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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6.25 전쟁 후 불모의 땅에서 단 기간 내에 산업화에 성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농업으로 먹고 살던 나라가 40 여 년 만에 산업국가가 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당시 세계 최빈국의 처지에서 단 기간에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인들은 뭔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고, 수출산업탑을 받는 기업가들은 한국을 잘 살게 하는 산업의 역군으로서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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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이제 우리는 지난 세대가 일구어 놓은 산업화의 토대 위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로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업들은 왠지 모르게 국민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저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실상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업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적 부에 의한 것이다. 그 외의 기관들, 예컨대 학교, 교회, 공공기관 할 것 없이 여타의 기관은 기업체가 창출하는 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웬일인지 사회가 기업을 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한데, 이런 분위기를 쉽게 반 기업 정서라고 하는 것 같다. 반 기업 정서는 특히 국민 경제에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중소기업 보다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대기업, 그것도 한국 특유의 재벌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반 기업 정서의 근원은 무엇이며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 추측해 보고자 한다.
반 기업 정서의 시초는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발단되었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을 장착한 초기의 공장에 멀리 촌락 지역에서 살던 수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196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 도시든 공장이든 갑자기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는 데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므로 초기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의 생활여건은 열악했다. 이런 분위기를 자본가의 착취로 규정하며 칼 마르크스는 “세계의 노동자는 연합하라.”며 선동하였다. 그런데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아무 희망이 없던 촌락보다는 그래도 도시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을 스스로 바랐던 것이다. 노동자에게 즉시 만족할만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산업화 초기 생산성이 낮은 탓이었지 자본가들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마르크스가 책상물림이 아니고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일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었다면 자본론 같은 주장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노동자에 대한 만족할만한 보수가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였는데, 이는 미국에서 프레더릭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창안하여 보급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과학적 관리법은 즉시 세계에 퍼졌고, 점차 노동자들은 돈 모아 자동차를 한 대쯤은 살 수 있는 중산층이 되어 갔다. 아마도 세계가 마르크스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지켜내며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공헌은 테일러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갑자기 사회의 주역으로 떠 오른 대기업 법인에 대한 질투심을 들 수 있다. 역사 이래 왕에게 귀속되어 있던 권력이 시민혁명 이후 공화정의 주요 기관들인 정부, 의회 등에 분산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기업 법인이 등장하여 수 많은 종업원을 고용한 자율적인 세력이 되어 버렸다. 기업체의 경영은 너무나 전문적이라 정부 권력이 실속 있는 참견을 할 수도 없고, 규제 등으로 참견을 해 봤자 대부분 기업체의 존재 목적인 경제적 부의 창출을 방해하는 일뿐이었다. 아마도 이들 대기업 법인의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권력은 사실 중세 시대의 봉건 영주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국가 권력은 온갖 규제로 기업체를 구속하려 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사실은 이런 막강한 권력이 대기업 법인의 경영자가 원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영자의 권력은 기업체 경영의 전문 영역에는 관심이 없고 증권에 투자해서 돈을 불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일반 투자자들이 등을 떠 밀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결국 대기업 법인의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본분인 기업경영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한 그들을 비난할 근거는 전혀 없다.
셋째는 이익에 대한 반감을 반 기업 정서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이 실은 국가경제를 지탱하게 하는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이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이 경영을 맡았다고 해도 이익을 내지 못하면 그 기업은 오래잖아 망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익은 기업 경영의 본질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너무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인가? 큰 이익도 사실은 다른 경영자에 비해서 기업을 성장시킨 능력을 칭찬할 일이지 비난할 일은 아니다. 또한 회계 보고서에 나온 이익이라는 것이 매우 추상적인 수치인 점을 생각해야 한다. 드러커는 회계 상의 이익은 기업이 장래에도 생존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미래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오히려 비용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했다. 사실 이익이라는 추상적 수치는 미래를 위한 생존 비용을 제하고 나면 적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이 좀 났다고 떠 벌이며 경영진과 종업원 할 것 없이 온갖 명목을 붙여 보너스로 뜯어 가는 것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것과 같이 무책임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넷째는 기업체가 정직하게 처신을 하지 못함으로써 비난 받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무슨 비자금 사건 같은 것이 이런 예에 속한다. 하지만 기업 경영의 표준은 점차 선진화 되어 가고 있고, 사실상 현재의 수준으로 보더라도 기업체가 다른 사회적 기관들에 비해 특별히 부정직한 편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개인과 대기업체의 세무 관행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정직하게 세금을 신고하는지 생각해 보면 분명 공인 회계사의 감사를 받는 후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약간의 근거가 있어 보이는 반기업 정서의 원인은 그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일반 근로자에 비해서 너무 큰 보수를 가져가는 점일 것이다.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는 종업원 평균 급여의 수백 배에 달하는 보수를 받고, 기업 경영에 실패해서 구제 금융을 논해야 하는 자리에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가는 지각 없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들의 끝 모르는 욕심이 세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단기 성과를 바탕으로 경영진의 보수를 주는 미국의 경영은 마치 기업 경영을 도박판과 같이 저급한 게임으로 보이게 한다. 반면에 몇 년 전 회사의 부도로 거리에 나 앉게 된 종업원을 취업시켜 달라고 TV 에 나와 눈물로 호소하던 일본 경영자의 모습에서 일본의 경영은 경영을 단지 경제적 성과를 내는 기관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 이루어진 기관임을 깨닫게 한다. 한국의 기업 관행은 일본보다는 미국식에 가깝다. 바라건대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서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은 스스로 삼가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불필요하게 사회의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다원적 사회의 주역으로 떠 오른 기업체를 비난하는 정서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실리적으로도 그리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 감정적인 성격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실리적으로 보더라도 오늘날의 고용 문제, 비정규직 문제, 국가 경제의 성장을 통한 복지 증진 등 산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력은 오직 기업가 정신에 충만한 기업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서 나온다. 그 밖의 온갖 해결책이라고 하는 공공근로 사업이니 일하는 시간 나누기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미봉책일 뿐이다. 국가를 안보적으로 지켜주는 군인의 애국심을 북돋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주역인 대기업 법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칭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지도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다급하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투자처를 외국에서 찾지 말고 국내에다 투자하라고 하는 것은 인정머리 없는 일이다. 차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을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 예컨대 한국에서의 기업은 계속성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상속세도 면제해주는 등 규제와 제도 면에서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