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26) 

     오선희는 이른바 신여성(新女性)이다.
    신여성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오선희는 주관이 뚜렷했고 의사 전달이 분명했다.

    만민공동회 모임에서 여성 연사로 단에 올라 연설을 한 오선희인 것이다.
    그러나 용모는 성품과는 달리 섬세했다.
    몸매도 가늘고 갸름한 얼굴에 흰 피부, 엷은 입술과 맑고 또렷한 눈을 가진 미인이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내가 중추원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방으로 오선희가 들어서며 묻는다.

    「오늘 황제께 대신임용후보 명단을 제출 하실건가요?」

    놀란 내가 되물었다.
    「그건 어떻게 압니까?」
    「도성 안에 소문이 다 났습니다.」

    다가선 오선희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황제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것도 모두 예측하고 있지요.」
    「또 있습니까?」

    「황제께서 중추원을 해산하실 것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허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해체 하실 것이라고도 하더군요.」
    「민중의 소문이 맞을지 모르겠군.」

    단벌 양복 단추를 채운 내가 방 문고리를 잡았을 때 오선희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전라도 전주부 안에 사가(私家)를 한 채 소유하고 계십니다.
    아버님은 선생님이 그곳으로 피신하시도록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말씀이오?」
    놀란 내가 몸을 돌려 오선희를 보았다.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오선희의 볼이 조금 상기되었다. 
    오선희는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잇는다.
    「아버님은 군중속에 끼어 선생님의 연설을 여러번 들으셨다고 합니다.」
    「......」
    「아버님은 황제는 개혁의 의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조선 땅이 이토록 참혹해진 가장 큰 원인은 무능하고 부패한 황제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
    「그리고.」

    입안의 침을 삼킨 오선희의 열띤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선은 곧 일본의 속국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이 결코 조선이 독립된 문명국으로 깨어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만하시오.」

    마침내 내가 오선희의 말을 막았다.
    이미 내 주변의 동지들, 중추원 의관직에 있는 친지들까지 그렇게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좌절감에 빠질 때가 많은 것이다.

    내가 오선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오.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말이오.」

    방을 나온 내 어깨가 늘어졌다.
    오선희 아버님의 말이 구구절절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꼿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종로거리로 들어섰을 때는 오전 9시쯤 되었다. 아직 길가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고 행인도 뜸하다.

    재석을 뒤에 따르게 하고 바쁘게 걷던 나는 문득 앞쪽 가게 앞에 서있는 두 사내를 보았다.
    낯이 익다.
    하나가 궁내부의 김모(某)라는 자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는 목례를 하더니 발을 떼어 길로 나왔다.

    내 앞을 가로막는 형국이다.
    재석이 서둘러 내 옆으로 다가섰을 때 김모가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이의관께서 결심을 하셨는지요? 그 말씀을 들으려고 제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