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23)

     기석(奇石)은 나를 진심으로 따랐지만 여전히 이시다 주우로(石田十郎)와 접촉하고 있다.
    지금은 기석이 미국 공사관의 정식 통역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둘이 무슨 일로 만나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중원의 입원실을 숙소로 삼은 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 그러니까 사건 이틀째 오후에 기석이 나를 찾아왔다. 기석은 말끔한 양복에 중절모까지 써서 일본 거상(巨商)처럼 보였다.

    방으로 들어선 기석이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나으리, 이시다씨는 나으리를 습격한 자들이 둘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내 앞쪽 나무 걸상에 앉은 기석이 말을 잇는다.
    「하나는 황제 직속의 친위군인 이익치 휘하 무리이고 또 하나는...」

    잠깐 말을 멈춘 기석이 힐끗 내 눈치를 보았다.
    「박영효가 보낸 자객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 리가」

    쓴웃음을 지은 내가 기석에게 물었다.
    「내가 그분을 이번에 대신임용 후보로 올리려고 한다는 소문이 시중 애들한테까지도 다 퍼진 상태가 아닌가? 그런 나를 그분이 왜 해친단 말이냐?」

    「황제에게 누명을 덮어씌우려는 공작이라는 것이오. 나으리는 이제 개화파 학생,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 나으리를 황제가 제거 했다면 민중들의 원망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 친위조직 이익치군이 나를 습격했다는 말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린다.」

    「이시다씨는 이익치 측에서도 일본군의 소행으로 위장하고 나으리를 치려는 공작을 준비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박영효의 자객이라는 심증이 간다는 것입니다.」
    「조선 땅이 음모로 뒤덮였구나.」

    내가 탄식하듯 말했더니 기석이 정색한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두 제 잇속만 차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황제가 앞장서서 직(職)을 팔고, 이권을 팔고, 뇌물을 받아 챙기는데 어느 놈이 충성을 하겠습니까? 그런 놈은 바보 아니면 미친놈이 올시다.」

    옆에서 겪고 보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배재학당에 다닐때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현실과 부딪쳐보니 소문보다 더 추했고 더러웠다.
    그때 기석이 불쑥 묻는다.

    「이런 상황인데 나으리께서는 박영효를 그대로 대신임용후보로 추천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렇다.」

    거침없이 말한 내가 기석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난국을 헤치고 나갈 유일한 인물이 누구일 것 같으냐?」
    「박영효가 아닙니까?」

    이맛살을 찌푸린 기석이 다시 묻는다.
    「그래서 박영효를 기를 쓰고 대신으로 추천하여 귀국 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박영효가 귀국을 할까?」

    이번에는 내가 묻고 바로 내가 대답했다.
    「안온다. 황제가 승인을 해도 오지 못할 것이다. 민심도 떠난데다 황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함정이라고 생각하겠지.」

    기석은 멀뚱히 시선만 주었고 내가 말을 이었다.
    「황제가 앞장서면 이 난국이 풀린다. 기득권을 내놓겠다는 희생정신, 역적도 조선 땅의 개혁에 필요하다면 기용하겠다는 의지, 황제가 그런 자세만 품고 있으면 다 이뤄진다.」

    그리고는 말을 그친 내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불쑥 묻는다.
    「과연 그렇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