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⑨

    이시다하고 만났을 때는 저녁 8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기석(奇石)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으므로 약속 장소를 정동교회로 정한 것이다.

    오늘도 내 옆에는 박무익이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의병장이며 지금도 7,8명의 수하를 거스리고 있는 박무익은 나에게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지원군이다. 물론 서당때의 동갑 친구 정유석의 당부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박무익이 없었다면 나는 진작 이 어지러운 세상을 하직했다.

    우리는 교회 마당 구석의 나무그늘에서 마주보며 서있다.
    주위는 짙게 어둠이 덮여졌고 춥다. 이시다는 코트 깃을 세운데다 중절모를 눌러써서 눈만 드러났다.

    이시다가 말했다.
    「이공, 조선 땅에서 개혁이 제대로 이뤄질 것 같습니까?」
    유창한 조선말이다.

    나는 가만있었지만 옆에 선 박무익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다시 이시다의 말이 이어졌다.

    「현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군림하고 있는 한, 간신과 탐관오리가 뭉칠 것이고 백성은 피가 빨리다가 말라죽을 것이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맑은 밤공기가 폐에 흡입되었지만 뜨거운 머리는 식지않았다.

    박무익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이시다는 거침없이 말을 쏟는다.

    「일본 제국과 합병 하는 것이 조선 백성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그렇게 되면 조선 백성은 일본 문명과 복지 혜택을 저절로 받게 되어서 당장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오.」

    「이, 이런, 개같은.」
    마침내 박무익이 눈을 치켜뜨고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 칼을 날릴 기세였다.

    그때 힐끗 시선을 들었던 이시다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조선 의병은 대세를 바꿀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겪어보셨지 않습니까? 반일(反日) 기세가 강하다고 해도 동학군이 무너진걸 보시오.
    임금이 동학군을 이끌어줍디까? 오히려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학군을 무너뜨렸지요.」

    「이놈, 시끄럽다.」
    박무익이 잇사이로 말했을 때 내가 어깨를 펴고 이시다에게 물었다.

    「이시다씨, 그것은 일본군부의 뜻이오?」

    「그렇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한 이시다가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이공의 주위에서도 내 의견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그것이 조선백성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조선을 삼키려는 침략자의 궤변이지.」
    「백성은 등 따숩고 배부르면 됩니다. 제 욕심만 차리는 임금과 탐관오리떼에 시달려 굶어죽고 맞아죽고 병들어 죽는 것보다 일본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더 원할 것이오.」

    「네 이놈.」
    하면서 박무익이 저고리 안에서 꺼내는 것은 권총이다.
    박무익이 이시다의 가슴에 총구를 겨눴다.

    「당장 네 놈을 쏴 죽이리라.」
    「의병장의 기개는 가상하오.」

    이시다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바로 한걸음 앞쪽의 총구를 보면서 이시다가 말을 잇는다.

    「의병장, 그대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오. 이것이 현실이오.」

    그때 내가 박무익의 총 든 손을 쥐며 말했다.
    내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박공, 총을 거두시오. 이시다씨는 우리에게 현실을 알려주었을 뿐이오.
    그리고 우리가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