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자살 이어 ‘최우수 교수’ 자살…교수, 학생 모두 망연자실“교과부 감사로 고민 많이 해”…한편에선 “밀어붙이기식 학교운영” 비판
  • 국내 최고의 과학교육 요람, 카이스트가 ‘패닉’에 빠졌다. 네 명의 학생이 연이어 목숨을 끊은데 이어 이번에는 교수가 그 뒤를 따랐다. 더구나 숨진 박 모 교수(54세, 생명과학과)가 과학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천재과학자로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박 교수는 서울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생명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동문’이기도 하다. 미국 워싱턴대에서 생체재료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워싱턴대, MIT, 탬플대 등에서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치며 연구역량을 인정받아 왔다.

    1996년부터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죽기 전까지 SCI급 논문만 무려 200여건을 발표했고, 과학자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잣대라 할 수 있는 논문 피인용 횟수가 6,300여건에 이를 만큼 탁월한 연구업적을 쌓아왔다. 2009년에는 미국생체재료학회에서 수여하는 클렘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클렘슨상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쌓은 생체재료분야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박 교수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2월 카이스트 최우수교수로 선정됐다.

    박 교수의 자살이 알려진 10일 저녁, 서남표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은 모두 학교에 출근해 3시간 넘게 비상회의를 가졌다. `11~12일 이틀간 모든 수업을 휴강하고 교수와 학생간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면서 연이은 학생 자살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려 했던 학교는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수협의회 소속의 A교수는 “오늘과 내일까지 대화시간을 가지면 분위기가 어느 정도 돌아올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황이 더 안좋아졌다”며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전체 분위기가 아주 무겁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학생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떠 오른 ‘징벌적 등록금제’를 비롯, 학생들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던 총학생회도 박 교수 자살소식이 알려지자 급히 모여 앞으로의 일정 등을 논의했다. 생명과학과 학생들을 포함해 약 50명의 학생은 대학본부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작은 촛불집회를 열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이 꼬여가면서 교수진의 반발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수리과학과 한상근 교수는 11일 앞으로 우리말로 수업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카이스트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강의하도록 하고 있다. 한 교수는 “영어강의가 그나마 희박한 교수와 학생간 대화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박 교수의 자살원인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교과부 감사관실 관계자는 “올초 카이스트에 대한 종합감사를 실시했다”면서도 감사결과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학교 관계자들에 의하면 교과부의 정기 종합감사에 박교수의 연구비 관련 부분이 포함됐고 이로 인해 박 교수가 최근 고민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명과학과 B교수는 “징계를 받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신 분이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대전 둔산서 경찰관계자는 교과부의 감사와 관련해 징계와 별도로 검찰에 고발예정이라는 내용을 전해 듣고 이로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교수의 자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교수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서 총장 취임후 성과와 실적위주 분위기가 교수들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면서 “전체적으로 우울한 학교분위기가 이같은 결과를 초래하는데 영향을 준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번 사태로 서 총장의 ‘개혁’성과가 완전히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조심스런 반응도 있다. 한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카이스트의 국내외 위상과 연구성과를 이끌어낸 데는 ‘서남표식 개혁’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며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아야겠지만 너무 한 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가 서남표 총장의 사퇴논란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동안 잠잠했던 교수사회가 누적된 불만을 일시에 표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서 총장의 사퇴를 둘러싼 찬반논란이 가열되는 등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