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동란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동서 냉전 속 미국과 소련간의 대립에서 찾기도 하고, 민족분단에 따른 민족의 통일 욕구 등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궁긍적으로 6.25동란은 김일성이란 인물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타당하다. 

    ◆ 北 김일성, 1949년 초 전쟁 준비 착수

  •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때의 김일성 주석의 모습(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자료) ⓒ 연합뉴스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때의 김일성 주석의 모습(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자료) ⓒ 연합뉴스

    전쟁은 그의 집요한 의지에 따라 실행된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기만 하면 쉽게 남한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전쟁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절대적 존재였던 소련의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는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 스탈린과 면담을 진행한다.

    스탈린은 군비확충 등 김일성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남한을 침공하겠다는 주장만큼은 시기상조라며 허락치 않았다. ‘실증자료로 본 한국전쟁’(공보처, 1990)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 방문에서 소련과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고 그 해 7월부터 1952년 6월까지 2억 1,200만 루불의 차관을 얻어냈다. 이 차관은 곧 전쟁 준비에 활용됐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승인을 받기 이전인 1949년 초부터 이미 전쟁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6.25동란에 관한 상당한 비밀자료들에 의해 밝혀졌다.

    1949년 9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소련으로부터 탱크 등 무기와 군수물자를 대량도입한 김일성은 중국에서 병력을 지원받는다. 중국은 1948년 후반부터 1950년 5월까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중공군(중국공산당 소속 군대) 내에 있던 한인병사들을 강제로 징발해 압록강을 건너 북한군에 배속시켰다. 김명진의 ‘역사의 비극을 남긴 6.25전쟁의 뒷이야기들’(북한, 95년 6월호)에 따르면, 이들의 규모는 3만 7,000여명에서 5만여명에 이르렀다. 

    ◆ “조선인민, 조국의 재통일과 영토 보존 위해 열렬히 전진하자”

    1950년 1월초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새해를 선도할 전체 조선인민은 조국의 재통일과 영토 보존을 실현해야 할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열렬히 전진하자”고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 의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1949년 10월 모택동이 장개석 정부를 누르고 중국 대륙을 공산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 3월 김일성은 다시 소년을 방문해 스탈린을 설득해 전쟁 계획을 승인 받은 뒤, 5월 중국 모택동으로부터도 전쟁을 일으키는데 대해 동의를 얻는다.

    1970년 후르시쵸프(스탈린 사후 소련공상당 서기장 역임. 스탈린 격하운동 전개)의 회고록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서방은 물론 한국에서조차도 전쟁 주도권을 스탈린이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김일성은 이 지시에 따라 시행한 ‘괴뢰(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을 통해 6.25동란이 실제 김일성이 주도했음이 밝혀졌다.

    김일성은 무슨 근거로 전쟁 승리를 자신하면서 스탈린을 설득한 것일까? 그 회답은 후르시쵸프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남한에 광범하게 퍼져있던 좌익들을 믿었던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김일성)는 남한에 한 두 번 자극을 주기만 하면 내란이 일어나서 인민의 힘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즉, 김일성은 북한군이 내려가기만 하면 좌익들이 동조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남한을 적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 8.15 서울서 광복절 D-50, 6.25

    북한은 전쟁에서 단기간에 승리를 거둔 후 1950년 8월 15일 광복절을 서울에서 성대하게 개최한다는 계획을 잡았다. 그들은 40일이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이를 역산해 6월 25일을 전쟁 개시 D-day로 정했다. 미국의 참전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 한 것이다.

    북한은 1950년 6월 7일부터 19일까지 즉 남침 1주일 전까지 평화공세를 취했다. 1950년 6월 7일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확대 중앙위원회는 최고입법회의를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고, 이를 위해 8월 15일 서울에서 회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어 6.25동란 발발 직전에는 그들이 구금하고 있던 민족대표 조만식과 남한에서 구금하고 있는 좌익대표 김삼룡과 이주하 2명을 맞교환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러한 심리전은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김일성은 중국 모택동 방문시 전쟁계획 3단계를 수립했다. 이에 따르면 1단계는 군사력을 증강하고, 2단계는 한국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통일방안을 제의하며, 3단계로 한국정부가 방안을 거부할 때 즉시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것이다. 

    ◆ 北의 기습 남침, 암호명 ‘폭풍’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암호명 ‘폭풍’을 하달하면서 북한의 전면 남침은 시작됐다. 전쟁이 일어난 날은 일요일. 전방군인 1/3이 휴가 등으로 병영을 떠난 상황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적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반면, 김일성은 6월 26일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북침을 했기 때문에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어전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으로 북의 심리전이었다. 전쟁의 명분과 정당성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북한군과 남한 좌익들에게 사기를 북돋우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남침은 진실이다.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격적으로 남침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 역사적 사실이다. 소련의 비밀자료 뿐 아니라 6.25동란 중 노획한 북한자료, 미국 자료 등 너무나 많은 증거 자료들이 속속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한 열세대 박명림 교수 등의 연구(‘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나남, 1996)로 인해 북침설은 허구로 확정된 상태다.

    한편, 한때 북침설을 주장한 좌성향의 사람들은 여전히 북한의 전쟁책임을 면케 하기 위해 남침유도설과 미소책임론, 분단책임론, 공동책임론 등의 논리들을 동원하고 있다.

    남침 사실은 자료 뿐 아닌 무기 등 남과 북의 군사력 격차만 보더라도 명확히 알 수 있다. 6.25동란 발발 당시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 보다 월등했던 것은 북이 미리 철저히 전쟁을 준비했다는 분명한 근거다. 병력면에서 보면 6.25동란 발발 당시 국군이 10만 5,752명인데 반해 북한군은 19만 8,380명으로 2배에 가까웠다. 남한은 그나마 후방에서 출몰한 빨치산 토벌 등으로 인해 군병력의 상당수가 후방에 배치돼 있었고, 전방에 있는 군인들조차 1/3 이상이 휴가 등으로 전선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전력을 논하는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또한, 남한은 전차가 한 대도 없었는데 반해, 북한은 T-34전차(탱크)를 무려 242대나 보유했다. 남한이 보유한 대전차 화기는 북한의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전차는 국군들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알아봅시다! 6.25전쟁사’(김행복, 2008)에 따르면 항공기는 남한이 연락용과 연습용을 합해 22대였는데 반해 북한은 전투기를 주종으로 해 211대였다. 이러한 항공기의 우세로 전쟁 초기 미군이 들어오기 전 북한은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한국 공군은 연락용 및 연습용 항공기 18대를 출격시켰다. 동승한 대원이 지상을 내려다보며 손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이렇게 해 6월 25일과 26일 양일간 48회 출격을 기록했으나 27일에는 폭탄이 모두 소모돼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남북 군사력의 외형적 격차 뿐 아니라 무기의 성능과 군인들의 전투능력까지 고려한다면 남과 북의 전투력 격차는 엄청난 것이었다. 

  •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때의 김일성 주석의 모습(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자료) ⓒ 연합뉴스

    ※ 본문은 현대사상연구회의 ‘6.25동란과 남한 좌익’(인영사, 2010)에서 발췌했다.

    현대사상연구회는 현대 주요 이데올로기들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상 갈등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자 및 전문가들의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