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당시 가장 세력 컸던 중세기사단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와 함께 음모이론에 자주 등장
  • 91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노르웨이 테러범이 당국에 자신과 '템플기사단'이 연관돼 있다고 주장한다. '선언문'에도 '템플기사단'을 언급했다. 그는 왜 '템플기사단' 핑계를 댈까.

    역사 상 '템플기사단'은 노르웨이 테러범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상상'과는 달리 오히려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아 문제가 됐던 단체다.

    '템플기사단'은 1118년 기사 위그 드 파양이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성지순례객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원래 이름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 1129년 교황으로부터 공인을 받은 뒤 흰 바탕에 붉은 '말테 십자가'가 그려진 상징을 사용했다.

  • ▲ 성당기사단의 로고. 중간에 그려진 십자가는 '말테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유명 시계제조업체 '바쉐론 콘스탄틴'도 같은 십자가를 로고로 쓴다.
    ▲ 성당기사단의 로고. 중간에 그려진 십자가는 '말테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유명 시계제조업체 '바쉐론 콘스탄틴'도 같은 십자가를 로고로 쓴다.

    '템플기사단'은 단순한 기사단이 아니었다. 유럽 최초로 근대적인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 큰 부를 축적했고 다른 기사단이나 지역에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 중 '여행자 수표'와 비슷한 제도는 성지순례를 하려는 사람과 상인들에게 돈을 받은 후 이를 증명하는 표를 주고, 예루살렘 현지에 도착하면 돈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템플기사단은 금융산업 외에도 '성배' '언약궤'와 같은 '숨겨진 기독교 보물'을 찾는 데도 열중했다. 당시 분위기에 이런 템플기사단의 '과업'은 신성한 것이라 귀족 등으로부터 많은 땅과 재물을 기부받기도 했다.

    '템플기사단'은 일상 생활에서는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육식은 1주 3회로 제한했고 여성과의 성관계는 물론 신체적 접촉도 금지됐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이단으로 불리던 카타리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거나 기사들이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들의 몰락은 무슬림 지도자 살라딘의 군대에 예루살렘을 빼앗기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들이 가진 많은 돈도 왕과 교황의 목표가 됐다.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 필리페 4세의 요청에 따라 템플기사단의 해체를 명령했다. 결국 기사단원 3,000여 명이 체포되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한다. 당시 기사단장이던 자크 드 몰레이는 프랑스 군에 잡혀 화형을 당한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튜튼기사단'이나 '호스피탈러 기사단' 수하로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숨어 지낸다.

    한편 템플기사단을 해체한 필리페 4세는 자신의 생각보다 템플기사단의 재산이 적음에 의문을 품고 부하들을 시켜 '숨겨진 재산'을 찾도록 명령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템플기사단과 함께 사라진 막대한 재산의 행방과 그들이 초기 기독교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템플기사단은 20세기 후반부터 소설의 소재로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등이 그 예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이들의 대를 잇는다고 자처하는 단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8년 '자칭 템플기사단'이라는 단체는 교황청을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템플기사단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일각에서는 프리메이슨, 장미십자회, 일루미나티 등의 비밀결사단체와 엮어 '유대인의 세계지배음모'를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