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反軍감정 확산에도 軍은 침묵-  
       
     전남도청 앞에서「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차별 집중 사격하는 공수부대원」(영화 장면)은 조작이다. 그날 공수부대는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를 몰고 돌진하자 살기 위하여 조건반사적으로 사격했다. 전남도청 앞에서 11여단 61대대를 지휘했던 安富雄 대대장은 『만화 같다』고 했으나 영화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며 시작된다.  
     
    보기 싫었던 영화 
     
     「화려한 휴가」는 정말 보기 싫은 영화였다. 너무나 우호적인 언론보도를 통해서 영화의 의도와 내용이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左派(좌파)-어용 언론뿐 아니라 정상적인 언론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好評(호평) 이외에 일체의 비평을 삼가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金大中, 朴槿惠, 盧武鉉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 나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大選을 앞두고 개봉되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영화이니 공수부대를 惡으로, 시민들을 善으로 그렸을 것이 뻔하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의무감이 생겼다.
     
      1980년 5월,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필자가 광주사태(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나 선입감을 배제하고 객관적 기술을 하기 위해서 이 기사에선 「광주사태」라고 표기한다)를 취재하러 가지 않으면 기자로서 죄를 지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評(평)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20代 직장여성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숨과 눈물 훔치는 소리가 관람석에서 들리더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공수부대가 야수처럼 변하여 잔학한 진압을 해야 했는지 그 영화로는 잘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면 국군에 대해서 치를 떨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親韓派(친한파) 일본인은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면서 다소 흥분해 있었다.
     
      『저 나름대로 광주사태를 조사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화가 솟았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왜곡한 데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공수부대의 잔혹상을 강조한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을 敵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에 대해서 집단발포하는 장면,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기자는 혼자서 이 영화를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황산벌」이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戱畵化(희화화)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쓰도록 했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혼자서 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같이 가서 보는 것이 마음이 좀 편할 듯했다. 同行(동행)할 사람을 생각하다가 安富雄(안부웅)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공수부대 대대장 출신과 영화관으로
     
      安씨는, 1988년에 내가 月刊朝鮮 기자로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그해 7월호 게재)를 취재할 때 만난 공수 11여단 61대대장 출신이다.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와 트럭 등을 몰고 돌진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했을 때 그는 현장의 지휘관이었다. 「화려한 휴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집단발포의 현장,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제 주인공이다. 고참 대령일 때 그를 만나 취재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격정적으로 쏟아 놓았던 이야기는 月刊朝鮮 기사에선 匿名(익명)의 증언으로 처리되었다.
     
      1988년 가을, 국회의 광주사태 청문회 때 증인으로 불려나온 그는 내가 쓴 기사로 인해서 곤욕을 치렀다. 月刊朝鮮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는 청문회 국회의원들의 교재가 되어 증인신문에 자주 인용되었다. 1995년 5·18 사건이 再수사될 때도 安씨는 여러 번 검찰에 불려가 신문을 받았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많이 조사를 받은 이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도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安씨는 광주사태의 핵심인 발포 경위를 조사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66세인 安富雄씨를 19년 만에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교회 입구에서였다. 그는 내가 찾아온 의도를 묻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공수대대장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는데, 「군인들이 너무했더군」 하셔요. 제가 말했지요. 「아니 목사님, 그런 영화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한번 영화를 보기는 해야겠는데 내키지 않아요』
      
        安富雄 예비역 대령은 서울 출생으로 갑종 출신 장교이다. 월남 전선에 두 번 파견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 대대장 중에 공수부대 경력이 가장 많다. 직업군인 출신답게 모양과 행동이 아직도 각이 진 느낌을 준다. 그는 『이제 잊을 만했는데 그 영화 때문에 또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뻘?륫ㅀ凱形ㅉ卉ㅏ?여러 번 불려다니는 데 신경을 쓰던 부인은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저는 지난 3년간 호스피스 일을 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이 수용된 시설에 매일 나가서 죽어 가는 이들의 말동무를 했습니다. 저의 인생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사이는 교회 일을 돕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색소폰 연습도 자주 합니다』
     
      安씨는 검찰이 결론 내린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趙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입니다. 검찰이 그렇게 캐보았지만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영화관으로 갔다. 「화려한 휴가」의 다음 상영까지는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게 공을 들여 영화를 본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감정 없는 살인기계?
      
    1996년 10월14일 12·12 및 5·17사건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안부웅 前 대대장(오른쪽). 왼쪽은 양대인 前 11공수여단 참모장.

      그 다음 월요일 오후 기자와 安 前 대령은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공수부대를 「惡의 化身(화신)」 정도가 아니라 「살인기계」로 그린 영화였다.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 측의 인물들은 至高至善(지고지선)의 영웅이요, 천사들이었다. 너무 도식적 설정이어서 감동은 없었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시민들을 두들기는 「퍽, 퍽」 소리가 일종의 영화음악이었다. 공수부대가 왜 이런 진압방식을 썼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부족했지만, 조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광주사태 직후 계엄사가 발표한 檢屍(검시)조서상의 死因(사인)분류 통계가 있다.
     
      165명의 사망자 중 18명이 타박상, 4명이 刺傷(자상)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타박상은 주로 머리이다.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시민들의 머리를 난타하고 찔러 죽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모습을 본 온건한 광주시민들까지 화가 나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다가 나중엔 트럭·택시·버스·장갑차를 몰고 나와 軍警(군경)을 몰아붙였다. 시민들은, 5월21일 공수부대가 발포를 시작할 무렵엔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카빈·기관총·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여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화려한 휴가」는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야수 같지도 않고 기계처럼 보인다. 야수는 감정이라도 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공수부대원들에게선 인간적 감정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공수부대가 흥분하여 몽둥이질을 하게 된 것은 공수부대의 특권의식에다가 「계엄령下에서 민간인이 감히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져?」라는 감정이 출발점이었다.
     
      安富雄씨는 『釜馬사태식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시위는 자동적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대항한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위 진압장비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을 던지는 다수 시위대를 향하여 쏠 최루탄도 가져가지 않았고, 돌을 막아 줄 방패도 없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防石網(방석망)은 軍 수송반에서 엉성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영화에선 시민을 추격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공수부대원을 시민이 쏴 죽이고 때려 눕히는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 시민이 빌딩 옥상에서 공수부대를 향해서 기관총 난사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가 시민들에게 기관총 쏘는 교육을 한다. 트럭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탈취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이런 장면을 보고도 관객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공수부대는 악당으로, 시민은 정의로운 사람들로 극적 대비를 이룬다.     

      이 영화엔 공수부대의 사격을 유발한 시위대의 장갑차, 버스 돌진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安富雄 예비역 대령에게 물었다.   
      『줄곧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만화더군요. 그런 식의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감옥에 갔지 내가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면 부대원들이 나를 가만두었겠습니까? 부대원들 중엔 호남 출신도 많았는데.
     
      그 영화에선 왜 「김대중을 석방하라」, 「최 돼지는 물러나라」는 구호는 안 나옵니까?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것 같은데 왜 가만있는지 모르겠네요. 공수부대가 살인마가 되었는데』
     
      다음날 국방부에 알아보니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각종 장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軍에서는 영화사 측에 사실왜곡에 대해서 항의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보냈다.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造作(조작)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없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첫째, 영화에서는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한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도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하여 돌진해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그리고 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이때도 공수부대 중대장들에게만 15발씩 지급되고 일반 사병들에겐 실탄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긴다. 영화 관람자는 공수부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공수부대만 표적으로 삼은 저의는?
     
      국방부는 이 장면에 대해서 영화사에 항의하고 국민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어야 했다. 軍 장병들에게는 특별한 政訓(정훈)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수부대의 난폭한 몽둥이 진압이 광주사태의 한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확대하여 공수부대를, 「동족을 무차별 사살하는 살인집단」으로 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 「이 영화는 史實과 다릅니다」라는 주의를 주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고 한 것은 2중의 왜곡이다. 국방장관은 영화를 보았다는 대통령을 찾아가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어야 했다.
     
      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9월1일 서울시내 영화관에서 김지운 감독, 기획시대 제작의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은 영화를 본 후 눈시울을 붉혔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오마이뉴스는 그가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얼마나 들었습니까?』(DJ)   
      『400만 조금 넘었습니다』(유인택)   
      『얼마나 더 들겠습니까?(DJ)   
      『700만~800만 정도 예상합니다』(유인택)   
      『좀더 노력해서 1000만 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DJ)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셨습니까?』(유인택)   
      『마지막 결혼식은 명장면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DJ)
     
      朴槿惠 한나라당 前 대표는 경선기간에 광주의 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 심정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인데 上記 정치인들은 事實이라고 전제하고 감정적 반응을 보인 듯하다.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영화 제작자의 선전이 먹힌 셈이다.   
      이 영화는 공수부대의 「蠻行(만행)」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수부대 이외의 진압부대, 즉 31사단이나 경찰은 열외시켰다. 광주사태는 특공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시위 진압에, 그것도 진압장비 없이 투입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全斗煥 장군 그룹, 이른바 新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고, 학교를 휴교시킨 이른바 5·17 조치의 일환으로 공수부대가 광주에 내려간 것이다. 1996년 대법원은 全斗煥 그룹의 이 조치를 내란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도 내란행위가 되었다.
     
      영화는 이런 배경 설명을 소홀히 하고 공수부대의 강경진압만 부각시켰다. 광주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공수부대에만 집중시키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反국군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 5·18 재판 때 법원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에겐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검찰은 집권과정의 주모자만 기소했고,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영화는 검찰이 「처벌불가」라고 결정했던 공수부대를 처벌하고 있는 셈이다. 

      非체험 세대를 誤導할 영화   
      6공화국 때의 국회 청문회, 金泳三 대통령이 지시한 5·18 사건에 대한 再수사로 인해서 광주사태의 진상은 거의 완전하게 드러났다. 시민 측의 시각과 정보가 지배적이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진압군 측의 정보도 많이 공개되었다. 진압군과 시민 양쪽에서 이 사건을 종합적·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고, 피해보상이 이뤄졌으며, 고위 책임자들이 斷罪(단죄)를 당했고, 사람들이 성숙해졌다. 「화려한 휴가」는 이런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 시민 측의 시각에만 충실하다 보니 진실에서 멀어졌다. 이런 영화는 1980년대에 나왔어야 했다.
     
      광주사태는 벌써 27년 전의 사건이 되었다. 광주사태를 잔인하게 진압한 全斗煥 정권에 대한 분노가 1980년대 학생운동권, 즉 386세대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 사건을 日帝시대 사건 정도로 아득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가 잘못된 선입감을 白紙(백지) 상태의 이 젊은이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非체험 세대에겐 이 영화가 광주를 이해하게 하는 교과서 역할을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공수대대장 安富雄의 광주사태」를 소개해야 균형이 잡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휴가」는 시민 측의 시각을 편파적으로 대변했지만, 나의 기사는 공수부대의 시각을 공정하게 소개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安富雄씨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과 최근 기자에게 증언한 내용, 그리고 검찰 수사로 확정된 사실들을 종합한다. 기사에서 나오는 질문은 검사가 한 것이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공수부대 투입
     
      11공수여단의 61대대장이었던 安富雄 당시 중령은 1980년 5월19일부터 광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1여단은 강원도 춘천에 본부가 있었다. 全斗煥이 장악한 군부는 5월17일 全軍지휘관 회의를 열고 전해 10·26 사건(朴正熙 대통령 피살 사건) 이후 계속되어 온 비상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해 全國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으로부터만 지휘를 받아 三權을 통제하게 된다.
     
      학생 시위의 확산을 막는다는 구실로 5월18일 0시를 기해서 발령된 계엄확대조치와 동시에 합동수사본부(본부장 全斗煥)는 金大中·金鍾泌 등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여 崔圭夏 대통령을 포함한 기성 정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國保委(국보위)를 통한 정권 인수에 들어갔다.
     
      5월15일까지 전국적으로 학생 시위가 확산되어 계엄해제를 요구했으므로 軍은 부대를 출동시켜 지방의 대학교를 점령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던 서울·광주엔 주로 공수여단을 중심으로 편성된 강력한 진압부대를 투입했다. 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실무 간사 역할을 했던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 權正達(권정달)씨는 이렇게 진술했다(1996년 검찰).
     
      <釜馬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初動(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 교훈이,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방침을, 신군부 핵심세력이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진압」으로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1979년 10월 釜馬사태 때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이 먹혔던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鐵拳(철권)통치 체제下에서 일어난 시위였기 때문에 지속력이 약했고, 시위대가 비상계엄령 선포에 눌려 아예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1980년 5월은 달랐다. 金泳三·金大中·金鍾泌의 3金 세력이 주도한 「80년의 봄」이 민주세력을 고무했고, 학생·노동자들이 한창 욕구를 분출시키고 있을 때였다. 釜馬사태 진압이 불씨를 끈 것이라면 광주 진압은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을 잡는 일이었다. 이 점을 신군부는 간과했던 것이다. 
      
      타작당하는 공수부대   
      『1980년 5월17일 새벽, 주둔지에서 출발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포 1공수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5월18일 12시경 동국大에서 천막을 한참 치고 있는데 오후 3시경에 여단장으로부터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실탄은 개인에게는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 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당시 출동장비는 어떤 것이었는가요.
     
      『개인장구로 M16·군장·방석모 등과 부대장비로 팀 단위 무전기·가스살포용 화염방사기 등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계엄군으로 출동하면 대학을 점령하고 운동장에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둔 개념으로 장비를 가지고 다닌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TV, 테니스 라켓 등 개인 私物(사물)도 전부 가져갔습니다』
     
      광주로 공수된 11여단은 5월19일 새벽 조선大에 본부를 설치했다.
     
      『1980년 5월19일 새벽이라 그런지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습니다. 배치된 병력들로부터 「이상無」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이상황은 없었습니다. 그 뒤 (여단 본부인) 조선大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면서 지내다 세면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1지역대장으로부터 무전보고가 왔습니다.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지역대장에게 침착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확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10여 명 정도가 2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군인에 대항하는 데 흥분, 무차별 폭행
      광주에 맨 먼저(5월18일)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사람이었다. 35대대 3중대장 朴炳洙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朴씨는 『5월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전북 금마의 여단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했다』 고 말했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대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정오 무렵 7여단 33대대는 가톨릭 센터로 출동,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03명을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했다. 33·35대대는 다시 충장로와 금남로로 진출, 시위자 283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시민 측에서 본 7여단 진압 상황은 사뭇 달랐다. 당시 ㄷ일보의 광주주재 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18일 오후 4시쯤 나는 광남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고층빌딩의 광고탑에 올라가 밑에서 벌어지는 데모 장면을 사진촬영하고 있었다. 市 외곽 방면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수십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터리 앞에서 전원 하차하더니 대오를 정비했다. 그걸 보고 시위 학생들은 벌써 달아나 버리고 길가에는 구경 나온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 속에서는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멋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도 있었다.
     
      공수부대 병력은 횡대로 늘어섰다. 장교가 핸드 마이크로 경고방송인가를 하더니 그대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광고탑이 세워진 건물의 옥상으로 피신해 올라오는 것을 나는 광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수부대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나는 「하느님, 이번만 저를 살려 주시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탑 아래 옥상에서는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머리, 어깨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몽둥이가 머리를 칠 때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게 보였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참 있다가 광고탑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양동이로 핏물을 부어 놓은 것처럼 아래 계단에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윗몸이 발가벗겨진 청년들이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청년을 붙들면 윗옷을 찢어 머리를 덮어씌우고는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가 트럭에 던져 넣듯이 하여 어디론가 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첫날은 사망자가 없었다. 이틀째인 5월19일 시민 두 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20일엔 시민 네 명이 타박상으로 죽었다. 이날엔 경찰관 네 명도 시위대가 몬 버스에 치여 죽었다. 
      
      경북 번호판 차 불타고 운전사 쓰러져
     
      ―고소·고발인 및 당시 광주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이 주장하기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심지어 군화발로 얼굴을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병사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에 하반신을 때리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타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5월19일 날이 어두워지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북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경찰에 인계하여 후송시키고 다시 로터리로 복귀했습니다』
     
      첫날부터 광주지역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따위였다(검찰 수사 보고서).
     
      ―5월20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그날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상황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1개 내지 2개 팀을 주요 목지점에 배치해 놓았는데 12시경 되니까 시위대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습격하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시위대 중 40~50代 정도의 사람 2~3명이 계엄군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디 부대냐, 언제 내려왔느냐」라고 물으나 저희 병력은 답변하지 않고 「해산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삽시간에 100여 명 이상의 시위대가 집결했습니다.
     
      시위대가 집결하면 앞에서 말을 걸던 사람이 군중 속으로 빠지면서 「우우」 하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군중들도 따라하다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200~300명이 모여들어 같이 돌을 던지곤 해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우리 대대는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저희 대대 작전지역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며, 순식간에 금남로 전체에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습니다. 여단에 즉각 상황보고를 하니 여단에서는 「도청을 死守(사수)하고 宣撫(선무)작전을 통해 시위군중을 해산하라」고 막연하게 지시했습니다.
     
      시위군중이 많아져 도저히 우리 대대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62대대도 시위군중에 밀려 금남로로 들어와 우리 대대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차량 공격 시작
     
      ―병력배치를 한 다음에는 상황이 어떠했나요.
     
      『여단에서 지시받은 대로 宣撫작전을 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있던 돌을 공수부대에 던지고 화염병도 던져 그때부터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돌, 화염병과 최루탄을 투척하는 상호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9시경이 되자 최루탄이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해서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지금 무등 경기장에 차량 100여 대가 집결, 금남로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단에 보고하니 여단에서는 「宣撫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지원도 해주지 않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밀려들어 오는 차량들을 보니 분명히 저희 병력을 향해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병력을 인도 쪽으로 비키게 했습니다.
     
      저희 뒤에는 경찰병력이 횡대로 배치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