥은 처음에는〔진리〕탐구의 방(an inquiry room)으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이 되고 그 다음에는 예배당(a chaple for religious exercise)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 신학당(a theological hall)이 되었다. 이 과정을 끝내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감옥에서 내보내어 사역하도록 하셨다. 그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우수한 한문 실력 때문에〔이 나라〕수도의 기독교계에서 최초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1901년 3월 귀양살이에서 서울 감옥으로 이송된, 이원긍은 게일목사 등 선교사들이 찾아가 간절히 예수 믿기를 권함으로써 점점 뜨겁게 감동되었다. 1902년 두 번째 투옥된 이상재는 성경을 읽는 도중 마태복음 5-7장에 감명을 받은 뒤, 선교사 벙커 목사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옥중 세례(洗禮)를 받았다. 그는 출옥한 후에 게일을 찾아 연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역시 1902년에 투옥된 김정식은 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목사의 끈질긴 전도에 의해〈무디의 설교집〉을 읽고 개종하였다. 그는 후에 일본에 있는 한국 청년기독교회(YMCA) 총무가 되어 기독교 지도자로 평생을 헌신하였다. 

    한성 감옥에서 출옥한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은 출옥 후 연동교회에 있던 게일을 찾아 갔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옥중에서 신자가 된 사대부들이 선비 못지않게 박식(博識)하고 개방(開放)적인 게일목사를 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이들보다도 출옥시기가 늦었던 우남도 석방 후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게일의 전기를 저술했으며, 한국에 와서 성공회 신부로 지낸 러트(Richart Rutt)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연못골교회(연동교회)는 새로 기독교에 입교한 독립협회 회원들의 집합처럼 되었다. 그들은 일찍이 과격한 정치 운동을 하다가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다. 게일은 특히 이원긍, 즉 학자이며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유명한 사학가 이능화의 부친을 좋아 했으며, 일찍이 경무관 벼슬을 지낸 김정식, 초대 우정국장이며 한국 초기의 초창기의 신교육과 독립협회 창설에 주동 역할을 한 이상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게일은 이승만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이 개화파 지도자들은 상류 지식인들로 기독교 신자가 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의 몇 사람은 다년간 연못골에다 교적(敎籍)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게일이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며 확신을 갖게 된 점은 그들의 교육사상과 종교 사상이었다. 

    러트의 말에 따르면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게일목사가 이들에게 가진 관심이 특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 게일에 대한 평가(評價)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략 1500여명으로 산정하는데 그 중에서 게일만큼 특이한 선교사는 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일(奇一)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기(奇)이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탁월한 언어학자로, 저술가로, 번역가로 목회자로 한국학의 대가(大家)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게일목사는 당시의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다른 선교사들보다도 한국어에 능통하였고,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그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학 등 한국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상당한 식견(識見)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이 성서 중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게일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을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구한말에 누구보다도 서양 문명과 사람들에 대하여 정통하였던 윤치호(尹致昊)는 “게일박사는 상상 이상의 박식(博識)가요 문학가입니다. 지금까지 조선에 온 서양 선교사로는 그 재주와 박식에 있어서 씨(氏)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게일은 조선 문화의 예찬(禮讚)자이었고 조선 문학과 명현들의 경전(經典)에 통달한 거인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청년 우남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에 대한민국의 큰 지도자가 될 우남의 잠재력(潛在力)을 알아보고 그의 신앙적 인격적 성장을 도운 것은 게일의 커다란 공로(功勞)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교수로 평생 동안 선교사 게일을 연구한 유영식교수는 다음과 같이 게일을 말하고 있다. “게일은 선교사인 동시에 문인이었다. 당시 조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은 고전번역, 사전편찬 등 여러 업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한국화’를 강조한 분으로 한국의 근대화(近代化) 시기에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다.”고 설명했다.

  • ▲ 이승만포럼이 열린 중구 정동제일교회 입구.ⓒ윤희성.
    ▲ 이승만포럼이 열린 중구 정동제일교회 입구.ⓒ윤희성.

    IV. 우남과 게일의 멘토링 관계

    정부 타도를 획책했다는 황국협회의 무고로 1898년 11월에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우남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승만에게는 마음의 해방이 생겼다. 그것은 기독교로 개종(改宗)한 일이었다. 이것은 1904년 장로교 목사 제임스 S. 게일의 조력(助力)에 의한 것이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하자 급격한 정치적인 변혁으로 정치범에게 석방의 특사가 내려지자 가장 늦게 출옥한(8월9일) 우남은 게일 목사를 찾아가 그의 지도와 세례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게일 목사는 그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으므로 감리교회에 우선권이 있다고 세례 주는 것만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게일은 우남이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게일의 편지를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 편지는 우남이 미국으로 출국 할 때에 지닌 것으로 후에 그에게 세례를 준 장로교 계통의 햄린(Lewis T. Hamlin) 목사에게 전달이 되었다.

    친애하는 햄린 박사님,
    그는 모국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고 가지각색의 물불의 시련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련을 통해서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가 정치범으로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많은 죄수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였는데 지금 저의 교회의 으뜸가는 교인들 중에는 그가 인도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고 또 그가 인도한 사람들이 다른 장로교회에도 있습니다.
    이 씨는 몇 달 동안이나 족쇄를 차고 앉아 있었고 또 쇠사슬에 묶인 징역수들의 중노동작업에도 참가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도의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며, 국회나 백성들의 모임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정부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게일은 우남이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하게 간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남이 반도에서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중에 가장 앞서가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게일의 소개서를 받은 햄린 목사는 우남을 조지 워싱톤 대학의 총장이며 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인 찰스 니드햄 박사에게 소개해 우남은 장학생으로 2학년에 편입 할 수 있었고 세례는 같은 해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을 통해 워싱턴 디씨에 있는 커버넌트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Covernant)에서 햄린, 자신이 손수 베풀었다. 실제로 우남은 햄린과 자주 만나기도 하였고, 우남은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올리버가 수집한 기록에 의하며 햄린 박사는 1월 6일에 2달러, 1월 8일에 3달러를 우남에게 주었다고 한다. 

    게일은 햄린 목사에게만 아니라 또 다른 추천서도 쓰고 있다. 이광린이 번역한『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에 소개된 것을 보면 이 추천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워싱톤 및 미국 각지의 기독교인 형제들에게
    1875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승만씨를 소개 합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한학 교육을 훌륭하게 받았지만 현대에는 이로써 부족함을 느껴진 영어와 기타 학문을 공부하는데 정력을 쏟아 왔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신봉했으며 한국이 독립해야 할뿐 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잠에서 깨어나 생각하고 생존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중략) 그는 투옥되기 전 복음에 대해 들었으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처지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온 정성을 하나님께 바친 뒤에 동료 죄수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추천서를 통하여 장로교 선교사 게일이 얼마나 우남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를 사랑하며 우남의 장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일이 ‘이 분은 독립을 믿습니다’라고 한 표현은 이승만의 옥중생활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게일은 바로 우남의 이러한 뛰어난 점들을 간과(看過)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남은 하버드대학 재학 시부터 졸업 후 자신의 진로문제에 대하여 서울에 있는 게일(James S. Gale)과 간간이 편지(便紙)로써 조언을 구했다. 게일은 한결같이 한국에는 할 일이 많다고 강조하면서 꼭 귀국하여 함께 일할 것을 권고하였다. 게일은 우남이 황성 기독교청년회, 즉 서울 YMCA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고 결국 서울 YMCA로부터 최종적 제의를 받은 우남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다음날(7월19일) 취임수락의 편지를 썼다. 우남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YMCA의 한국인 총무로 활동하는 동안(1910-1912)도 게일과 자주 교제하였다. 게일이 교장으로 있던 정신여소학교와 경신남소학교 졸업식이 있을 때에 이상재와 더불어 참석해서 이상재는 기도순서를, 우남은 성경봉독(聖經奉讀)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남이 귀국 후에도 계속해서 게일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V. 나가는 말

    우남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에 그를 영적(靈的)으로 돌보았던 게일은 그가 회심(悔心)할 수 있도록 조력하였고,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남이 공부를 마친 후에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세운 YMCA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우남의 또 다른 스승이요, 멘토였던 것이다. 게일은 우남의 잠재력(潛在力)을 보았고, 그 잠재력을 개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분이었다. 게일이 가진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이 우남을 영적(靈的)으로, 인간적(人間的)으로 성장(成長)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게일의 수고는 초대 대통령이 된, 신앙인 우남을 통하여 이 땅에 지금도 가시적인 열매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게일과 우남의 멘토링 관계를 살펴보려고 노력하였다. 이 글에서 미진한 부분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해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우리는 모두 또 다른 게일이 되어서 이 땅 위에 영적성장을 기다리며, 목말라 하는 수많은 멘티들의 잠재력을 깨우고 그들의 성장을 돌보는 지도자들이 될 수 있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한다.

    <부록1>미국에 가는 우남을 위하여 게일이 써 준 추천서 I

    워싱톤 및 미국 각지의 기독교인 형제들에게

    1875년 서울에서 출생한 조선인 이승만(李承晩)을 소개 합니다. 그는 구식 한학 교육을 훌륭히 받았으나, 일찍이 현 시대의 세계에서 이것으로 부족함을 깨닫고 새로운 학문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영어와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데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으며, 조선을 독립되어야 할 뿐 아니라 조선인들은 지둔(遲鈍) 함에서 깨어나 올바르게 사고하며 생존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일간지 매일신문(每日新聞)을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후에는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하여 영어 번역물을 싣는 한편 자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습니다. 이것은 보수적인 조정의 생각에 상반되는 것으로써, 이씨는 1897년 9월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7개월 동안 그는 무게가 20 파운드가 넘는 나무 칼(cangue)을 썼는데 여기에 고통이 더하도록 두 발에는 족쇄(Stocks)까지 채웠습니다. 그 동안 동료들이 끌려 나가 구타당하고 고문을 받아 혼절하거나 참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처형장의 둔탁한 칼 소리에 따르는 모든 감정을 알고 있었으며 이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 번 조간신문에 ‘이승만(李承晩)이 감옥에서 참수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깨에 두꺼운 쇠사슬을 묶고 뒤에다 맹꽁이 자물쇠가 채워진 채 죄수부대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만나 토론하고 담화하고 상호 발전을 기할 수 있는 민중 집회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투옥되기 직전에 복음을 들었습니다만 고통 속에서도 오직 믿음을 쌓아갔습니다. 즉 자신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복음전도에 나서자, 동료 죄수들이 구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해에서 그에게 보내온 중국서적으로 감옥에 도서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씨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 중에는 워싱턴 주재 초대 공사관 서기관 이상재 씨가 있습니다. 그 분은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지난번 세계 문학 작품집에 이름이 특기되어있는 이원종이라 사람과 1895-1896년 조선경찰 총수였던 김충직 씨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 수는 모두 40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모두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에 감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는 재판을 받고 장(杖) 일백 대에 종신중노동형(終身重勞動刑)을 선고 받았다가 지난여름 (1904년 8월 9일)에 사면 석방되었습니다. 이 한 사람의 황인은 그가 겪은 시련을 생생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유로운 미국 땅에서 백인 형제들 중에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기를 바라며, 그가 그곳에서 공부하고, 관찰하고, 저술도 하려는 3년 동안 용기를 북돋워 주어 귀국 후 그의 동포들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는 신사로 태어났고 학자이며 하나님의 종 기독교인이기에 아주 훌륭한 친구입니다.

    제임스 게일 (Jas S. Gale)
    장로교 조선 선교사
    선구자의 저자
    1904년 11월 2일 서울에서   
    (소책자 1부 동봉함)


    <부록2>미국에 가는 우남을 위하여 게일이 써 준 추천서 II

    게일이 햄린에게
    서울, 대한민국, 11월 3일 1904년

    루이스 햄린 목사 (The Rev. Lewis S. Hamlin, D.D)
    워싱톤 계약교회 (Church of the Covenant Washington, D.C.)

    나의 친애하는 햄린 박사님  

    저는 서울의 이승만씨를 소개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모국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고 가지각색의 물불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그가 정직(正直)하고 충실(忠實)한 기독교인(基督敎人)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많은 죄수들에게 진리(眞理)를 알게 하였는데 지금 저의 교회의 으뜸가는 교인들 중에는 그가 인도(引導)한 사람들이 여럿 있고, 또 그가 인도한 사람들은 장로교회 중에도 있습니다.

    이씨는 몇 달 동안이나 족쇄를 차고 앉아 있었고, 또 쇠사슬에 묶인 징역수들의 중노동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도(半島)의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중의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며 국회나 백성들의 모임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정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씨는 주께서 더 높은 사업을 위해 부르셨을 때까지는 정치개혁 운동가였습니다. 그가 석방된 후로 저는 각종 모임에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그는 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지극히 진실한 간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세례(洗禮)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시내에 여러 교회가 그의 사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들이 그를 교인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그에게 대한 권리가 가장 적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방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있는 그에게 미국에 도착 할 때까지 기다려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세례(洗禮)를 받게 되기 원하며 목사님께서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이승만씨를) 자기 교회(敎會)에 받아들일 권리를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절친한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2, 3년간 일을 하면서 공부 한 후 돌아올 계획입니다. 저는 그가 당신으로부터 듣게 될 친절한 말씀과 당신의 도움들과 충고들에 대하여 그가 대단히 감사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의 최고의 존경하는 마음과 더불어 햄린씨 께 

    제임스 S. 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