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제보로 군부내 공산당 숙청, 6.25때 인민봉기 막아내북한내 간첩양성소 융단폭격...이승만 반공 안보의 대들보였다
  • ▲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가 주최한 제5회 이승만 포럼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가 주최한 제5회 이승만 포럼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1948년 11월, 육군본부 정보국 군 수사팀이 서울 신당동의 한 주택을 급습했다. 그 집 지하에는 밖에서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방이 하나 있었다. 방 앞에 멈춰선 이들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방안에는 작은 체구의 한 사내가 방문을 향해 45구경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은 문 앞에 서있던 한 사내의 고함 속에 묻혀버렸다.

    “박정희 소령, 여기서 뭐하고 있어? 당신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면서 왜 사람들 죽이는데 가담 안 했지?(군부 내 남로당 좌익세력이 일으킨 여순 반란사건을 말함)”

    방안에 숨어있던 사람은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박정희 소령이었고 방 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사내는 육본 정보국 소속 김창룡 대위였다.

  • ▲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가 주최한 제5회 이승만 포럼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대한민국 특무대장 김창룡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군부 내 좌익세력이 국가전복과 사회적 혼란을 위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은 이제 갓 태어난 신생국 대한민국을 뒤흔든 대 사건이었다. 당시 군 좌익세력은 그들이 점령한 지역에 인공기를 올리고 이곳이 공산당의 땅임을 분명히 밝혔다. 반란은 9일 만에 진압됐지만 이 사건은 겨우 첫 걸음마를 뗀 국군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정부는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사령부를 주축으로 대대적인 숙군(肅軍)에 들어갔다. 

    이날 김창룡 대위와 수사팀은 남로당 군사부 총책 박정희 소령을 검거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창룡 대위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을 일으킨 골수 공산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김창룡은 박정희가 아까웠다. 건군 초기, 군에는 智勇을 겸비한 장교가 절실했다. 군 내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으로 평가받을 만큼 탁월한 자질을 갖춘 젊은 영관 장교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김창룡은 끈질기게 박정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젊은 박정희와 김창룡은 닮은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과묵했다. 시덥잖은 사소한 농담 한 번 하는 일이 없었다. 매사에 진지했으며 생각이 깊고 행동은 신중했다. 김창룡과 박정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둘이 서로 닮았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김창룡의 설득은 성공한다. 박정희는 김창룡의 진심을 다한 설득에 결국 전향한다. 박정희의 전향은 국군과 김창룡에게 또 다른 선물을 안겨준다.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박정희는 김창룡에게 군에 남아있던 남로당 계보를 알려준다. 박정희의 자백에 따라 군 정보국은 가려져있던 군내 남로당 핵심조직원 73명을 모두 검거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후 김창룡은 음양으로 박정희를 돕는다.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은 젊은 시절 최대의 위기를 이렇게 벗어났다.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

    대한민국 건국 초기, 대공방첩 작전을 주도했던 육군 특무대의 숨겨진 진실이 한 지식인의 끈질긴 추적 끝에 낱낱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대인 한국정보문화연구원장(금호회 회장)은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주최 ‘제5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특강을 열었다.

  • ▲ 이대인 한국정보문화연구원장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 이대인 한국정보문화연구원장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이승만과 김창룡’이란 주제로 열린 이 날 특강은 장대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2백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 주최측이 긴급히 보조의자를 준비할 정도로 높은 관심속에 진행됐다.

    이대인 원장은 올해 펴낸 그의 저서 ‘대한민국특무대장 김창룡’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건국과 建軍 전후 대공방첩 활동에 어떻게 진행됐으며 그 성과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이 원장에 따르면 건국과 건군 전후 펼쳐진 대공방첨 활동의 가장 큰 성과는 북한의 6.25 남침을 통한 적화통일 야욕을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 가지 주목할만한 일화가 있다. 6.25 후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북한이) 남한을 통일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과 김창룡, 맥아더 때문이다”

    남침 직전 박헌영은 김일성에 호언장담을 했다. “장군께서 서울에 들어가면 20만이 호응할 것입니다”

    박헌영은 남한 곳곳에 퍼져있는 광범위한 남로당 세포조직의 힘을 믿었다. 특히 군부내 심어 놓은 남로당 세포조직에 대한 박헌영의 믿음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은 전쟁이 터지면 군부 내 남로당 조직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군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후방 소요사태를 주동해 남한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박헌영의 이런 장담을 믿은 김일성은 같은 말로 소련의 스탈린을 설득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거짓말로 들어난다. 6.25가 일어났지만 군부내 반란은 없었다. 오히려 오합지졸로만 여겼던 국군은 ‘피로 피를 씻는’ 혈전을 치르며 북한의 남침속도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전쟁이 끝난 후 박헌영이 숙청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박헌영의 장담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던 장본인. 6.25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살려 낸 숨은 일등 공신, 전쟁 후 군에 만연된 부정과 부패를 추상같은 단호함으로 척결하려 했던 사람. 그가 바로 육군본부 특무대장 김창룡 장군이다.

    이승만 대통령, 건국 직후부터 매주 ‘군사안전위원회’ 열어

    이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과 김창룡 장군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도 소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출범 직후부터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로버츠 고문단장, 하우스만 대위가 상시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를 매주 주재했다. 모든 것이 불안했던 건국 초기, 국가안보에 대한 이 대통령의 관심은 그만큼 크고 강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군 수뇌부나 미 군사고문단의 보고에 만족하지 않았다. 1948년 10월 초 이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을 불러 유능한 정보장교를 추천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신 장관은 김창룡 중령을 데리고 경무대를 방문한다. 당시 김창룡은 갓 창설된 공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있었다.

    이 대통령을 만난 김창룡은 당시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군 내부 대공방첩활동 실태에 관한 자세한 보고를 한다. 김창룡의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회의(군사안전위원회)를 하면서 고문단으로부터 보고를 받고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곤 해 불안했는데 당신 보고를 들으니 이제 발을 뻗고 잘 수 있겠어”

    그만큼 김창룡의 보고는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김창룡으로부터 1일 보고형식으로 군의 숙군작업과 군사현안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

    공산주의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건국대통령과 정보장교의 만남은 군부내 좌익세력을 근절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초대 군감사령관 검거...준비된 정보장교

    김창룡은 1916년(호적상 1920년)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의 중농가정에서 태어났다. 영흥잠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 측량기사와 제사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던 그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이 눈에 띄어 만주철도시험(만철시험)에 합격, 역무원으로 근무한다.

    그러나 신중하고 진지한 그의 태도를 눈여겨보던 역장이 강제로 관동군 헌병학교 입대를 추천, 관동군 헌병학교 5기생으로 군과 인연을 맺는다.

    처음부터 정보작전 업무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그는 만주 소련 국경지역에서 점원으로 위장 취업, 거물급 간첩을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는 상점 주인으로 행세하던 간첩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속에서도 새벽에 얼음을 깨 직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등 고난이 극심했으나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일념이 그를 버티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일본 패망후 예기치 않은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그가 일본군에 입대해 활동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소련 공산당에 검거돼 두 차례나 사형을 선고 받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월남 후 북만주 시절 그의 방첩활동을 알고 있던 전우를 만난 국군 5연대에 입대, 사병으로 근무하게 된 그는 경비사관학교 2기에 지원했다가 관동군 오장출신이라는 이유로 탈락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 1947년 1월 마침내 경비사관학교 3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다.

    이 때 그는 ‘자유대한에 죽었던 몸을 바치자, 자유국가 되기 위해서는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 혼신을 다 바치자’는 맹세의 글을 남긴다.

    임관 후 1연대 정보장교로 부임한 그는 미소공동위 소련군 스파이 적발, 1연대 장병 전원 독살음모 사전 적발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둔다. 이병주 초대군감사령관을 검거해 미군 군법회의에 송치하는 등 원칙앞에서 한 점 흔들리지 않는 기개를 보여준다.

     

    숙군(肅軍)의 영웅...6.25전까지 군 내 좌익세력 검거 완료

    1948년 제주 4.3시건과 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며 정부와 군은 남로당 좌익세력의 색출을 위한 정보작전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한 군사안전위원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특히 군 내부 좌익세력이 인공기를 게양하며 대한민국을 부정한 여순반란사건 직후 정부는 좌익세력의 색출과 검거에 힘을 쏟게 된다.

    1948년 11월 초 김태선 내무부 치안국장은 이 대통령에게 ‘군부침투 남로당 리스트’를 보고한다.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격노했다. 곧바로 하지장군을 부른 이 대통령은 “당신이 군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책임지고 색출해 내시오”라고 질책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김창룡은 같은 해 9월 말 군내 좌익지하망 조직계보(‘김창룡 리스트’)를 작성해 백선엽 장군에게 보고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숙군(군 내부 좌익세력 색출 및 검거) 작업이 펼쳐지게 된다. 정보국 3과장 김안일과 김창룡 대위가 중심이 된 수사진은 헌병사령부와 함께 군내 좌익 세포조직에 대한 조사에 착수, 남로당 핵심 조직원들을 일망타진한다.

    이때 검거된 남로당 조직원들은 남로당 군사부 비서 김영식, 군사영어학교 출신 오일근 소령, 김종석 중령, 최남근 중령, 경비사관 1기 김창영, 김학림 소령, 2기 김경희, 박정희 소령, 3기 이종석, 김응록 등이다. 

    특히 박정희 소령의 전향으로 국군은 남아있던 남로당 핵심 조직원들을 모두 검거, 48년 11월 말까지 숙군작업을 완료한다. 이때 검거된 군 장교, 하사관, 사병은 모두 합쳐 4,749명으로 장교의 7%, 사병의 5%가 좌익에 가담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국군의 숙군작업이 6.25직전까지 완료됐기 때문에 유엔군의 투입이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6.25전쟁 중에도 김창룡은 정보작전임무에 충실했다. 임시수도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김윤근 국민방위군 사령관의 횡령사실을 적발했고 정일권 참모총장의 금품 수수 사실까지 확인해 이를 이 대텽령에게 보고하는 등 원칙과 소신을 앞세운 성역 없는 수사로 군의 부정과 맞섰다.
    1952년 6월 25일 부산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의 배후가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김시현 의원(민국당)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검거한 사람도 그였다.

     

    휴전 직전, 북한 내 비밀 남파교육시설 폭파...김일성의 야욕 좌절시켜

    특히 휴전 직전 있었던 북한내 남파교육시설 완파 작전은 휴전 후 남한의 혼란을 노린 북한의 시도를 원천 차단했다는 점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무르익어 갈 무렵 김창룡은 한 건의 첩보를 받는다.
    그 내용은 놀라웠다. 현재 전선이 휴전선이 될 것으로 확신한 북한이 2만여명의 특수병력을  도망범이나 포로 등으로 위장해 남한에 침투시켜 게릴라전을 벌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수백병을 침투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리원 등지에서 수천명이 집중적으로 단기교육을 받고 있다는 단서도 포착했다.

    김창룡 본부장은 전국의 포로수용소와 유치장을 조사해 보고토록 하고 미군용 특별기편으로 일본에 있는 미 국동사령부로 날아간다. 김창룡은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만 짧게 보고하고 육군본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며칠 후 미 공군은 북한 내 간첩양성소를 모두 파괴한다. 이에 따라 정전 후 남한내에서 봉기를 획책했던 북한 김일성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간다. 당시 일본 아사히 신문은 ‘한국의 호랑이 일본에 나타나다’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를 내 보내기도 했다.

    휴전 직전 벌어진 이 극비작전은 한국 CIC부대장과 미 극동군 CIC부대의 합동 첩보전이 거둔 성과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본토 정보부대장이 한국을 방문, 미군은 한국 CIC부대와 적극 협조한다는 정식공문을 전달하고 미군 고위급 정보장교가 한국 CIC에 상주하기로 하는 협정이 체결된다.

    당시 준장이었던 김창룡 본부장은 이 공로로 준장 진급 9개월만에 소장으로 특진했다. 한미 양국 CIC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휴전 후 한국에서의 북한군 게릴라 침투 및 간첩 남파는 크게 줄어들었다.

     

    휴전협정 후, 부정부패 척결의 화신

    휴전협정 후 김창룡에게 주어진 임무는 부패와의 전쟁이었다. 당시 군은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다. 3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해외원조의 대부분은 군으로 집중됐다. 자원과 물자가 많아지면서 여기저기서 부정과 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법 벌목을 근절키 위해 김창룡은 모든 검문소에 CIC 부대원을 배치, 모든 화목차를 점검했다. 경무대로 가는 화목차도 예외가 없었다.

    군 고위층과 조선방직 사장, 거물급 국회의원이 연루된 ‘국방부 원면 부정사건’도 적발했다. 고위급 장교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축첩(蓄妾)의 폐해를 근절시킨 이도 김창룡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군부의 미움을 받게 된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김창룡 소장은 이 대통령에게 ‘국방부 원면 부정사건’의 진상을 보고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괴한의 저격을 받고 숨을 거둔다.

    이 대통령은 김창룡 소장이 저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대한민국은 망했군”

    만약 그가 이 대통령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고, 군과 사회지도층에 만연한 부정과 부패를 걷어내는 작업을 조금 더 했다면 이승만 대통령과 제1공화국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김창룡은 북한의 침략 야욕에 맞서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낸 일등 공신 중 한 사람이다. 휴전 후에는 사회지도층에 널리 퍼진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과 영광 뒤에는 여전히 부정적 평가로 얼룩진 김창룡 소장이 있다. 

    이승만 독재의 사병, 자신의 영달을 꾀한 폭군, 정치의 시녀 혹은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매도하기 전에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