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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장관에게 털어놓은 李承晩의 놀라운 술회
"러시아는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다.
일본은 다르다. 일본이 장사를 가장하여 다시 몰려올 때,
당신네 친일파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야 해."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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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 관저 경무대 사무실에서 직접 타이프라이터로 연설문을 작성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7월 국빈방문때 미국의회에서 행할 연설문은 독립투쟁때 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비밀에 붙였다. 이 타이프라이터는 미국 망명생활중 쓰던것을 가져왔는데, 이승만은 구한말 감옥에서 고문으로 손가락을 다쳐 평생 고생했다.ⓒ
1951년 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일제(日帝) 총독부 관료 출신인 任文桓(임문환) 씨를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임(任)씨는 차관엔 일본 고등문관 시험 동기(同期)인 이태용(李泰鎔)씨를 임명하였다. 任씨는 국회에 인사차 갔다. 국회는 그가 친일파(親日派)라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회에서 돌아온 그를 李 대통령이 불렀다.
任씨는 회고록에서 가까이서 본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노지사(老志士)라기보다는 百獸(백수)를 호령하는 老獅子(노사자)의 인상이었다. 위엄이 몸에 붙은, 철(鐵)의 의지를 가진 달인(達人)이었다. 가까이 가면 나보다 키가 작아 보였는데, 떨어져서 보면 뼈대가 굵어 백발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악수를 해보니 굵은 손아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하였다.>
대통령이 물었다.
"군(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 세풍(世風)을 거스르겠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이태용(李泰鎔)은, 성명(姓名)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그런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손자를 타이르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임(任) 장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얼굴로 돌아온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그러나,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산 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비탈도 논이었습니다. 밤에 지날 때 내려다 보니 전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산과 평야에 이어졌어. 저렇게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오래는 잘 살 수가 없어.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친일파(親日派)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자중(自重)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군(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任 장관은 '놀라운 술회였다'고 썼다.<그때 謹嚴(근엄)하기 짝이 없던 노인의 자세와, 저 멀리 바라보던 노인의 안광(眼光)은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인과의 대결에 친일파(親日派)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일제(日帝)시절 그들이 맡았던 곡예사로서의 노고(努苦)를 알아준 부탁이 아닌가? 친일파를 일본의 개(犬)라고 보았다면 일본인이 다시 올 때 그들이 원(原)주인에게 다시 꼬리를 흔들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다.>
만군(滿軍) 장교 출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일제(日帝) 관료-군인 출신들을 요직에 등용, 경제개발과 국가 근대화 사업을 맡긴다. 이들이 일본을 줏대 있게 잘 다루고 일본도 이들을 믿고 한국을 도왔다.李 대통령의 예언대로 지일파(知日派)로 변신한 친일파(親日派) 출신들이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지 않고 발전시키는 데 중심이 되었다. 앞으로 5년이면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IMF 예측). 식민지였던 나라가 종주국(宗主國)을 따라 잡는 것이다.
임문환(任文桓) 씨처럼 식민지 관료 생활을 하면서 일제(日帝)와 동포 사이에서 곡예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고생을 기억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때 익힌 기술을 국가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朴正熙)의 위대한 안목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