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동란은 공산주의세력이 자유민주주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사상전쟁의 성격을 지녔다. 6.25동란이 왜곡되는 이유는 공산주의세력이 갖는 본질적 특성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위선과 거짓을 하나의 중요한 전략전술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다.

    6.25동란 발발 원인에 대해서도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북한은 남한이 먼저 침공해왔기 때문에 방어전에 나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전쟁 때 북한이 주장했던 말들은 대부분 진실과 거리가 먼 거짓말이 많다. 이러한 북한이 주장했던 거짓말들이 역사적으로 기록돼 마치 진실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게다가 남한내에서 활동하는 친북세력들로 인해 6.25동란에 대한 왜곡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 ▲ 유엔군의 항공기에 의한 폭격(좌)과 원산정유소 폭파장면(우)
    ▲ 유엔군의 항공기에 의한 폭격(좌)과 원산정유소 폭파장면(우)

    특히 남한내 종북좌익들은 6.25동란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나쁜 존재로, 북한군과 중공군은 긍정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군과 미군을 학살 주범으로 몰아간다. 이러한 세력의 존재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미군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죽음의 공포와 전쟁경험 부족으로 오판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북한처럼 결코 의도적인 잔인한 학살행위를 자행하지는 않았다. 백선엽 장군이 쓴 ‘군과 나’에 기술된 언급을 통해 미군의 인권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을 거듭하며 시가전에 나설 때의 일이다. 어느 소대장이 2층 건물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이에 소대원들이 건물을 응시하며 돌진하자, 적들이 투항하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고 건물 입구 쪽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소대장을 잃은 병사들이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장교 헤닉 대령은 격렬한 어조로 항의했다. “투항하는 적에게 사격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만약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나는 한국군에 협조하지 않겠다”. 백장군은 급히 병사들에게 사격 중지를 명령했고, 장병들이 순간적으로 나마 이성을 잃을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적에게 절대로 사격을 하지 말라”는 훈련을 내렸다고 한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실태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건수가 109건이라며 이를 자세히 분석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대부분이 미 항공기에 의한 폭격에 의한 사망이었다. 말하자면 민간인을 죽이기 위한 잔혹한 살해가 아니라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사건 또는 오발로 인한 사고였다는 것이다.

    전쟁 중에 살포된 전단지 하나를 소개한다.

  • ▲ 국군이 피난민의 가재도구를 검색하고 있다(1950.8.13.)
    ▲ 국군이 피난민의 가재도구를 검색하고 있다(1950.8.13.)

    백선엽 장군은 수기에서도 인천상륙장전 이후 패잔병들이 북으로 탈출하기 위해 줄을 잇고 있었다는데 “피란민 틈에는 어느새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피란민처럼 위장한 ‘인민군’ 패잔병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작전지역에서의 북한군과 대결하는 국군 입장에서나 지리산 등 빨치산 토벌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군경 입장에서 볼 때 민간인 복장을 했다고 경계를 느슨하게 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아군을 제외한 모두가 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다라서 국군과 유엔군은 피난민들의 짐 수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북한군이나 빨치산으로 판단한 경우 흰 바지저고리를 입었다 하더라도 공격을 했던 것이다. 반대한민국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군경의 행위에 대해 모두 선량한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조익환 씨는 “그 때는 공산군이 주민들 사이에 숨어서 유엔군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이 너무도 비일비재한 일이어서 어떤 때는 피란민들이 두려울 때가 잦았던 곳도 사실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피란민으로 위장한 공산군이 갑자기 우리를 공격하게 되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위장한 공산군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후방으로 침투하여 아군에 피해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피란민들의 짐을 일일이 수색한 후 통과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 ▲ 서울 북방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란민 인파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 서울 북방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란민 인파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학살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군이 국군복장을 입고 가장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6.25동란 발발 당시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것도 국군복장을 한 북한군에 의해서였다. 채병덕 영남지구전투사령관은 경남 하동의 방어임무를 띠고 미 제29연대 병력과 합세해 진주에서 하동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1950년 7월 27일 아침 쇠고개 협곡에서 국군 복장을 한 대규모의 북한군과 만났다. 채병덕 소장은 전방으로 나가서 어느 부대인지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적은 도랑으로 몸을 숨기며 집중사격을 가했다. 채병덕 소장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 ▲ 서울 북방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란민 인파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 본문은 현대사상연구회의 ‘6.25동란과 남한 좌익’(인영사, 2010)에서 발췌했다.

    현대사상연구회는 현대 주요 이데올로기들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상 갈등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자 및 전문가들의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