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⑳ 

     김모의 제의를 들은 순간부터 거부할 작정이었으니 나에겐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대놓고 그 자리에서 거부하지 않은 것은 예의였다.

    나에게 김모의 제의는 안재훈한테서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장사를 하는 장면을 본 것이나 같았기 때문이다.

    「나으리, 오늘은 여기서 묵으실 작정이십니까?」
    하고 재석이 물었을 때는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본가에 들러 아버지를 뵈었고 처자를 만났지만 심사가 뒤숭숭했다.
    이번 제의 때문이 아니다.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나는 마당에서 서성대는 중이었다.

    재석의 시선을 받은 내가 낮게 말했다.
    「며칠 집에서 묵을까 했더니 안되겠어. 아버님께 인사나 하고 다시 중촌으로 가세.」
    나는 그때 수표교 근처의 중촌 사가(私家)에서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불안해서요.」
    이미 주위는 어두워서 마당에 선 우리 둘은 불을 밝힌 안방과 사랑방을 번갈아 보았다.
    사랑방에서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울렸다.

    내가 의관이 되고나서 아버지는 평산 누님 댁에 가시지 않는다.
    관리의 부모로써 언행에 조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머물게 되자 아내와의 충돌이 일어났다.
    내가 듣기로는 아내의 일방적인 구박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에 뵌 아버지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며느리의 언행을 말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심호흡을 한 내가 마침내 재석에게 말했다.
    「아버님께 인사 여쭙고 올테니 기다리게.」
    「예, 나으리.」

    다 알고 있는 재석의 목소리에 측은함이 얹혀져 있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어, 어서 오너라.」

    8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 저녁상이 나오지 않았다.
    겨울의 저녁 8시면 밤중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배고픔을 참고 부엌 기척만 기다리고 있다.

    앞쪽에 앉은 내가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내일부터 평산 누님댁에 가계시지요. 그리고 이것...」

    나는 미리 준비한 봉투 두 개를 꺼내 아버지 앞에 놓았다.
    봉투에는 미화로 각각 50불씩 들어 있었으니 아버지와 누님댁이 각각 석달은 먹고 사실 수가 있을 것이다.

    눈만 껌벅이는 아버지를 향해 내가 열심히 말을 잇는다.
    「여기는 염려하지 마시구요. 제가 가끔 봉수를 건사 할테니까요. 아버지 부디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은 내가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1837년생이었으니 당년 62세가 되셨다.

    내 시선과 마주친 아버지가 불빛에 번들거리는 눈을 꿈벅이시더니 곧 외면했다.
    내 가슴속 말까지 다 읽으신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옆모습에 대고 다시 말했다.
    「아버님이 누님 댁에 편히 계셔야 제가 마음 놓고 일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오냐, 알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봉투 겉봉에 누님과 아버지 표시를 해 놓은 것을 아버지가 우두커니 보더니 이윽고 소매 속에 넣는다. 석유기름 등이 외풍을 받아 흔들렸다.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나는 일어섰다.
    이제야 저녁상이 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