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말 조선이 쇄국정책으로 외부세계와의 단절로 근대화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데 반해 해양국가인 일본은 과감히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53~1877년)을 통해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의 길을 선택했다.
    국력 신장과 함께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대륙을 향해 세력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고조됐다.

    당시 청나라는 종래부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왔으며 조선 조정도 사대(事大)의 예를 취했다.
    이에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하고 조선 침략을 꾀하자 청·일 양국 사이에는 대립상황이 조성됐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등의 사태에 양국이 관여하면서 알력이 심화되자, 양국은 1885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파병할 경우 쌍방이 미리 통보하고 사후 즉시 철병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94년 6월 조선에 동학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3,000여명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일본은 이에 항의해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청나라와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동학농민반란의 기세가 약화되자 조선은 곧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의 오토리(大鳥圭介)공사는 본국 훈령대로 이를 거부했다. 일본의 목적은 반란 진압보다는 청나라 원세계(袁世凱)군대에 압력을 가하고 조선 조정에서 친청(親淸) 세력을 몰아내어 친일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다.

    이에 조선에 친일개화정권이 들어서고 갑오개혁이 단행되던 즈음, 7월25일 일본군이 아산(牙山)·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고 29일 성환(成歡)을 점령한 뒤 8월1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 전쟁(1894년 7월~95년 4월)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열강들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며, 근대적 군비를 갖춘 일본은 일방적인 승전을 거듭했다. 전쟁 결과 청나라는 95년 4월 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성립시켰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했다.

    日, 청일전쟁 후 러시아와 격돌

    이와 함께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확인킨 뒤 배상금 2억 냥을 일본에 지불했으며, 랴오둥·타이완(臺灣)·펑후제도(澎湖諸島)를 할양함과 동시에 통상의 특권을 모두 일본에 제공했다. 청일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의 승리로 조선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됐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에 조선은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됐으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對)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세출의 평균 5할을 군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이를 통해 일본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했다.

    한편, 1896년 러시아는 삼국간섭 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해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단거리로 잇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旅順)·다롄(大連)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근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은행 등을 설립했다. 
     
    日, 러시아 제압위해 영일동맹 추진

    그러나 조선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됐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해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다.

    이에 일본은 1901년 12월 7일 하야마(葉山)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美) 유학파 였던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여러 국가 원로들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 고무라는 만주가 러시아에 점령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만주를 빼앗기면 조선도 스스로를 러시아의 손에서 지킬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를 제압하기 위해 영국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원로회의는 영일동맹을 승낙했다.(1902년 1월 영일동맹 체결)

    한편, 러시아는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02년 10월 제1차 철병을 단행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對)만주 정책으로의 선회로 1903년 4월로 예정된 제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같은 해 7월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 아무르 지역과 관동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 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시아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노기(乃木希典)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2월 8일 뤼순(旅順)항을 공격해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9일 서울에 진주했다.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攻守同盟)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조선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그는 젊은시절 세계 최강의 해군 국가였던 영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그곳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성가책과 성서를 교재삼아 영어를 배운 뒤, 이를 바탕으로 해군 관련 교재를 공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 것으로 유명하다.
     
    5월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간에 대격전이 벌어졌다.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奉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일본이 뤼순 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다.

    러시아군은 5월27일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제독이 이끄는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과 함께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됐다.

    러일전쟁 후 조선, 日식민지로 전락

    결국 러시아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권고를 수락해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을 끝내게 된다. 10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한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식민지분할을 위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세력 각축의 결과로 발발했다.

    이는 조선 및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배후에는 동맹국가인 영국과 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경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자본이 있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가로서 러일전쟁 개전 후 조약에 따라 중립을 지켰으나 정보나 무기 조달 면에서 일본을 원조해 러일전쟁의 승리에 공헌했다.

    이에 대해 入江隆則 메이지대 교수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은 해양국가인 일본이 번영을 위해서는 일본에 적대할 가능성이 있는 대륙국가인 러시아와 청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확고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을 “경탄할 만한 안전감각”이라고 평가했다.

    1세기 전 일본의 정치가와 군인 등 국가리더들은 단호하게 해양국가인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일본 국민은 이를 환영했다. 당시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일본인의 수준과 깊이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한편, 러일전쟁결과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 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 한반도의 북반구에는 옛 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받는 독재국가 북한 등 대륙세력이 들어서 있다. 북한은 현재 일본의 안전 보장에 위협을 가하는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다. 중국·러시아·북한으로 인해 일본은 한국과 달리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1세기 전 일본인이 가졌던 ‘안전감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역사는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 대륙세력의 틈에서 어떤 국가와 강력한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정해져 있었고,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이 바로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