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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李承晩)의 문장력

    한문(漢文)과 영어 어휘력을 합친 실력은 역대 최고일 것이다.

    趙甲濟    


     

  • ▲ 1910년7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한국인 최초의 미국박사.
    ▲ 1910년7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한국인 최초의 미국박사.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당시 한국인들 중 지적(知的) 수준이 가장 높았던 인물은 누구일까.

    단연 이승만(李承晩)이다.

    지능, 동서양의 학문에 대한 종합적 능력, 세계사의 흐름을 읽는 안목, 미국 조야(朝野)의 인사에 대한 영향력,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통찰력, 언어구사 능력, 판단력 등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능력을 종합했을 때 2위와는 상당한 차이로 이승만(李承晩)이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박사, 수많은 한시(漢詩)에서 보듯이 동양학문에 대한 깊은 지식,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하버드 석사-프린스턴 박사 경력, 여기에다가 찬란한 독립투쟁 이력. 그의 박사 논문은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대표작중 하나로 꼽힌다. 
       
    세계 역사상 그 나라의 최고 지성인-최고 지능인이 정권을 잡은 예는 흔치 않다.

    나폴레옹 정도일까.

    대한민국의 축복은 그런 최고 지성인이 정권을 잡아 낙후한 국가와 국민들을 이끌어가면서, 가르쳐가면서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평균적인 국민들보다 월등한 지도자를 만난 행운을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다.

    ■ 농지개혁, 
    ■ 국군 양성, 
    ■ 한미동맹 구축, 
    ■ 교육개혁, 
    ■ 원자력 연구 시작 등
    이승만 대통령의 어려운 결단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보통 국민들보다 수십년을 멀리 내다보는그를, 올리버 박사(대통령 고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위인'이라고 말했다.


     

  • ▲ 로버트 올리버 지음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표지.
    ▲ 로버트 올리버 지음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표지.


    李 박사의 실력은 말과 문장력에 녹아 있다.

    북한정권에 대하여 체제보장을 해주고 돈을 주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바보 겸 위선자들에게 이승만(李承晩) 건국 대통령이 미리 남긴 말이 있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타협할 수 없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에 보낸 연하장은 이런 漢文章(한문장)이었다. 

    筆力兵力必爲正義(필력병력필위정의)

    用之卽無敵不畏(용지즉무적불외)

    우리글로 바꾸며 이렇다.

    筆力(필력)과 兵力(병력)은 반드시 正義(정의)를 이룬다

    이를 쓰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敵(적)을 없앨 수 있다

    김정일 세력과 대결하는 데 언론인과 軍人(군인)들이 참고로 할 만한 글이다. 정보화 사회에선 글을 아는 이들은 모두가 기자이다.

    이념전쟁에선 필력(筆力)이 병력(兵力)이라는 건국(建國) 대통령의 지적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곳이 한국이다. 휴전선은 병력(兵力)으로 지키고 후방의 이념전선(戰線)은 필력(筆力)으로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 대포를 많이 쏘듯이.
     


  • ▲ 1949년 1월 이승만대통령 연두회견 기사. 대마도 반환 요구 방침을 밝힌 동아일보 머리기사 지면.
    ▲ 1949년 1월 이승만대통령 연두회견 기사. 대마도 반환 요구 방침을 밝힌 동아일보 머리기사 지면.


    정부 수립 사흘째 되던 1948년 8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 외무부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듬해 연두회견에서도 李 대통령은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우리 땅이었으니 돌려달라'고 했다. 

    "만일 그 뒤 정부에서도 이를 주장했다면, 적어도 일본의 독도 망언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일보 崔普植 기자 인터뷰에서 강효백 교수가 한 말

    독도와 이어도는 1952년 李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으로 우리 것이 되었다.

    왜 종북철부지들이 李 대통령을 싫어하는지 알 만하다. 종북(從北)주의자들은 뼈속까지 노예근성의 사대주의자들이라 본능적으로 자주와 독립정신을 가진 이를 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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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기념식. 일제의 식민통치를 맡았던 총독부 청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한 역사적 현장. 이날이 바로 '건국 기념일'이었다.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기념식. 일제의 식민통치를 맡았던 총독부 청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한 역사적 현장. 이날이 바로 '건국 기념일'이었다.


    공산당의 선동을 이긴 李承晩(이승만)의 선동


    이승만(李承晩)은 이 역사적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私利私慾(사리자욕)주의자, 文明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범국민(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대중 조직이 가장 강하였다. 30여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李承晩)은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直系(직계) 조직은 없었다. 하지 사령관의 미군정(美軍政) 당국도 공산당을 건국(建國) 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대소) 봉쇄정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李承晩)은 이 역사적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私利私慾(사리자욕)주의자, 문명(文明)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므로 국가 건설과정에서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아마도 2차 대전 이후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일 것이다.
      

  • ▲ 5천년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선서를 하고 있다.(1948.8.15)
    ▲ 5천년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선서를 하고 있다.(1948.8.15)

    “(공산당 극렬분자들은)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他國)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爲主(위주)하는 자”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권(國權)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私利와 영광을 위하여 부언낭설로 인민을 속이며, 徒黨(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器(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名詞(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세인(世人)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奸計(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私慾(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李承晩)은 선전 선동 부분에서 공산당에 결코 지지 않는 전략(戰略)과 기술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形容(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 ▲ 한미안보동맹을 체결한 이승만대통령이 최초의 국빈방문한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한미동맹의 기념비적인 역사성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 양원합동 의회 의원들은 이승만 연설에 33차례나 기립박수를 보냈다.(1954.7.28)
    ▲ 한미안보동맹을 체결한 이승만대통령이 최초의 국빈방문한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한미동맹의 기념비적인 역사성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 양원합동 의회 의원들은 이승만 연설에 33차례나 기립박수를 보냈다.(1954.7.28)

    李 박사는 박헌영 김일성이 이끌던 남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 자들이 스탈린의 졸개로서 소련을 위하여 봉사하는 賣國奴(매국노)들이란 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폭로한 정치인은 해방공간에서 오로지 李承晩 한 분뿐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한국 사람의 형용(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 가”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반역자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소련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들이란 지적이었다.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得勢(득세)하던 시절에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인데, 적중한 예언이기도 하다. 65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한 분석이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즉 從北(종북)세력은 민주투사나 한국인의 형용(形容)을 하고 있으나 매국노(賣國奴) 김정일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세력인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먼저 그 사람들을 誨諭(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오…”

    거짓선동엔 진실의 햇볕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변할 수 없는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 아니라 附和雷同(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다. 

    李承晩(이승만)은 교정이 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親父兄(친부형) 親子姪(친자질)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愛憎(애증)과 親疎(친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고 못 박았다.

    이른바 大義滅親(대의멸친)의 정신이다.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파괴자, 민족주의자들을 건설자로 규정하였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

    李 박사는 끝으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쟁의 禍(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하(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선제(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장문(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주석(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선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매국(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美), 영(英), 소(蘇) 3국(國) 외상(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김구(金九),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한 반탁(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分局)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민정(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박헌영(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박헌영(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민심(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매국(賣國)세력, 우익은 민족(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반탁(反託), 좌익 주도의 찬탁(贊託) 정국(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 ▲ 1954년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를 백악관에서 만났다. 한미동맹 동반지도자의 최초의 정상회담.(1954.8)
    ▲ 1954년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를 백악관에서 만났다. 한미동맹 동반지도자의 최초의 정상회담.(1954.8)


    이승만(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선제(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이승만(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매국자(賣國者)와 애국자(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적(敵)과 동지, 선(善)과 악(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공산당엔 공세적으로 나가야 이긴다. 만약 박근혜 위원장이 금명간 이런 연설을 한다면, 종북(從北)세력의 집권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