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 장군의 딸 지복영 선생…일제 침략하자 ‘청년공작대’ 조직임시정부에서 광복군 모병을 위해 적극 활동…광복 당시 ‘소령’
  •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지청천 장군은 다 안다. 하지만 그의 딸도 젊은 시절 건강까지 버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함께 광복군에 입대해 제3지대 초모위원 겸 비서로 활동한 지복영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의 딸 지복영 광복군 소령.
    ▲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의 딸 지복영 광복군 소령.

    지복영 선생은 지청천 장군의 딸로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24년 어머니 윤용자 여사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당시 지청천 장군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및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항일투쟁 중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이 시작되자 임시정부도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에까지 먼 길을 피난해야했다. 남경의 중국학교에서 수학하던 지복영 선생도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 사람들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지 선생은 피난길 중에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11월 임시정부는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자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으로 여성대원은 지복영 선생을 포함한 11명이었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선전활동은 거리선전, 연예와 항일연극, 대규모 공연 등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이 열리자 지복영 선생은 오광심, 김정숙 등과 함께 광복군에 참여,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하게 됐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전방인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한 뒤에는 오광심 선생 등과 함께 1년 반 동안 기관지 ‘광복’을 만들었다. 이후 모병 업무 강화를 위해 광복군 서안 제3지대가 편성되자 선생은 전선에 더 가까운 안휘성 부양에서 광복군 모집활동을 펼쳤다.

    선생은 1943년 임시정부 외무부로 차출되어 중국어 방송을 이용해 한국인 학병들의 탈출을 권유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군 총사령부 편대 재편성 당시 선생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