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때부턴가 우리 사회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사사건건 이념 대결로 치닫는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한 조문 정국, 이번 천안호 침몰 사고를 대하는 보수와 진보의 시각 차는 두 진영이 과연 같은 커뮤니티 내에 사는 사람들인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 실용주의를 천명했는데, 그 내용의 해석에 따라 보수와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오해를 받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중도 실용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더욱이 원래 보수주의란 수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와 현실을 중시하면서 가능한 방안을 하나씩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천 방법으로 보자면 보수주의는 원래 중도 실용이라 할 수 있다.

    보수든 진보든 중도적인 다수가 튼튼하다면 사회는 건강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인데, 중도는 역시 이 핵심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도 보수는 자유 즉 경쟁에 의해 성장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도 진보는 평등 즉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분배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정도의 시각 차이가 있다. 미국도 최근 의료보험법 개정으로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듯이 국가의 기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한, 즉 중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두 진영이 균형을 이루어 서로 견제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사회의 반증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중도적이지 않은 급진적 진보주의자들이 공공연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성보다는 자신의 이성만을 중시하고, 검증되지도 않은 이상을 추구한다. 화려한 이념에 심취되어 경험해 보지도 않고 책상머리에서 생각한 이상을 전파하려 든다. 어떤 때는 먼 장래를 염두에 두고 교실 수업에서까지 이런 이념을 주입하여 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방법이 다소 거칠고 탈법적이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상론자들은 선동적이고 포퓰리즘에 치우치기 쉽다. 하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이 과거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나 북한의 유일사상에서 보듯이, 오늘날의 복잡한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다. 이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북한체제를 옹호하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선까지 치닫는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비취지는 모습은 한마디로 천둥벌거숭이들이라 할만하다.

    어느 사회나 급진주의자는 늘 있게 마련이므로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급진적 성향이 왜 늘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 그런 성향이 많아졌다는 것을 일종의 피드백 신호로 삼아 내포되어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의 일단이 바로 중도 실용주의라는 표현으로 나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왕 중도 실용이라는 방향이 제시되었다면 그 콘텐트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제시도 없이 그저 쓸데 없는 짓이라고 책망만 하는 것은 융통성 없는 태도다. 실제로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지식경제라는 환경은 그 변화의 폭과 속도가 큰 만큼 같은 시장 자본주의 경제라 해도 그 운용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중도실용주의가 담을 가치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추구해온 시장 자본주의가 현재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변화 없이 지속적으로 적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지에 대한 고민과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 즉 청년실업과 고용의 문제, 비정규직의 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문제 등을 그저 시장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치부할 것인지, 또는 보다 정당성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책임감 있는 고민을 함께 할 것인지의 선택이다. 요컨대 중도실용주의란 대략 그 동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던 시장 자본주의의 강점에다가, 사회적 약자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가미된, 이른바 ‘기능하는 사회(functioning society)’를 만들기 위한 고민이 반영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경제 지상주의, 입시 위주의 경쟁으로 치달아 왔던 그 동안의 우리의 가치관에 대한 반성을 포함한다. 이런 반성하는 마음이 제도에 반영될 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좀 더 중도 성향의 가치관으로 오게 할 것이다. 이는 비록 매우 어려운 균형의 문제지만, 경제성장이 다소 더디더라도 사회 구성원이 총체적으로 좀 더 화합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도 실용이라는 방향 전환이 우리가 가꾸어 온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선까지 허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즉, 노력을 해야 할 방향과 절대 허용해선 안 되는 방향이 명확해야 한다. 예컨대 공교육의 수업 현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 나라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교육을 하는 자들을 방관하고 있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