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전쟁이 무서운 까닭 

     역사를 돌아보면 도저히 어떻게 손 쓸 여지가 없는, 너무나 무서운 일들이 많다. 그 중에서더 단연 톱 클라스로 무서운 것을 꼽자면? 아마도 종교전쟁일 듯 싶다. 종교전쟁이 빚은 살륙은 그 어떤 무신론적 살육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13 세기의 십자군 전쟁, 16 세기 종교개혁 이래의 ‘종교 30년 전쟁’, 레바논 종교 그룹들 사이의 살륙,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의 탈레반-반(反)탈레반 싸움, 인도의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시크교도 사이의 분쟁...모두가 끔찍하고 처참했다.

      더 속절없는 것은, 종교전쟁은 악마 아닌 신(神)의 이름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악마의 이름으로 살육을 한다면 “그래, 악마야 의례 그런 것이니까” 하고 체념(?)이라도 하련만, 신의 이름으로 학살을 한다니 도대체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만큼 종교전쟁의 살륙은 정의를 위해서라는 확신, 진리를 위해서라는 확신, 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말리기는 커녕, “아이고!”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근대의 세속화(secularization) 또는 성속(聖俗) 분리란 그런 권력화 된 성(聖)일랑 하늘로 올려 보내고, 세속일랑 상대주의적 이성(理性)의 소관사항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과연 그런 투명한 이성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또 다른 논란이야 여하튼간에. 근대적 세속화는 그 나름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성전(聖戰)임을 자임하는 살륙’으로부터 인류를 일단 꺼집어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발상이 아직도 끈질기게 되살아나곤 한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목사가 ‘국제 코란 불태우기의 날’을 선언했다 해서 아프가니스탄이 폭발하고 있다. 그 목사는 “이슬람 과격파에 더 이상 굴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목사가 지칭한 ‘이슬람 과격파’라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에 의해 기독교권(圈)이 과잉 피해를 입었다고 느낄 근거도 있을지 모른다. 이슬람권(圈)은 또 그 나름대로 반론할 근거를 댈 것이다. 그래서 누가 먼저, 누가 더 심하게 나왔느냐 하는 것과 관련해 제 3자가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기름만 더 붓는 결과가 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종교전쟁은 확전(擴戰)으로 치닫게 되어 있지, 축전(縮戰)으로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는 점만은 확언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권(圈)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또는 상호간에 자극하지 말고 피차 조심하고 범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A교도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분노한 적도 있고, B교도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분노한 적도 있다. 다 그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아슬아슬하고 무서웠다. 저런 현상들이 어찌 어찌 하다가 일촉즉발로 크게 터지면 어쩌나 싶어 가슴을 쓸었다.  

     예수님의 사랑, 부처님의 자비, 마호메트님의 은혜-부디 님들의 완전한 가르침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인류를 불상히 여기시고 그 부족함을 용서하소서.

    <류근일 /본사고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