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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을미사변 후 유성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체포되었으며 탈옥하여 다시 거사를 도모하다 서거한 문석봉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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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봉 선생은 1851년 경북 현풍군(現 경북 달성군 현풍면 상동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조운리(漕運吏: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관리)로 관리생활을 시작한 후 세곡(세금으로 받던 곡식)을 조운선으로 운반하던 중 전라도 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 주었다. 이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도전한 선생은 병과로 급제하여 경복궁5위장으로 일하게 됐다. 그해 12월에는 진잠 현감으로 부임했다. 선생은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에 임명돼 동학군 진압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무자비함과 조선 정부의 나약함에 환멸을 느껴 공주부 관병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곧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서려 한다는 내부 고발 때문에 공주부에 구금됐다.
1895년 6월 석방된 선생은 8월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고 복수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려 했다. 선생은 송근수, 신응조 등 지역유림 대표자들과 함께 9월 18일 공주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지역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동참했다.
선생은 지휘부를 조직한 뒤 각지에 통문을 보내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공주관아를 선점해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뒤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300여 명의 의병으로 10월 28일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훈련받지 않은 ‘의병’들은 관군의 공격을 받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선생은 이후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했으나 고령현감의 신고로 체포돼 대구부에 구금됐다. 선생은 1896년 봄 최은동 등과 함께 탈옥했다. 선생은 옥고로 몸이 극도로 약해졌음에도 재봉기를 시도했다.
4월, 선생은 서울로 가 정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했다. 이때 제천 의병을 이끌던 유인석과도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했으며, 11월 19일 46세로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뒤늦은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