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


    양동안(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정치학)

    <목차>
    1. 머리말
    2. 국가와 건국의 의미
    3. 건국과정의 다양성
    4.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
    5. 건국일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의 분석(1)
    6. 건국일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의 분석(2)
    7. 맺음말


    1. 머리말

    2008년 여름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개최되던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 사회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김대중 행정부 시절인 1998년에도 건국50주년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지만 당시 ‘건국50주년’이 올바르지 않은 표현이라고 시비 거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60년 동안이나 우리 국민이 인정해온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2008년에 와서 일부 지식인 정치인 종교인 등이 부정하고 나섰다.

    건국60주년에 나타난 엉뚱한 시비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일자가 어느 날인가를 놓고 상당히 떠들썩하게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은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전제하에 추진되던 건국60주년 기념사업이 헌법에 위반된 것이라는 판결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는 집단행동으로까지 확대되었고, 그런 헌법소원심판 청구에는 야당 국회의원들이 74명이나 참여했었다. 최근에는 그 논쟁이 소강상태에 빠져있지만, 그 논쟁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건국일이 언제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일이 언제인가는 그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있어서도 건국일이 언제인가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이다. 자기 나라의 생일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으면, 의당 행정부나 국회가 나서서 학계와 협조하여 논쟁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행정부나 국회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 건국일을 둘러싼 논쟁을 방치하고 있다. 일보고 밑 안 닦고 지내는 경향이 강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 여기서도 잘 드러난다.
    이 논문은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가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2. 국가와 건국의 의미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와 건국의 의미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국가란 지리적으로 경계가 설정된 영토 내에서 그 영토와 그 위에 거주하는 인구(국민)에 대해 지속성 있는 통치기구(정부)를 통해 주권적 지배를 행사하는 포괄적인 정치적 결사이다. 국가와 여타 정치적 결사의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국가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열거된다.

    첫째, 국가는 지리적으로 경계가 설정된 영토를 확보한다.
    국가란 영토 단위의 정치적 결사이므로 영토가 없는 정치적 결사는 아무리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국가일 수가 없다.
    둘째, 국가는 자기 관할 하의 영토와 그 위에 거주하는 인구에 대해 주권적 지배권을 행사한다.
    주권적 지배란 영토 내에서는 최고의(supreme) 혹은 절대적(absolute) 권력을 행사하고, 영토 내에서 그러한 권력을 행사하는데 대해(나아가서는 국가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데 대해) 영토 외부에 존재하는 세력으로부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unrestricted) 것을 의미한다. 영토 국민 정부를 갖춘 정치적 결사라도 영토와 국민에 대해 주권적 지배를 시행하지 못하면 그 결사는 국가가 아니다.   
    셋째, 국가는 영토 내에 적용될 법률들을 제정·집행·해석하는 권한을 독점하고, 영토 위에 거주하는 인구들로 하여금 그런 법률들에 복종하도록 만들고,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법률을 위반하는) 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다.

    국가의 이러한 특징과 관련하여 베버(Max Weber)는 “강제력이 국가의 정상적 수단이거나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그러나 강제력은 국가의 고유의 수단이다.…국가란 어느 일정 영역의 내부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을 요구하는 인간공동체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정치적 결사가 외형상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독점적 지위를 실질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때는 그 결사는 더 이상 국가라 할 수 없다.    
    국가가 가지는 이러한 핵심적 특징을 국가성(stateness)이라 한다. 그런 국가성을 가진 정치적 결사는 반드시 영토 국민 정부 주권 등 4 개의 요소로 구성된다. 그들 4개 요소들을 국가구성의 필수요소라고 말한다.

    국가구성의 4개필수요소

    그들 4 개 요소들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영토는 국가가 배타적으로 실질적인 점유를 하고 있는 영토를 말하며, 단지 구두나 문서로 ‘우리의 영토’라고 선언된 영토는 국가의 구성요소로서의 영토가 되지 못한다. 국민은 국가의 법규와 정부의 명령에 실질적으로 복종하는 국민을 말하며, 국가의 법규나 정부의 명령에 실질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국민은 국가의 구성요소로서의 국민이 될 수 없다.
    정부는 반드시 주권자의 주권적 행위에 의해 구성된 정부여야 하며, 국가에 속하는 영토와 국민에 대해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주권자는 국가가 되고자 하는 정치적 결사가 채택하려는 정치체제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민주공화정을 채택하려는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권자이고, 군주정을 채택하려는 국가에서는 군주가 주권자이다. 정치체제가 주권자로 규정한 인간 혹은 인간집단이 직접 구성하거나, 또는 구성의 토대를 마련하여 이루어진 정부만이 국가 구성요소로서의 정부이다.

    그러한 주권자의 확실한 행동이 없이 임시방편으로 구성된 정부는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일 뿐이며, 임시정부는 국가구성요소로서의 정부에 미달한 존재이다(단, 공고하게 형성된 기존 국가에서의 정치적 변란기에 구성된 과도적 임시정부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국가에 속하는 영토와 국민에 대해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능력이 없는 정부는 설사 주권자에 의해 구성된 정부라 할지라도 명목상의 정부일 뿐이지 실질적 정부는 아니다.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가 존재하더라도 그 단체가 명목상의 정부일 경우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요소로서의 정부가 되지 못한다.
     
    국가 구성의 필수요소로서의 주권이란 국가가 자주적(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으로 대내외적 행동을 결정하고 수행할 수 있는 권능이다. 이러한 권능이 명실상부할 때만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요소로서의 주권이 될 수 있다. 선언되기만 하고 실질적으로 행사되지 못하는 주권이나, 실질적으로 행사되지만 정당한 절차를 거처 선언되지 않은 주권은 모두가 국가구성요소로서의 주권이 되지 못한다. 주권의 확보는 국가가 되고자 하는 결사가 실력행사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외부로부터의 주권침해 행위를 저지하고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여), 영토 내·외부로부터의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건국(state-making)이란 국가구성에 필수적인 4개 요소들을 완벽하게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지역에서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든지 국가의 필수적 구성요소들을 모두 갖춘 정치적 결사가 등장하게 되면 그것이 곧 새로운 국가의 건립, 즉 건국이 되는 것이다. 건국(국가의 건립 또는 국가의 신설)은 국가의 필수적 구성요소들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 구성요소들의 확보가 완료된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옐리네크는 “국가의 신설이라는 것은…한 국가의 모든 본질적인 도구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와 같이 만들어진 공동체가 국가로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 된다”라고 표현했다.

    건국이 국가구성의 4개 필수요소를 완벽하게 확보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국가구성의 4개 필수요소가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에서만 국가가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4개 필수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 결여되어도 그 정치적 결사는 국가성을 상실하며, 국가성의 상실은 곧 국가의 소멸(사실상의 소멸 포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소멸은 국가구성의 4개 필수요소들이 다 사라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4개 가운데 어느 하나만 상실해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3. 건국과정의 다양성

     국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최초의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거의 단일했을 것으로 상정되지만, 국가의 존재가 일반화 된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국가가 건립되는 과정은 다양하다. 신설될 국가의 필수적 구성요소들이 각기 상이한 조건에 처해있고, 국가건립을 주도하는 세력이 상이한 조건에 처한 국가의 필수적 구성요소들을 확보하려면 그 조건에 따라 상이한 노력을 전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첫째, 신설될 국가의 영토가 평화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건립과정이 달라진다.
    영토가 평화적으로 확보될 수 없는 조건에 있으면 국가건립 주도세력은 군사력 혹은 대중동원을 통한 압력에 의해 영토를 확보한다.
    예를 들면, 기존국가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는 세력이나 강경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에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려는 세력은 무장투쟁이나 대중동원을 통한 압력에 의해 영토를 확보한다. 그에 반해 영토가 평화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조건에 있으면 국가건립 주도세력은 영토의 확보를 위해 무력투쟁이나 대중동원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국가를 신설하려는 대상지가 어느 국가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은 처녀지이거나, 식민지 지배를 하던 식민 본국이 전쟁에 패배하고 전승국들이 식민지를 해방하여 해방된 지역을 식민지 토착인구가 신설할 국가의 영토로 제공하는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둘째, 신설될 국가의 국민이 형성되어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건립과정이 달라진다.
    신설될 국가의 국민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국가건립을 주도하는 세력은 국가건립 노력과 국민형성(nation-making) 노력을 동시에 전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러 인종집단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국가를 신설하거나 외세가 설정한 국가의 경계선이 인종적 혹은 민족적 경계선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반면에 신설될 국가에 국민이 형성되어 있으면 국가건립을 주도하는 세력은 국민형성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전개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면, 기존국가에서 소수민족으로 지배를 받다가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려 하거나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인구가 외국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려는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셋째, 신설될 국가에 비주권적 통치기구(예를 들면 자치정부)가 조직되어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건립 과정이 달라진다. 비주권적 통치기구가 조직되어 있지 않으면 국가건립 주도세력은 국가건립을 위해 정부를 새로 조직한다. 예를 들면, 자치정부 없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역에서 국가를 신설하는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반면에 비주권적 통치기구가 조직되어 있으면 국가건립 주도세력이 별도로 정부를 조직하지 않는다. 비주권적 통치기구가 주권을 확보하면 국가건립이 완료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도 장기간 자치정부를 조직하여 식민지의 행정을 자율적으로 담당해온 식민지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는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넷째, 영토 내에서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해온(바꾸어 말하면,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해온) 정치적 결사(대부분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건립 과정이 달라진다.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해온 정치적 결사가 존재하지 않은 경우에는 국가건립을 위한 주권 확보 노력이 전개된다. 예를 들면,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해온 임시정부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를 건립해야 하는 분쟁지역이나 식민지 피지배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의 국가건립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에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영토 내에서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해온 정치적 결사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국가건립을 위해 주권을 확보하는 노력이 전개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임시정부의 주관 하에 채택하려는 정치체제의 원리에 부합한 정식정부를 조직하는 것으로 국가건국이 완결된다.

    이처럼 국가의 신설을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국가구성요소들의 상태에 따라 각국에서의 국가건립 과정이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신설 국가의 국가건립 달성 여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도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무장투쟁의 승리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체제 도입을 위한 혁명의 성공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고, 정부의 수립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고, 주권행사의 선언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한다.

    국가건립 달성 여부를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의 차이는 각국이 자기 나라의 국가건립을 경축하는 기념일을 정하는데 있어서의 차이로 연결된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국가건립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의 발생 일을 건국기념일(또는 독립기념일)에 해당하는 경축일로 정한다. 국가에 따라 무장투쟁에서 승리한 날을 건국기념일에 해당하는 경축일로 정하기도 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한 혁명이 성공한 날을 건국기념일에 해당하는 경축일로 정하기도 하고, 주권적 정부가 수립된 날을 건국기념일에 해당하는 경축일로 정하기도 하고, 정부가 수립된 상태에서 주권행사를 선포(독립을 선포)한 날을 건국기념일에 해당하는 경축일로 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각국이 자국의 최고 국경일로 기념하는 그들 다양한 사건의 기념일은 공식적으로는 건국기념일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두가 건국기념일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대한민국의 건국과정

    대한민국의 국가건립 과정은 영토가 평화적으로 확보되었고 국민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영토 내에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임시정부와 같은 정치적 결사가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런 비주권적 통치기구도 존재하지 않은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혹자는 재중 대한민국 임시정부(통칭 상해 임시정부)가 존재했다는 점을 근거로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임시정부와 같은 정치적 결사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필자의 서술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중 임시정부는 명칭 상으로는 ‘임시정부’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임시정부로 보기 곤란한 결사이다.

    '임시정부'의 성립 요건

    정치학에서는 일정 영토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다른 말로는 실효적으로 통치)하고 있으나 자기들이 천명한 체제의 원리에 부합한 절차에 따라 정식정부가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식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통치의 책임을 담당하는 기구를 임시정부라 한다.
    혁명, 쿠데타, 전쟁 등으로 인해 기존정부가 붕괴된 후 기존정부를 붕괴시킨 세력이 정식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국가를 임시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직한 정부라든지, 기존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자기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임시적으로 조직한 정부 등이 그에 해당된다.

    임시정부는 일정한 영토와 국민을 통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식정부와 동일하다. 그러나 정식정부는 기존의 법률이나 스스로 천명한 정부 조직 방식에 부합한 정당한 절차에 따라 조직된 정부인데 반해, 임시정부는 그러한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임의로 조직된 정부이다.

    임시정부는 정식정부가 조직된 즉시 해체된다. 자국 내에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토를 보유하지 못한 채 국외에서 조직된 정부는 일반적으로 망명정부(government-in-exile)라고 부르며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현대 국제법에서도 임시정부의 승인 획득 요건으로 일정한 영토 내에서의 실효적인 통치(effective administration) 행사를 제시하고 있다.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아닌 '망명집단'

    이렇게 볼 때 한반도 내의 어느 조그만 지역에 대해서도 실효적 통치를 행하고 있지 못했던 재중 임시정부는 정확한 의미에서는 임시정부라 칭할 수 없다.
    물론, 재중 임시정부가 객관적으로 임시정부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적어도 미국만이라도 재중 임시정부를 한반도의 임시정부로 인정해주었더라면 대한민국의 국가건립 과정은 임시정부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마저도 재중 임시정부의 임시정부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건립은 임시정부가 존재하지 않은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의 국가건립이 임시정부가 존재하지 않은 조건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국가건립이 재중 임시정부와 무관하게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민족의지의 차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건립하려는 행위는 1919년의  3․1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의 지도자들은 독립선언문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으며, 3․1운동에 참여한 민중은 우리 민족의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했다. 3․1운동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의 국가건립 행위는 각지에서의 임시정부 조직에서 구체성을 갖게 되었고, 그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통합한 임시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국가건립 행위는 민족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의 영토를 식민지로 지배해 온 일본이 미·소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실질적 국가건립 과정은 8․15해방 후부터 비로소 개시되었다. 재중 임시정부는 해방된 민족의 영토에서 그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탓으로 8․15해방 후에 진행된 새로운 국가건립과 제도적 연결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8․15해방 후 장차 대한민국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국가의 건립을 주도한 세력은 이승만 중심의 정치세력이다. 이승만 중심의 건국 주도세력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노력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국가를 건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건국주도세력의 이러한 건국계획은 미·소의 한반도 정책과 민족 내부의 반대세력에 의해 방해되었다. 

    이승만, 미국-소련의 건국방해와 투쟁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고, 그들은 1945년 12월 하순에 발표된 모스크바협정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한반도를 5년간 신탁통치한 다음 독립시켜주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신탁통치 추진이 행해지는 가운데,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남한사회를 현상유지적으로 관리했고, 소련은 북한을 사회주의적으로 변혁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미·소가 합의한 신탁통치실시계획,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주력하려는 미국의 정책, 북한의 사회주의화에 주력하는 소련의 정책 등은 모두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이 전개하는 ‘민족의 자주적 노력에 의해 조속한 시일 내에 한반도 통일민주국가를 건립하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었다. 또한 신탁통치실시에 찬성하고, 북한을 사회주의화하려는 소련의 노력을 지지하며, 나아가서 남한지역까지 사회주의화하려고 투쟁하는 좌익세력의 활동도 이승만세력의 국가건립 노력에 대한 장애물이었다(좌익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만세력이 통일된 사회주의국가 건립의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세력은 자기들의 국가건립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 다음에는 소련과의 합의에 의해 한반도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을 추구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연시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와 아울러 자기들의 국가건립 노력을 봉쇄하고 남한마저 사회주의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좌익세력의 대중장악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승만세력은 자기들의 국가건립 노력에 대한 방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에서 1946년부터 단독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사회주의화가 급속히 추진됨으로써 민주정부가 수립될 수 없는 조건에서는 우선 남한에서만이라도 조속히 선거를 실시하여 민족의 주권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고, 장차 북한지역까지 민주국가로 통일할 수 있는 남한에서의 토대가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세력의 남한에서의 새로운 국가건립 노력은 민의에 따른(곧 선거에 의한)정부수립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영토와 국민이 이미 확보된 상태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만 수립하면 새로운 국가가 건립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세력들의 선거를 통한 주권적 정부수립 노력은 유엔총회가 1947년 11월 남북한 전역에서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 통일정부를 수립하라고 결의함으로써 실현 가능해졌다. 그러한 유엔총회의 결의는 미국이 소련과의 합의를 통한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함으로써 도출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정권이 북한에서의 총선실시를 거부함으로써 북한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 유엔 감시하의 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의 독립정부를 구성하라고 결의했다.
    일찍부터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을 주장해온 이승만세력은 이러한 유엔의 결의에 부응하여 남한에서의 총선 실시에 앞장섰다.

    북한-좌익 및 임시정부세력의 자유총선 저지

    남한에서의 총선실시에 대해 남북한의 좌익세력이 앞장서서 저지투쟁을 전개했고, 남한의 중도파세력과 임시정부세력(정확하게는 표현하자면 ‘재중 임시정부 패권세력’)도 좌익세력의 남한 총선 저지투쟁에 동조했다.

    북한의 좌익세력은 1947년 2월 북한지역에 인민민주주의 독재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하고, 그 정부 주도하에 북한의 사회주의화 작업을 높은 수준으로 진행해놓은 상태에서 남한의 좌익세력을 지휘하여 무력투쟁을 포함한 폭력투쟁을 전개하면서 남한총선을 물리적인 힘으로 저지하려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남한에서의 국가건립 주도세력에 반대하는 중도파와 임시정부세력을 포섭해서 남한총선 반대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남한 총선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공작과 대중동원을 전개했다.
    북한정권이 남한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그처럼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 것은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남한까지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남북한의 좌익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남한의 중도파세력 및 임시정부세력의 총선저지 투쟁이 격렬해지자 건국주도세력은 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될 수 있도록 보호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선거에 참여했다. 원래 선거를 주관하고 보호할 책임은 미군정에 있었고, 그것이 제대로 실시되는지 여부를 감시할 책임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있었으며, 건국주도세력은 선거에 참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나, 건국주도세력이 선거보호노력을 전개하지 않으면 선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거보호투쟁을 전개하면서 선거에 참여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적극적인 노력과 건국주도세력의 선거보호노력 덕분에 남한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5․10선거는 좌익세력 및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격렬한 저지투쟁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선거저지를 위한 좌익세력 주도의 무장폭동으로 인해 제주도의 2개 선거구에서만 투표가 실시되지 못하고 나머지 선거구에서는 모두 투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선거에는 남한 거주 성인 인구의 96.4%(혹은 79.7%)가 유권자로 등록하여, 등록유권자의 95.5%(혹은 92.5%)가 참여했다. 이로써 남한의 새로운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의 정부수립을 위한 주권적 행위가 실행된 것이다.

    건국요건 모두 갖춘 대한민국 탄생

    건국주도세력은 5․10선거에서 국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강령에 따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국회는 새로운 국가 건립에 필요한 새로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의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승만은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했으며, 이 정부는 대한민국이 채택한 민주공화정의 주권자인 국민의 주권적 행위를 토대로 하여 구성된 정부이다. 그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으며, 그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으로부터 주권(통치권)을 이양 받았다.

    이처럼 정부가 수립되고 주권을 확보함으로써 국가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4개 구성요소의 확보가 완료되었으며, 그에 따라 대한민국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5. 건국일에 대한 그릇된 주장들의 분석(1)

    위에서 서술한 ‘국가와 건국의 의미’ 및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비추어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1948년 8월 15일이다. 건국일이란 국가구성의 4개 필수요소들의 확보가 완료된 날을 의미하며, 1948년 8월 15일 밤 12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건립에 필요한 4개 필수요소의 확보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이 글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범죄수사에서 진범이 체포되면 수사가 끝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범이 체포된 후 다른 혐의자들이 진범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계속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고도 똥을 된장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사회라서 대한민국 건국일에 대한 정답의 제시만으로는 대한민국 건국일을 둘러싼 논쟁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

    그 논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가?’에 대한 오답들에 대해 그것이 틀린 이유들을 일일이 밝혀주는 웃기는 일까지 해야 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사회의 이상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어쩌면 그 오답들이 틀린 이유를 반박할 여지없이 밝혀주어도 그런 오답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군조선이 대한민국이라는 주장

    필자가 오류임을 밝히고자 하는 첫 번째 오답은 우리 민족의 국가건립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서 조선을 건립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단군이 건국한 민족국가를 재건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단군의 조선건국 신화를 역사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주장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의 건립과 소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억지소리다. 민족과 국가에 관한 극히 초보적인 지식조차 결여한 이런 주장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멋쩍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대학교수를 포함한 꽤 많은 숫자에 달하고 있어서 그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하나의 민족으로도 복수의 민족으로도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민족 속에 하나의 국가만이 아닌 여러 개의 국가가 건국될 수 있고, 동일한 민족의 역사 속에서는 시대를 달리하여 여러 개의 국가들이 건국되고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단군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들이 건국되고 소멸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의 소멸로 국가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 민족이 1948년에 건국한 우리 민족의 새로운 국가이다.

    필자가 오류임을 밝히고자 하는 두 번째 오답은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한 기록이 없으며, 1948년 8월 15일에 거행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었기 때문에 그 날은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건국 선포 행사나 기록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기념식이 거행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식이 거행된 것도 사실이다. 건국에 관한 기록이 없고, 건국 선포나 건국기념식이 거행되지 않았다고 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존재하지 않은 것일까?
    국가에 건국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출생일이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출생에 관한 기록이나 출생선언이 없었다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머니 배속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온 실질적인 출생일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국가도 건국의 기록이나 건국선포식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 국가를 구성하는 4개 필수요소들의 구비가 완료된 날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인간의 출생과는 달리 국가의 건립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국가를 구성하는 4개 필수요소의 구비가 완료된 날은 객관적 자료의 추적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4개 필수요소들의 확보는 1948년 8월 15일 밤 12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주권을 이양 받음으로써 완료되었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기념식만 거행되고 건국기념식의 거행이나 건국의 선포가 행해지지 않았다 하드라도 그 날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사실은 흔들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사항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기념식이 거행되지 않았고 건국 선포도 없었음으로 그 날이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된 날을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1919년에도 대한민국 건국은 선포되지 않았고, 재중 임시정부 역사기록에 대한민국 건국 기록은 없다.
    1948년에나 1919년에나, 대한민국의 역사기록에나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기록에나 동일하게 건국기록이나 건국선포행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4개 국가 구성요소의 구비가 완료된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 사실은 부정하면서 4개 국가 구성요소 중 어느 하나도 구비하지 않은 1919년의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되었다는 허구

    필자가 오류임을 밝히고자 하는 세 번째 오답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 및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의 ‘민국재건론’과 ‘민국연호 사용’, 건국헌법이 전문에서 ‘3.1운동에 의한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독립국가 재건’을 천명한 점과 재중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한 점 등을 들어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고, 1919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승만 박사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의 국회의장에 선출된 후 행한 식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국회의원 자격으로 이에 모여 우리의 직무와 권위를 행할 것이니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 민주정부를 재건설하려는 것입니다.…이 민국은 기미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인연해서 우리 혁명이 그 때에 성공이 못 되었으나…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오…”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전문에서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천명했다.
    건국헌법은 새 국가의 국호로 재중 임시정부가 사용하던 국호 ‘대한민국’을 채택했다. 건국헌법의 전문의 해당내용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채택은 당시 국회의장이며 초대 대통령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되던 이 박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박사는 또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직후 얼마간 대통령의 문서에 ‘민국’ 연호를 기록함에 있어서 1919년부터 기산하여 기록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박사의 이와 같은 주장과 행동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1919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동원하는 논거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의 그러한 주장과 행동은 실제와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계승한 국가이며, 자신이 독립운동세력의 적장자라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욕이 과잉하여 실제와 부합하지 않은 그런 주장과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선전적인 이유에서일지라도 정치학박사인 이 박사가 그런 억지 주장과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박사의 그런 주장과 행동은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억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박사는 한 때는 그런 억지를 주장했지만, 머지않아 그런 억지를 시정했다.

    이 박사는 1948년 8월 15일 해방3주년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의 탄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1949년 8월 15일 기념사에서는 ‘민국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1950년 제2회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민국독립 제2회 기념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어떤 주장을 개진함에 있어서 실제와 부합하지 않은 억지를 논거로 삼는 것은 어리석고 부도덕한 것이다.
    진실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주장을 자기 주장의 논거로 이용하려 할 때는 그 타인의 주장이 실제와 부합한 것인지 여부를 검증한 후에 이용해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하여 1948년 건국설을 부정하고 1919년 건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의 여타 주장과 조치들의 진실성과 타당성을 부정한다. 이승만 박사의 여타 주장과 조치들의 진실성과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유독 실제와 부합하지 않은 이승만 박사의 억지 주장만을 타당한 것으로 간주하여 1919년 건국설의 논거로 이용하는 것은 어리석고 부도덕한 일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상해 임시정부가 사용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채택된 것이 1919년의 상해 임시정부 조직이 곧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은 아래에서 다른 오답의 오류를 설명할 때 서술하기로 한다.
     

    6. 건국일에 대한 그릇된 주장들의 분석(2)

    필자가 오류임을 밝히고자 하는 네 번째 오답은 재중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 구성에 필요한 4개 요소들을 모두 갖춘 국가이기 때문에 재중 임시정부의 수립이 곧 대한민국의 건국이며,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재중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1948년 8월 15일의 일은 건국이 아닌 정부수립에 그친다고 하는 주장이다.

    1919년 4월 11일에 조직된 상해 임시정부가 국가구성의 필수요소들을 모두 갖춘 정부이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인사는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시정부가 국민·주권·영토의 요소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임시정부는 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1919년 9월 11월 제정·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 제2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함, 제3조에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제국의 판도로 정함이라고 한 것이다. 헌법을 통해 국민·주권·영토의 요소를 규정하고 있었다”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어불성설

    ‘임시정부가 국가’라는 관념은 8월 8.15 기념행사를 대한민국 건국 기념행사로 거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의 공통된 인식이다. 예를 들면, 2008년 8월 13일 건국기념행사 반대 성명을 발표한 이른바 ‘시민사회와 종교계 원로들’의 모임인 ‘민주평화국민회의’의 성명문은 “우리가 비록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그때도 나라는 분명히 존재했고) 1945년 마침내 되찾았다”고 말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그때도 나라는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은 재중 임시정부가 국가였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동일한 관념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일부 학자들은 대한제국은 1910년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사망한 1919년에 망했으며, 대한제국은 고종 사망 직후인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의해 건국된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이 논문의 제2절에서 국가와 건국 및 국가구성요소들의 의미에 관해 서술했다. 필자는 그 절에서 국가란 지리적으로 경계가 설정된 영토 내에서 그 영토와 그 위에 거주하는 인구(국민)에 대해 지속성 있는 통치기구(정부)를 통해 주권적 지배를 행사하는 포괄적인 정치적 결사이며, 그 핵심적 특징의 하나는 영토 내에 적용될 법률들을 제정·집행·해석하는 권한을 독점하고, 영토 위에 거주하는 인구들로 하여금 그런 법률들에 복종하도록 만들고,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법률을 위반하는) 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또 그 절에서 국가의 구성요소가 되는 영토는 국가가 배타적으로 실질적인 점유를 하고 있는 영토여야 하고, 국민은 국가의 법규와 정부의 명령에 실질적으로 복종하는 국민이어야 하며, 정부는 주권자의 주권적 행위에 의해 구성된 정부여야 하고, 말이나 문서로 선언된 정부가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영토와 국민에 대해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을 가진 정부여야 하며,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요소가 되는 주권이란 국가가 자주적(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으로 대내외적 행동을 결정하고 수행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권능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서술은 필자만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현대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보편적인 주장이다.
    위에서 인용된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의 제1조와 제3조에서 천명된 인민(국민)과 강토(영토)는 임시정부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국민과 영토가 아니라 장차 국가를 건국했을 때 지배하고자 희망하는 국민과 영토이며, 제2조는 장차 건국할 국가의 주권이 전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천명한 것이지, 임시정부가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영토 위에서 국가의 대내외적 행동을 결정·수행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권능으로서 주권을 확보하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 아니다. 또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에서 주권자로 천명된 인민 전체의 주권적 행위에 의해 구성된 정부가 아니며, 임시헌법에 의해 영토로 천명된 한반도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을 가진 정부가 아니라 단지 문서로 선언된 명목상의 임시정부였다.
    따라서 상해 임시정부가 국가구성에 필요한 국민·영토·주권을 갖추고 있었고, 임시정부의 조직으로 국가구성에 필요한 4개 요소를 모두 갖춘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극심한 억지이다.

    임시정부 당사자들이 '건국준비 팀' 자인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임시정부의 조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립되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임시정부가 1941년에 제정한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임시정부가 1945년 9월에 귀국을 앞두고 발표한 ‘당면정책 14개조’에서 잘 확인된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장차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국가를 건립할 때 취해야 할 조치들을 천명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건국기 이전의 복국기의 활동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은 임시정부구성원들이 임시정부의 조직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당면정책 14개조’는 임시정부가 귀국한 후 “전국적 보선에 의한 정식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각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천명은 임시정부 구성원들이 재중 임시정부가 올바른 의미의 임시정부 요건을 다 갖추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과 다름없다.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국가를 건국하기 위한 준비조직이며, ‘과도정권’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의 결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문적 지식이 빈약한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조차도 임시정부 조직으로 국가가 건립된 것이 아니며, 임시정부는 올바른 의미의 ‘임시정부’도 못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는데, 학문이 크게 발달된 오늘날 대학교수로 있는 인사들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조직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한편,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은 상해(재중)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기 때문에 피계승 단체인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이 이루어진 것이고,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은 건국된 것이 아니라 재건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제5절에서 서술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민국부활론’과 1919년에 기산한 연호사용, 대한민국 국호 채택과 대한민국의 건국헌법 전문에 천명된 ‘대한민국이 3.1운동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1948년에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구절을 논거로 제시한다.

    필자는 제5절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민국부활론’과 ‘1919년 기산 연호사용’, 그리고 그에 의해 주도된 헌법 전문의 ‘재건’구절 삽입 등이 실제와 부합하지 않은 억지라고 말했다. 그러한 억지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이 재중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은 상해임정과 전혀 별개의 국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채택을 근거로 대한민국이 재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1948년 6~7월 헌법제정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채택된 것은 재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취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제헌의원들은 헌법심의과정에서 국호와 관련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계승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민주공화국’, ‘한국’ 등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어느 것을 국호로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거듭했으며, 결국은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호의 채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전혀 계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통치이념 부분이다. 대한민국의 건국헌법과 임시정부의 임시헌법 및 건국강령을 비교해보면, 임시정부의 임시헌법과 건국강령의 내용들이 대한민국 건국헌법에 많이 수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건국헌법 전문의 ‘민주독립국가 재건’이나 현행 헌법의 ‘임시정부 법통 계승’은 모두 통치이념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통치이념 면에서는 재중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지만, 조직의 차원에서는 대한민국은 재중 임시정부와는 단절된 국가이다. 대한민국과 재중 임시정부가 조직적으로 단절된 관계가 된 것은 김구 선생으로 대변되는 임시정부의 패권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대한민국이 재중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점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김구, 1947년 12월까지 '남한 단정' 적극지지

    임시정부 패권세력은 간헐적으로 정식 정부를 수립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건국주도세력과 의견차이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 12월 초까지는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한 사실은 1947년 12월 초에 발표된 김구 선생의 이승만 박사  건국노력 지지성명에서 확인된다. 김구 선생은 그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는 유엔결의안[남북한에서 유엔 감시 하에 자유총선을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하라는 결의]을 지지하는 바이다. 혹자는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유엔안이 실시 못된다고 우려하나…일보를 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에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오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이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2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김구 돌변...남북협상 주장, 건국저지 지원 성명  

    임시정부 패권세력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협조는 1947년 12월 하순 이러 저러한 이유로 중단되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러한 협조중단의사를 밝혔다.
    이승만 박사는 건국진영으로부터 김구 선생이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김구 선생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구 선생은 1948년 1월 하순 남북협상(남북요인회담)을 주장함으로써 건국주도세력의 대한민국 건국노력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는 좌익세력의 ‘2․7구국투쟁’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에 건국주도세력을 ‘박테리아’와 ‘새 일진회(친일 매국노 단체)’라고 비판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전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라고 매도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임시정부 패권세력이 대한민국 건국 저지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알리고 좌익세력의 대한민국 건국 저지 폭력투쟁을 지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제목의  그 성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군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서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설령 유엔위원단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유엔위원단 제공은 한인과 영원히 불해의 원을 맺을 것이요 한국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김구 선생의 이 성명이 발표된 무렵부터 임시정부 패권세력은 북한공산정권, 남한의 좌익세력, 남한의 중도파세력 등과 연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실시되는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에 김구 선생 등이 참석한 것도 5․10선거저지, 곧 대한민국 건국 저지를 위한 임시정부 패권세력의 투쟁의 일환이었다.

    대한민국 적대세력으로 변한 임시정부...유엔 승인도 반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임시정부 패권세력의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건국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대한민국의 통치이념이 임시정부의 통치이념을 계승했고 임시정부 구성원의 다수가 대한민국의 건국 및 건국 후의 대한민국 국정에 참여했지만, 정치결사로서의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과 적대적으로 단절된 것이다.

    임시정부 패권세력은 5․10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5․10선거가 종료된 직후 김구 선생은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고 5․10선거의 정당성을 부정했으며, 제헌국회의 의장에 당선된 이승만 박사가 새로 건국될 국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라고 천명하자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반박했다.

    나아가서는 1948년 8월 초에는 통일독립촉진회의 대표단을 유엔총회에 파견하여 대한민국 정권을 승인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호소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기 전날 신문기자들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논평을 요청받고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라는 부정적 논평을 했다. 
                        
    임시정부 패권세력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으로 인해 조직의 차원에서 재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새로 건국된 대한민국 간의 단절은 단순한 단절을 넘어서 적대적 단절로 심화되었다.
    조직의 차원에서 볼 때,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과 1919년에 조직된 재중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에는 국호의 동일성과는 판이하게 아무런 연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대성이 존재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백보를 양보하여 재중 임시정부의 조직을 국가의 건립으로 간주해준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중 임시정부 조직을 대한민국 건립으로 간주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재중 임시정부와는 무관한, 그리고 임시정부 패권세력과 싸우면서 건국된 새로운 국가인 것이다.
     

    7. 맺음말

    국가론과 대한민국 건국 전후의 역사에 대한 극히 초보적인 지식만 갖추고 있으면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또 그런 초보적인 지식만 갖추고 있으면, 위에 소개한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잘못된 주장들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사회가 이성적이며, 국가의 기강이 올바로 잡혀 있으면 그런 초보적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국가의 건국일에 관한 궤변을 농하면서 우매한 대중을 선동하지 못한다. 이성적인 사회, 기강 잡힌 국가에서는 그런 당치 않은 반국가적 궤변을 농하는 자들은 바보로 취급하여 궤변을 농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객관적 자료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되는 194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으로 건국되었다거나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의 조선건국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궤변을 농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고, 그들의 궤변에 휘둘려 74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1945년 8월 15일을 건국기념일로 기념하지 못하게 하는 헌법소원에 참여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비이성적이고 이 나라의 기강이 크게 흐트러져 있음을 말해준다.

    명백한 허구 궤변 방치...애국심 없는 정부
     
    이러한 궤변에 영향 받아 정부가 8.15광복절에 ‘건국 00주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건국일에 관한 당치 않은 논란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정부 또한 대한민국의 정부이면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애착심을 결여한 정부라는 비판을 받을 행태이다.

    인간에게 그가 태어난 날을 타당하지 않는 궤변을 내세워 그의 생일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생일을 기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격 파괴를 유도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나라의 생일 즉 건국일을 타당하지 않은 궤변을 내세워 건국일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건국일로 기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반역행위에 준하는 행위이다.
    또한 정부가 그런 자들의 집단행동에 굴복하여 건국을 기념해야 할 경축일에 ‘건국’이라는 용어를 삭제한 것은 정부가 국가정체성을 수호해야 할 자기의 의무를 외면하고 그들의 준 반역행위에 피동적으로 동조한 것이 된다. 
     
    행정부가 되었든 국회가 되었든 그들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행정부요 국회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애착심을 가진 기관이라면, 대한민국의 정당한 건국일을 건국일로 기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황당한 논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며, 해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경축하는 기념행사를 제대로 거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자기의 생일을 제대로 기념할 수 없는 불행한 인간의 처지와 동일한  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언제나 도래할 것인지 궁금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