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함 사건이 난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전 국민의 관심이 이 사건에 쏠렸던 것 같은데 6.2 지방 선거 후 이제 천안함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 나면 온통 너나 할 것 없이 그 일에 관심을 쏟다가도 어느덧 다른 이슈가 생기면 앞의 일은 완전히 잊어 버린다.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미국은 아직도 2008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됐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위한 국회 위원회를 가동 중이며, 바로 오늘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트리플 A’ 급 신용평가를 함으로써 위험을 경고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던 무디스의 회장 등을 청문회에 불러 심문하고 있다. 
     

  •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장병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천안함 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어 더 튼튼한 안보 태세를 갖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스스로 반성할 부분을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하나의 사안을 놓고 어떻게 그리도 상반된 주장들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다. 사실 바람직하게는 그 사안의 책임을 지고 있는 기관이 조사하여 결론을 발표하고, 그 후 또 관련되는 기관들이 대책을 논의하여 실천하면 되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학적 사고의 부재, 즉 불합리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비능률적인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는 누가 거짓 주장을 할지라도 그 잘못을 추궁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성, 과학성에 있어서 어떤 수준일까 먼저 생각해 본다. 어떤 사고를 다루는 우리나라 언론의 뉴스를 보면 과학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뉴스에서 “경찰은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접한다. 하지만 사건 현장을 녹화도 하지 않고, 또한 신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자신할 수 있는가? 신만이 할 수 잇는 일을 마치 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 기자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경찰은 다만 충실히 증거를 수집해서 가설적으로 세운 원인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그 증거와 실험 방법이 충실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유사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때 그 조사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내린 결론도 낮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틀릴 수는 있다. 따라서 사건 조사에 대한 언론 보도는 “경찰은 사고의 원인으로서 00 가능성을 놓고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즉 과학적 사고란 첫째, 정확성 자체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정확성 이전에 경험적 방법론, 즉 증거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리겠다는 실증적 방법론을 요구한다. 이번 천안함 사건은 국가 안보의 중대성에 비추어 신중한 조사와 다국적 전문가 집단이 참여한 조사에 의해 결론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몇 가지 사고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설정했고 이어서 다각적인 증거 수집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결론을 도출하는 실증적 방법(empirical method)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조사 과정에서 결정적 증거를 못 찾았다면 심증은 가지만 증명할 수 없었다라는 결론이 내려졌을 것이다.
     
    둘째로,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그 주장이 관찰 가능한 증거에 의해서 확실히 반증될 수 있는 주장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 저것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주장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념이다. 그 이념을 위해 필요한 설명을 이리 저리 꿰어 맞추게 되니 합리성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사건의 과정에서 이념적 편향 때문인지 그 결과에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물론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주장이 합리성을 가지려면 역시 앞서 살펴본 대로 실험적 증거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주장이라야 한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자면 관련된 증거에 의해서 주장이 기각되면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가 바로 과학적인 자세라는 말이다.
     
    불합리한 주장을 주특기로 삼는 사람들의 논법에는 십중팔구 점쟁이의 점괘와 같은 모호성이 숨어 있다. 딱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도 처음 사건이 났을 때 이들은 미군 전함과의 충돌설 등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 후 여러 증거 상 북한의 행위임이 드러났지만 이들은 결코 자신들의 주장에 잘못이 있었다고 시인하는 일도, 또한 사건을 일으킨 북한을 질타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안보에 구멍이 뚫린 점을 지적하며 군을 문책하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에 대해서도 전쟁설을 제기하며 초점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우리 정부를 부정하고 북한을 편드는 더 큰 이념을 위해 그것에 도움이 되는 주장들을 하나씩 제기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현대 과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아인시타인의 이론은 결코 양다리를 걸치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에 의하면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의 주위를 통과해 온 빛은 그 중력에 의해 휘게 된다. 따라서 태양의 주위에 보이는 별자리는 태양과 멀리 떨어졌을 때의 같은 별자리에 비해 빛의 휨에 의해 다른 모양을 나타내게 된다. 하지만 이 실험이 어려운 점은 태양이 너무나 밝아서 낮에는 그 주위의 별들을 사진 찍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은 ‘에딩턴(Eddington)의 원정(1919)’에 의해 검증되었는데, 그는 개기일식 때 태양 주위의 별자리 사진을 찍고, 이를 밤에 찍은 같은 별자리 사진과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실험에서 예측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은 간단히 폐기되는 운명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과학의 속성이다.
     
    이렇게 과학적, 합리적 사고란, 객관적인 관찰, 실험, 증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주장을 하며, 그 주장에 성실성이 있어서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양다리가 아니어야 하며, 또한 다른 반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합리적인 결론이라면 군소리 없이 믿어 주는 사고방식이다.
     
    앞에 언급한 미국 무디스의 회장이 청문회에서 밝혀야 했던 것은 자신의 회사가 갖고 있는 정보와 평가 도구를 가지고 전문가의 윤리를 지켜 최선의 의사결정을 했는데도 ‘트리플 A’ 라는 평가가 나왔는지, 아니면 무슨 목적에 의해 전문가의 윤리가 지켜지지 않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도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 이리 저리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은 끝까지 청문회에 세워서라도 그 불합리와 비윤리성을 교정시켰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