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없는 나라' 세계 신기록 계속 경신 중뿌리 깊은 언어권 간 갈등 해소 기미 없어
  • 유럽연합(EU)의 `수도'가 위치한 벨기에가 13일로 `무정부 상태' 1년을 맞았다.

    작년 6월13일 총선거를 치른 벨기에에선 그간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정당들 간의 협상이 이어져 왔으나 만 1년이 지나도록 합의를 보지 못해 `공식 정부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가 지난 2009년 289일 만에 정부를 구성한 기록은 지난 2월17일 벨기에가 이미 깼다. 일각에선 캄보디아가 2003년 선거 뒤 353일 만에 정부를 구성한 것이 무정부 세계 최장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지난 1일 벨기에가 갈아 치웠다.

    13일 뉴스통신 벨가와 일간지 르 수아르 등 벨기에 언론에 따르면, 이러한 무정부 상태는 앞으로도 최소 6개월, 길게는 2년 이상 더 이어질 전망이다. 어느 나라도 깨지 못할 신기록을 벨기에가 계속 경신해 가는 셈이다.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 경상도 만하고, 인구는 1천1백만명에 불과한 벨기에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복잡한 역사로 인해 남부 왈로니아(프랑스어권)와 북부 플레미시(네덜란드어권)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다. 언어권별로 군소정당들이 난립해 선거가 끝나면 언어권별 주요 정당 간의 협상으로 연립정부가 들어서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이 과정에서 정부 구성이 다소 늦어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작년 6월 13일 총선에서 네덜란드어권의 분리 독립을 내세운 신(新)플레미시연대'(N-VA)가 플레미시 지역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하면서 정치적 대립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N-VA의 정치적 주장의 요점은 "훨씬 더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플레미시 지역이 가난한 왈로니아 지역을 위해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 각자 독립하든지, 재정 등 많은 부분의 자치권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프랑스어권에서 최대의 표를 얻은 왈로니아 사회당과의 연정 협상에 나선 N-VA는 지역 자치권 확대와 재정적자 감축 등 정치개혁을 먼저 논의해 합의를 봐야 연정을 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운 것이 협상 교착의 주 원인이다.

    양 측의 대립이 계속되자 명목 상의 국가 수반인 알베르 2세 국왕이 주요 정당 지도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협상 중재 대표 역할을 맡겼으나 성과가 없었다. 올해 초엔 시민 수만명이 브뤼셀에서 정치권에 연정구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 상원의원은 하원의원 배우자들에게 "정부 출범 전까지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하라"며 '성 파업'을 제안하기도 했다.

    무정부 상태 1년이 된 지금은 이런 움직임마저 시들해졌다. 벨기에 언론매체들은 이에 대해 "자치권 확대와 연정 구성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입씨름이 1년 동안 되풀이되자 국민들이 이젠 짜증을 넘어 아예 신물을 내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정치 엘리트와 국민들 간의 간극을 더 벌려 놓고 있다"고 분석했다.

    벨기에인들은 지난 1년 동안 "오히려 국가는 더 잘 돌아 갔다"면서 `세계 신기록'을 소재로 농담도 하고 있다. 경제성장률도 EU 국가 중 상위권인데다, EU 순번의장국 직책을 잘 수행했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리비아 공습에도 참여했고, 열차의 정시 운행률이 전보다 높아졌으며, 국가대표 축구팀의 성적도 괜찮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론 이브 레테름 총리를 수반으로 한 임시 관리 내각(care-taker)과 공무원들이 일을 잘한 덕분이자 지방 자치가 그만큼 잘 이뤄져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레테름은 2008년에 9개월, 2009년 12월부터 2010년 4월까지 5개월 간 등 모두 14개월을 선거 후 출범한 연정의 정식 총리를 지냈다. 오는 8월 중순엔 그가 정식 총리로 일한 기간보다 관리 내각의 총리로 일한 기간이 더 길어지게 되는 기록도 수립된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선 "벨기에가 새로운 형태의 정부와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전권을 쥔 정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리 내각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헌법 해석 상으론 "시급하게 필요한 일들을 관리들이 추진할 수 있다거나 이전 정부의 정책들을 이행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정도가 관리 내각의 권한과 관련한 전부다. EU 회원국 중에서 3위 규모에 달해 모든 정당들이 시급한 해소책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국가부채의 해결을 위한 중장기 재정안정책을 마련할 수 없다. 관리내각은 또 기업 환경 개선책과 관련한 주요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왔다.

    이에 따라 국제 투자자들의 부정적 시각이 커지고 있다. 지난 9일 벨기에 정부의 10년 국채 이자율은 독일의 국채보다 1.13%포인트 높은 4.155%를 기록했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도 벨기에의 신용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조속히 정부를 구성하지 않으면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최근 시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57%가 `정치상황'이라고 답했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벨기에인들이 장기간 무정부 상태를 소재로 농담을 하면서도 심각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2일 `미스 벨기에' 인 올해 19세의 유스틴 데 용케이레 가 "벨기에는 아름다은 나라지만 국가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면서 "끝없이 회의만 할 뿐 합의를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플레미시 출신인 용케이레 자신이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다 구사하면서도 올해 초 미스 벨기에 행사에서 네덜란드어로만 말함으로써 분열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수도인 브뤼셀 지하철 당국이 두 언어 사용 주민 간 충돌 때문에 한동안 영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만 안내방송을 하자 브뤼셀 특별시 정부 당국이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로 방송토록 촉구하기도 했다.

    여기에다 무정부 상태 1년인 13일부터 브뤼셀 거리에서는 플레미시 분리주의자들이 이를 `기념'하는 대대적 행사를 연다. EU 집행위 본부 등이 있는 `뤼 드 라 로아' 거리 이름을 `플레미시공화국로'로 바꾸는 상징적인 이벤트도 벌인다.

    이에 따라 당장 총선을 새로 실시해도 연정이 구성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 벨기에 정치권과 학자들의 분석이다. 오히려 N-VA보다 더 포퓰리스트적 정당들이 표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국왕으로부터 협상 전권을 위임받은 왈로니아 사회당의 엘리오 디 루포 당수는 "우리는 복잡한 상황에 있고,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들을 갖고 있다. 벨기에는 연정의 나라이지 초당파적인 정치와 의회 다수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다. 3개 언어를 사용하는, 복잡한 다문화 사회의 실험실 같은 곳"이라며 "이번 문제를 풀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N-VA의 바르트 데 베버 당수 역시 "벨기에 역사상 정부 공백은 처음이 아니며, 국가적 위기가 아니다"라면서 "연방주의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자치권 확대가 우선시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올 가을이나 내년에 지방선거와 새로운 조기 총선이 동시에 실시될 수 있다거나 의회 또는 관리내각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면서 무정부 상태가 1년 더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 차기 총선이 실시되는 오는 2014년까지 현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