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⑧ 

     가마를 타고 온 오선희는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저고리의 팔굽 아래부터 붕대를 감았는데 내가 봐도 어설펐다.

    「뭘 하느냐? 인사를 해야지?」
    허기영이 꾸짖듯 말하자 오선희는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폐를 끼칩니다.」
    「갑시다.」

    인사를 옆으로 들으며 내가 앞장을 섰다.
    뒤로 박무익과 허기영, 그리고 가마꾼 둘이 멘 가마가 따르고 맨 뒤를 보따리를 쥔 여종이 섰다.
    마치 대감댁 안방 마님의 행차같다.

    그래서 제중원의 화이팅은 갑자기 나타난 나보다 가마행차에 놀라 먼저 묻는다. 
    「뉘댁 아씨래요?」
    「전(前) 충주목사이신 오석구공의 여식이시오.」
    내 옆에 서있던 허기영이 대신 대답했다.

    이제 조선말에 능통한 화이팅은 다 알아듣는다.
    힐끗 나에게 시선을 주었던 화이팅이 제중원 하인들에게 지시했다.
    「어서 진료실로 모셔요.」
    그리고는 몸을 돌렸으므로 어깨를 늘어뜨린 내가 허기영을 보았다.

    「이것보시오. 허형의 외숙이 전(前) 충주목사이셨구려.」
    충주목사면 정3품 고관(高官)이다. 그러자 허기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前) 정3품 따위는 전(前) 대군(大君) 직계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요. 더욱이 우리는 다 벗고 나선 몸이 아니겠습니까?」

    허기영은 그동안 제 신상에 대해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허기영의 근본도 모르고 있다.

    그때 복도에 서있던 우리 옆으로 제중원 의사 셔만이 다가왔다.
    「오, 리.」
    나를 알아본 셔만이 바짝 다가와 섰다.

    허기영이 예의바르게 두어걸음 물러나 외면했을 때 셔만이 영어로 묻는다.
    「여긴 웬일이시오?」
    「예, 친구 동생이 다쳐서 같이 왔습니다.」

    셔만의 시선을 받은 내 가슴이 내려앉는다.
    제중원의 의사들은 모두 나와 수잔의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이다.
    「리, 수잔은 상하이에 잘 도착해 있소.」

    셔만은 나보다 6살 연상이니 서른이다. 세파도 그만큼 많이 겪었으리라.    
    다시 셔만의 말이 이어졌다.

    「수잔은 안정을 찾고 다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한다는거요.」
    머리만 끄덕인 나를 향해 셔만이 빙그레 웃었다.

    「리, 자주 들러 주시오.」
    「고맙습니다. 닥터 셔만.」
    「사랑한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잠깐 말을 멈췄던 셔만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실수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몸을 돌린 셔만이 발을 떼었고 나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한 채 서 있었다.

    화이트가 나왔을 때는 30분쯤이 지난 후였다.
    「리, 들어가봐요. 치료 끝났으니까.」
    진료실을 눈으로 가리키며 화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열흘쯤 지나면 나아질꺼야.」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허기영이 허리를 굽혀 사례를 했다.
    그러나 화이팅은 내가 머리를 숙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선 나와 허기영은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오선희를 보았다.
    팔의 붕대는 단단하게 감겼고 옷매무새도 단정해졌다.

    「곧 낫는다니 다행이다.」
    허기영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이형 덕분이요.」
    그때 내 시선과 마주친 오선희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