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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선생과 안창호 선생, 간디의 영향을 받아 일제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물산장려운동을 일으키고, <조선일보> 사장으로 일제의 억압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가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킨 직후 ‘그’를 살해했다. ‘그’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일제에 항거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과 민족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신념을 심어준 ‘고당 조만식 선생 61주기 추모식 및 추모강연’이 18일 오후 3시에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사)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방우영)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한 광복회원 및 평남도민 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업회이사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하늘양식교회 송삼용 목사의 기도, 서울지방보훈청장․광복회장의 추모사, 홍금자 시인의 시 낭송과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의 ‘고당정신과 건국 그리고 통일’이라는 주제의 추모강연에 이어 숭실대 OB합창단의 합창 등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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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당 조만식 선생의 생전 모습. 초대 내각 다수가 친일파였던 김일성 일당은 조만식 선생에게까지 '친일' 또는 '반민족주의자'로 몰아세웠다.
고당 조만식 선생(1883.2.1~1950.10.18)은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 일본으로 유학갔다 망한 뒤 귀국했다. 이후 오산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2차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 갇혔다.
이후 간디의 활동에 영감을 얻어 1922년 ‘민족경제의 자립과 발전’을 명분으로 내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여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뒤 언론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했다.
이 같은 선생의 활동을 일제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1945년 자기네가 패망할 것을 예감한 일제 총독부에서 선생에게 정권인수를 제안했지만 선생은 거절했다. 이를 받아들인 좌파 박헌영이 다시 선생을 찾아와 정권인수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선생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5년 11월에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을 기반으로 신탁통치반대를 전개하다 김일성 일당과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 1946년 1월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김일성은 1950년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이승만 정부에 제안한다. 이승만 정부는 간첩으로 극악한 죄를 저지른 김삼룡과 이주하를 풀어줄 것인가로 고민했지만 민족 지도자인 조만식 선생을 풀어준다는 말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김일성은 6월 25일 기습남침을 일으킨다. 김일성은 1950년 10월 선생을 살해한다.
정부에서는 조만식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 유발(遺髮)을 수습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