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과 간호원
  • 마루를 비쳐주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한잠 자고나니 피로가 풀리고 기분이 상쾌했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과 나는 열두 명의 간호원 및 간호학생들에 대한 것을 연대본부에 보고 할 필요 없이 대대장 판단으로 처리하겠다는 생각에서 일체 보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열두 명의 여자들에 대한 소문은 요원의 불길처럼 군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제7연대 본부에 까지 알려졌다.

     

    연대본부에서는 연대정보 주임보좌관을 제1대대장에게 보내, 북한 공산군에 관한 정보 수집차 그녀들의 심문이 필요하니 데려가겠다고 했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그 여자들의 정보가치가 별것도 아닌데 굳이 데리고 가겠다면 데리고 가도 좋으나, 가서 충분한 심문을 한 후에는 다시 제1대대 제1중대에 돌려보내 김지용 상사로 하여금 그녀들을 서울 적십자병원까지 데려다주도록 한다는 전제하에서 내주겠다고 했으며, 연대본부에서는 이에 동의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연대정보주임 보좌관 김 중위는 스리쿼터 트럭을 가지고 제1중대에 와서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을 태웠다. 이때 두 명의 간호학생은 멀리 떨어져 있는 제1중대 취사장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김 중위는 그 두 명은 그대로 놔두고 나머지만 데리고 연대본부로 갔다. 두 명의 간호학생인 정정훈(鄭貞薰)과 박태숙(朴泰淑)은 우리 중대에 남아서 부상병 치료와 시간이 나면 중대 취사일도 도와주게 되었다. 순천 읍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우리 중대는 새벽 밥을 먹고 제1대대의 일부로서 군용 트럭을 타고 개천에서 아군을 앞질러 희천(熙川)을 점령하기 위해 북으로 치달았다. 북한 공산군의 수는 우리보다 몇 배, 때에 따라서는 6~7배도 넘었다. 그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서 좀 싸우다가는 흩어져서 산속으로 도망을 쳤다. 길이 열리면 우리는 군용 트럭에 다시 승차하여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박태숙과 정정훈은 전투 구경을 하면서 아군 부상자 응급치료에 정성을 쏟았다.

     

    ◇ 스탈린 동무의 선물

     

    우리 중대가 개천-희천 가도를 따라 자작(自作)을 지나면서 부터의 노획 물자에는 진기한 것이 많았다. 우선 철로 위에 서있는 화차들에는 군 전투복들이 산더미 같이 실려 있었다. 그 전투복은 미군용 전투복(작업복)과 엇비슷했으나 색깔이 더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상의 주머니는 아래에 둘이 있고, 윗주머니는 왼쪽에 하나만 달려 있었다. 포켓을 위에서 덮는 천 뚜껑은 없고, 하의는 미군용과 비슷했으나 뒷주머니가 없었다. 마침 입고 있는 군 전투복이 낡았을 때라, 장병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갈아입었다. 함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기를 올리는 데 좋은 일이었다. 또 우리 국군 장병들은 전투복 위에 미국제 기다란 군용 잠바를 입고, 미제 군화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획한 전투복을 입었다고 해도 군복 및 장비의 외형은 그전이나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장병들은 스탈린 동무의 선물이라고 좋아들 했다. 박태숙과 정정훈도 어느 틈에 어디선가 재빠르게 갈아입었는데, 땀내가 물씬 나는 감색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어버리고 초록색 군복으로 바꿔 입으니 아주 생기 있고 말쑥하고 깨끗해 보였다.

     

    스탈린 동무의 선물은 그뿐이 아니었다. 초콜릿이 담긴 상자도 수십 개나 있었다. 소련 고문관들이 먹는 것인지, 김일성 등의 당 간부들이 먹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초콜릿 속에는 소련 보드카가 들어 있어 아주 진미였다. 자작을 지나 신흥동(新興洞)에서 약 3킬로미터 전진하니 청천강(淸川江) 도하지점이 나타났다. 도하지점 강물 속에는 유엔군 전폭기의 기총소사 공격을 받아 파괴된 자동차들이 여러 대 버려져 있었다. 이들 강물 속의 자동차들을 건져내야 다른 자동차들이 강을 건널 수 있다. 다급한 이들은 타고 가던 승용차들을 강남 쪽에 버리고 몸만 강을 건너 북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세단 승용차만도 22대가 즐비하게 강남 쪽에 서 있었다. 번쩍번쩍 하는 고급 승용차들은 아주 장관이었다. 여기에는 김일성의 승용차도 있었고, 주한 미국대사 무초 씨가 서울에서 북한 공산군에게 뺏긴 승용차도 있었다.

     

    이곳이 고향인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우리가 노획해 놓고 계속 북진한 하루 후에 고향에 들렀다가 22대 중에서 가장 좋은 승용차 한 대를 가지고 갔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의 승용차였으며, 훗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치게 된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도 그곳에 가서 좋은 세단 두 대를 골라 가지고 갔다. 이 중 한대가 무초대사의 승용차여서 그에게 돌려주었다. 우리들은 약 40분간의 작업 끝에 강물 속에 있는 차들을 이리저리 끌어내고 도하지점을 정리한 후 북진을 재개했다. 강을 건너 조금 나가니, 소련제 T34 탱크가 한대 서있어 이를 노획했다. 북신현(北新峴)에서의 공방전은 밤 9시경까지 이어지고 북한 공산군이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전투는 끝났다.

     

    나는 이날 포로로 잡은 북한 공산군 대위로부터 뺏은 가죽으로 된 권총밴드와 1948년제 소련제 떼떼권총을 찼다. 이때까지 내가 차고 다니던 1945년제 소련제 떼떼권총은 중대 선임하사관 김지용 상사에게 주었다. 쌍안경도 이날 노획한 새것으로 바꾸고, 북한 공산군 육군대위가 가지고 있던, 평안 남북도를 거의 다 커버하는 널찍한 25만분지 1 군용지도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 지도는 훗날 내가 9일간 중공군의 중포위속에서 적을 돌파하는 작전을 할 때 참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

     

    ◇ 홍 하사와 박 하사

     

    이날 우리 중대는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북한 공산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중에는 40여명의 여자의 용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북한 공산 여자의 용군들은,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원해서 입대한 여자들이었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여자 의용군은 서울풍문중학교 3년생인 박필숙(朴畢淑)이었다. 이들은 주로 위생병들이었으나, 나이가 든 여군 중에는 군용트럭 운전병도 있었다. 이들 여자의 용군들은 우리 국군에게 쫓겨 달아나는 북한 공산군을 보면서 “저런 바보들! 이쪽을 보고 마주 총을 쏘면 될 텐데, 왜 저렇게 도망을 칠까”하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도 하더라는 것이었다. 밤 9시경에 적군과의 접촉이 끊기자 이내 외곽 방어편 성배치로 전환하고, 북신현 북방에서 숙영을 하게 됐다.

     

    저녁식사는 밤 10시경에야 시작됐다. 지금까지 나는 연락병인 홍인곤 하사와 박재현 하사와 세명이 함께 식사를 하였으나, 오늘부터는 박태숙과 정정훈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함께 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다가 문득 연대 본부에 가 있는 간호원과 간호학생들 생각이 났다. 우리 중대가 급히 북한 공산군을 맹추격하다 보니 이렇게 연대본부와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들이 우리 중대로 되돌아오기는 힘들게 됐다면서, 두 사람은 차라리 내일이라도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로 가서 그들과 합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대로가 좋으며, 우리 중대를 따라 압록강까지 가서 국경선을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식사 후 중대의 야간 경계 배치를 확인하고, 나는 네 명과 함께 한 농가의 부엌에서 함께 자게 됐는데, 부엌에는 앞뜰과 뒤뜰로 통하는 출입문이 두 개 있고, 안방으로 통하는 또 하나의 출입문이 있었다. 나는 뒷문 옆에 수숫대를 깔고 잠자리를 잡았다. 두 명의 중대 연락병은 앞문 옆에 수숫대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그 중간에 역시 수숫대를 깔고 두 간호학생이 나란히 누웠다. 일선 군인들은 철모를 쓰고 구두도 신은채, 수통까지 허리에 그대로 달고 총은 오른팔에 안은 채 잔다. 처음에는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지만 날이 가고 달이 거듭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해진다. 이렇게 습관이 되는 것이다. 언제 적군의 야습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최전방 전투 지휘관인 소총 중대장의 신경은 예민해지며 밤 귀가 밝아진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눈을 떴다. 가만히 보니 박재현 하사가 부스럭 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 용변을 마치고 되돌아왔다. 박재현 하사가 누워 있던 자리는 간호학생 쪽에 가까운 자리였다. 홍인곤 하사는 박 하사가 용변을 보는 사이에, 때를 만난 듯이 데구루루 한 바퀴 굴러서 박 하사 자리로 옮겨 누웠다. 박 하사는 용변 때문에 홍 하사에게 뺏겨버린, 간호학생들에게 가까운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홍 하사를 흔들면서 원래 자던 자리로 되돌아 누우라고 성화를 했다.

     

    그러나 홍 하사는 일부러 깊이 잠든 시늉을 하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그 자리를 고수했다. 중대장의 단잠을 방해할까봐 염려하면서 박 하사는 조용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홍 하사를 밀어버리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하사는 중얼중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간호학생들로부터 멀어진 자리에 누웠다. 나는 모포 속에서 긴장했다. 사고가 일어나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사병이 처녀들에게 손을 뻗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된다면, 나는 용변을 보려고 일어나는 듯한 행동을 하면 된다. 그러면 사병들은 조용해질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속에서 야광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간은 새벽 2시였다. 홍 하사, 박 하사 모두 꿈나라로 가있었다. 아무 일 없이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처녀들은 부모 슬하를 떠나 아직도 고생길에 있고, 사병들은 자기 생명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정신적 부담을 감수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서 임무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잠자고 있는 시간만은 처녀들도 사병들도 모두 그런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나는 그들 네 명의 잠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면서, 부엌 뒷문 쪽으로 돌아누우며 몸을 새우같이 구부렸다. 담요를 덮었으나 으스스 추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북신현에서의 밤은 이렇게 가고, 우리의 진격은 계속됐다. 국군 최선봉 부대의 전진은 예상보다도 빨랐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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