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⑮ 

     「저 좀 보세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몸을 돌렸다. 어둠속에서 남녀 둘이가 다가오고 있다.
    부르는 소리는 여자였고 오선희 목소리였다.
    인화문 밖에서 헤어졌는데 이곳까지 따라온 것 같다.

    내가 옆에 선 재석에게 말했다.
    「잠깐 비켜주게.」
    「예, 나으리.」

    재석이 금방 어둠속으로 묻혀졌다.
    재석은 박무익이 붙여준 경호역이다.
    광대로 떠돌아다니다가 박무익의 의병이 되었는데 택견의 고수(高手)였고 검술도 훌륭했다.
    재석이만 옆에 있으면 아무도 겁나지 않는다.

    다가온 오선희 옆에 선 사내는 청지기 문규다.
    「선생님,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선희가 말했을 때 문규도 허리를 굽신 하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정동교회가 저만큼 보이는 거리는 인적이 드물다.

    오후 8시가 되어가는 겨울밤인 것이다.
    길가 담장에 붙어선 오선희가 말을 잇는다.
    「선생님, 지금 피신하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머무실 곳을 주선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오.」

    머리부터 저은 내가 정색하고 말했다.
    「폐를 끼칠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반걸음을 바짝 다가섰더니 오선희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크게 뜬 두 눈은 두려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오선희가 다니는 연동여학당(連洞女學堂)은 미국 북장로교 의료 여선교사였던 엘레스(Ellers, A.J.)가 세운 정동여학당의 후신으로 나중에는 정신여학교가 되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아가씨, 잘 들으시오. 나는 황제께서 요주의 인물로 감시 받는 몸이니 나하고 인연이 있으면 해를 입게 될 것이오. 아가씨 개인 뿐만 아니라 가문에도 화가 미친단 말이오. 그러니 아가씨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조심하시는 것이 이롭습니다.」

    그만하면 되었지 싶었으므로 말을 그친 내가 호흡을 골랐을 때였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응시하던 오선희가 말을 이었다.
    「저는 무남독녀 외딸입니다. 아버지께선 제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일본육사를 졸업시켰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의외의 반응이었으므로 나는 숨을 죽였다.
    행인 둘이 우리 옆을 바쁘게 스치고 지나더니 곧 다시 정적이 덮여졌다.
    정동 거리는 나무가 많아서 밤이면 산골 같다.

    다시 오선희가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한다.
    「연설을 했다고 아버지께 크게 꾸지람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열렬한 개화 지지자입니다.
    조선은 썩었기 때문에 망하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가만.」

    손을 들어 오선희의 말을 막은 내가 물었다.
    「아가씨, 그만하면 되었소. 어쨌든 나는 아가씨 가문까지 연루 시킬 수는 없으니 이제 그만 해주시오.」
    그리고는 덧붙였다.
    「앞으로 아가씨도 내 주변에서 멀어지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으셨으리라 믿소.」

    그리고는 내가 몸을 돌렸으므로 오선희의 표정은 못 보았다.
    어둠 속을 걷는데 재석이 소리없이 옆으로 다가와 따른다.
    「뒤에서 미행이 붙었는데 저쪽을 따라간 것 같습니다.」

    재석이 앞쪽을 향한 채로 낮게 말을 잇는다.
    「덕분에 미행을 떨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가슴이 더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