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⑫

     건너편 민가(民家) 담장으로 나를 안내한 사내가 손을 들어 옆쪽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가 날 찾는단 말이오?」

    의심이 난 내가 30대쯤의 양복장이를 보았다.
    내 표정을 본 사내가 굽신 머리를 숙여 보였다.
    「저는 오목사댁 청지기 문규라고 합니다. 우리 아씨가 골목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선희다.
    허기영의 외사촌.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고 나서 잊고 있었다.
    그것이 열흘쯤 전인가? 골목 안으로 들어선 나는 담장에 기대 서있는 오선희를 보았다.

    흰 저고리에 검정색 치마를 입었고 무릎 밑으로 한뼘 쯤 드러난 종아리에는 흰 양말을 신었다.
    검정색 단화는 갸름한 발모양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다가섰을 때 오선희가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친 팔은 멀쩡해졌다.
    「날 보자고 하셨소?」
    내가 묻자 오선희의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그러나 시선은 내리지 않는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뵙자고 했는데 무례한 것 같습니다.」
    얼굴은 붉었지만 목소리는 또렷하게 이어진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팔 병신이 되지 않고 잘 나았습니다.」
    「다행이오.」

    골목 안은 사람 통행이 없어서 둘 뿐이었다.
    밖은 소란스러웠으므로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때 오선희가 들고 있던 보자기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떡을 해왔습니다. 약소합니다만 받아주셔서 제가 부담을 덜도록 해 주십시오.」

    나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열심히 말하는 오선희의 진지한 자세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받아든 떡 보따리는 무거웠다.
    문득 떡을 좋아하는 봉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맙소.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몸을 돌리려는 나에게 오선희가 서두르듯 부른다.
    내 시선을 받은 오선희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저희들 친구 넷이 개화사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희들한테 토론을 지도해주실수 있으신지요?」
    「나는 그럴 자격이 없소.」
    머리를 저은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일이 많아서 힘들 것 같소.」
    「언제라도 좋습니다. 저희들이 찾아가 뵙지요.」
    「다음 기회에.」
    했다가 나는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오선희씨는 연설이 뛰어나니 만민공동회에 가입하면 큰 환영을 받을 겁니다.」
    그러자 오선희가 시선을 내렸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눕혀졌다.
    「지난번에 연설을 하고나서 아버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한번만 더 그런다면 학교도 그만두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어느 부모가 과년한 딸자식이 선동적인 개화 연설을 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다시 머리만 끄덕인 내게 오선희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 연설만 안하는 조건으로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지요. 그럼 선생님께서 우리를 지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어. 그런 조건을 붙이시다니.」
    쓴웃음을 지은 내 눈앞에 수잔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때 왜 수잔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 얼굴이 어두워졌고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그건 약속 할 수가 없소.」
    몸을 돌리면서 내가 말을 이었다.
    「나보다 훌륭한 개혁 운동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