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24)

     같은 기숙사에 있는 에르난도 구피가 찾아온 것은 8월 하순쯤 되었다.
    그때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내용이 드러났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 지도, 감리 등 모든 권한을 러시아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영국과도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는데(1905, 8) 영국 또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했다.

    「리, 이제 청원서 문제는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구만. 그렇지?」

    우리는 복도 끝에서 마주보며 서 있었는데 오후 8시쯤 되어서 복도는 텅 비었다.
    내가 머리만 끄덕였더니 구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나는 잠자코 이 필리핀 독립운동가를 보았다.

    필리핀은 미·서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스페인한테서 2천만불을 주고 산 노예같은 나라가 되었다.

    구피가 말을 잇는다.
    「루즈벨트가 청원서를 공식 절차를 통해 보내라는건 정치적 발언이야. 너무 실망하지 마.」
    구피도 내 상황을 아는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내가 물었다.
    「구피, 날 위로 해주려고 불렀나?」
    「그래. 난 다음달에 필리핀으로 돌아가네. 그래서 당신을 보자고 한거야.」
    「귀국한다고?」
    놀란 내가 묻자 구피는 머리를 끄덕였다.
    「행정청장 보좌관 비서가 되어서.」

    내 시선을 받은 구피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그동안 미국 국무부에 들려 자주 심부름을 했지. 필리핀 내부 정보도 주었고 유학생들 동향에 대한 보고도 했어.」
    「......」
    「그랬더니 나를 쓸만한 놈으로 믿었는지 발탁을 해주는군. 행정청장 보좌관 비서면 모든 곳의 정보를 쥘 수가 있지.」

    그리고는 구피가 똑바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동지들에게 나는 매국노, 반역자, 미국놈 앞잡이로 보일꺼야. 그래야만 해. 그럴수록 미국 측 신임이 강해질테니까.」
    「어려운 일이군.」
    「내 아버지와 삼촌만 아는 비밀이야. 나는 당분간 배신자로 살아야 돼.」
    「장하다.」

    불쑥 말을 뱉은 내가 긴 숨을 뱉았다.
    「부디 독립을 찾게나, 구피.」
    「리, 당신도 포기하면 안돼.」
    구피가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나를 보았다. 복도 기둥에 걸린 개스 등빛을 받아 구피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우리들의 앞길은 멀고도 험난하네. 리, 언젠가 필리핀과 대한제국이 제각기 주권을 찾고나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
    「그 날이 꼭 올거야.」

    나도 구피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그날까지 나는 어떤 굴욕도, 어떤 역경도 참고 견딜거야. 그리고 멈추지 않고 투쟁 할거야.」
    내 말끝이 떨렸고 눈에 습기가 찼다. 그러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한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구피가 잠자코 몸을 돌리더니 제 방쪽으로 걷는다. 그 뒷모습을 향하고 선 내 눈앞에 지난 날들이 영화 화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배재학당,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던 장면, 그리고 한성감옥서에서 처형당한 애국지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이어지더니 루즈벨트의 얼굴에서 화면이 정지되었다.

    「결코 멈추지 않을테다.」
    나는 이제 텅 빈 복도에 대고 말했다.

    「기어코 내 나라의 주권을 찾고 말겠다.」
    그 순간 내 눈앞에 필라델피아 보육원에 맡긴 태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 태산아.」
    내 가슴이 미어졌다. 한달이 넘도록 태산을 못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